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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601015
한자 吳大鉉
이칭/별칭 을길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예래동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박찬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75년연표보기 - 오대현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01년 5월 - 오대현 제주 민란 장두로 활동
몰년 시기/일시 1901년 10월 10일연표보기 - 오대현 교수형에 처해짐
성격 의병
성별
대표 경력 1901년 제주 민란 서부 지역 장두

[정의]

1901년 제주 민란[신축 민란] 당시 민군의 대장.

[개설]

1901년 제주 민란은 토착 신앙이 강한 제주도 민중들의 외래 종교 천주교에 대한 반감, 제주도 경제권을 둘러싼 토호 세력과 중앙에서 파송한 봉세관과의 갈등 등이 원인이었다. 1901년 1월 봉세관 강봉헌(姜鳳憲)이 세금 징수로 민중들을 착취할 때, 천주교 신자인 최형순(崔亨淳)이 실무를 맡은 것이 사건의 시작이 되었다. 제주도 출신 대정군수 채구석(蔡龜錫)은 토착 세력을 규합하여 봉세관과 천주교인들을 공격하였으며, 결국 천주교인 300여 명이 살해되는 등 많은 사상자를 내어 신축교난(辛丑敎亂)으로도 불린다.

[가계]

일명 을길이라고도 하며, 제주도 대정군 예래리에서 태어났다. 오대현(吳大鉉)은 마을의 유력자로서 대정군 향장[좌수]의 지위에 있었다.

[활동 사항]

오대현은 민란 발발 직전에 대정군수이던 채구석과 함께 상무사의 대표[명사장]를 맡아서 향촌 사회에서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오대현은 처음 대정군 우면[지금의 대정읍] 주민들이 참여한 민회에서 과도한 세금 부과를 시정해줄 것을 관에 호소하는 장두로 내세워졌으나, 향임의 지위에 있다는 핑계를 대고 관아로 피신하여 버렸다. 그러나 3일 후 대정군 좌면[현 서귀포시 병합 이전의 중문면]의 주민들이 중면[지금의 안덕면]의 주민들과 더불어 민회소를 설치하여 제주군 용수리에서 합세한 주민들과 더불어 관아에 피신해 있던 오대현을 장두로 내세웠다. 이때 주민들은 다른 지역의 주민들까지 이 대열에 참여시키기 위하여 서부 지역과 동부 지역으로 나누어 주민들을 결집시켰다. 그리고 서부 지역 장두로 오대현을, 동부 지역의 장두로 강우백을 내세웠다.

이들 민란 참여자들은 두모·한림 등지에 민회소를 두고서 제주성으로 향할 준비를 하였다. 그런데 5월 14일 천주 교회 측에서 민회소를 선제공격하여 오대현을 비롯한 6명의 민회 주도자들을 잡아들이고 대정성에서 주민 2명을 살상하였다. 이 때로부터 민회 세력은 천주교인들에 대한 전면 투쟁으로 방향을 선회하면서 민군 진영을 편성하였다. 그리고 잡혀간 오대현을 대신하여 청년 이재수강우백과 더불어 각각 서진과 동진을 지휘하게 되었다.

오대현은 민란이 진정된 후 6월 9일 찰리사 황기연이 도착하자 민란의 장두인 이재수·강우백 등과 함께 옥에 갇혔다. 7월 13일 민란주동자와 함께 서울로 호송되어 7월 27일부터 평리원에서 재판이 치러졌다. 10월 9일 최종 판결이 내려져 다음 날인 10월 10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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