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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601024
한자 康龜範
이칭/별칭 기당
분야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성씨·인물/근현대 인물,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법환동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이규복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09년연표보기 - 강구범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31년 - 강구범 김춘대와 결혼
활동 시기/일시 1933년 - 강구범 신천호모공업소 창업
활동 시기/일시 1948년 - 강구범 조선인상공회회장, 과학기술협회위원장으로 취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56년 - 강구범 브라질대통령 표창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85년 - 강구범 일본내각총리대신 표창
활동 시기/일시 1986년연표보기 - 강구범 해양연구소를 설립하여 제주대학교에 기증
활동 시기/일시 1987년연표보기 - 강구범 기당미술관건립하여 서귀포시에 기증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88년 - 강구범 대한민국 국민포장 수상
활동 시기/일시 1992년 - 강구범 제주대학교에 1억3천만원 기부
몰년 시기/일시 1994년연표보기 - 강구범 사망
출생지 강구범 출생지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법환동
성격 재일교포 사업가
성별
본관 신천
대표 경력 신천호모공업소 대표|재일조선인연맹 조선인상공회 회장

[정의]

해방 후 일본에서 활동한 서귀포 출신의 교포 사업가.

[가계]

본관은 신천이며 호는 기당이다. 강거석(康巨石)의 아들이며 서예가 강용범(康用範)의 아우이다.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법환동에서 태어났다

[활동 사항]

강구범(康龜範)은 여섯 살 때 선친에게 한문을 배우고 열한 살 때 전라북도 계화도로 건너가서 친형 강용범과 함께 간재 전우의 문하에서 한문을 배웠다. 19세때 가출하여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아버지의 강요에 의해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러나 이해 강구범은 밭을 판 아버지의 돈 일부를 가지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에서 잡부생활을 하며 생계를 이어나갔다. 1931년 제주 출신 교포 김춘대와 결혼하여 부인이 가져온 600엔과 그동안 모은 돈으로 1933년 2월 신천호모공업소를 창업하였는데 자전거 부품을 생산하는 고무공장으로써 1938년에는 일본의 대표적인 기업으로 성장, 일본 마그네슘의 하청 공장으로 인정받기까지에 이르렀다.

강구범은 1944년 태평양전쟁 때 일본군속으로 징발되어 남양의 해군기지에 배치되었으나 이듬해 전쟁이 끝나자 도쿄에 돌아왔다. 해방이 되어 재일조선인연맹이 히비야 공회당에서 창립대회를 개최할 때 그는 동연맹 산하의 조선인상공회 회장, 또 과학기술협회 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1948년 6월15일 조선해방구원회가 조총련 산하로 조직되어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조련이 좌우(左右)로 분열 대치상태로 치닫고 좌경화 되어가자 강구범은 자유주의 그룹을 이끌고 조총련에서 탈퇴하였다.

1964년 도쿄올림픽 수영경기장에 사용된 고무판이 신천제(信川製)를 사용하면서 스미도모 화학고무와 직거래가 트여 기술력과 신뢰도에 있어서 일본 사회에 인정을 받게 되었다. 이무렵 일본 국적을 갖고 브라질로 가서 브라질 영주권을 받게 되었고 주택용 샷시 제조업을 시작하는 한편, 브라질의 수도인 상파울로에 약 1천5백만 평의 땅을 매입하여 대농원을 조성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부동산 매입 과정에 은행과 공무원의 비리로 실패하였다.

그 후 강구범은 남미에서의 사업을 마무리하고 일본에서 생활하던 중 42년만인 1985년에 고향을 다시 찾았다. 귀향한 강구범은 10억여원을 들여 제주시 조천읍 함덕리에 해양연구소를 건립하여 제주대학교에 기증하였고 고향에 기당복지회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1987년 대한민국 최초의 사립박물관인 기당미술관을 건립하여 서귀포시에 기증하였고 1992년에는 제주대학 발전기금으로 1억3천만원을 기탁하는 등 제주도 발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저술 및 작품]

강구범의 저서로는 1987년 6월 간행된 『망향의 여로』가 있다.

[상훈과 추모]

강구범은 1956년 브라질 대통령 표창, 1985년 일본 내각 총리대신 표창을 받았고 1988년에는 대한민국 국민포장을 수상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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