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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601404
한자 改良書堂
분야 문화·교육/교육,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임승희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지역에서 20세기 초 신교육 실시에 따라 재래의 서당을 시대에 맞는 교육 기관으로 개조한 서당.

[개설]

개량 서당의 명칭은 보통 숙(塾), 서숙(書塾), 사숙(私塾), 의숙(義塾), 학숙(學塾), 학당(學堂), 학사(學舍) 등으로 이름을 붙여서 재래식 서당 및 보통학교의 명칭과 구별하였다. 개량 서당의 책임자를 숙장(塾長), 선생을 숙사(塾師), 사장(社長, 師丈), 교원(敎員), 교사(敎師) 등으로 불렀고, 가르침을 받는 피교육자를 ’학동(學童), 학생(學生), 생도(生徒), 서생(書生), 접장(接長)‘이라 지칭했다.

특히 제주도에서는 개량 서당과 전통 서당을 확실하게 구분하여 호칭하였는데 조선 시대부터 내려온 고유한 재래식 전통 서당은 한문 서당이라고 하고, 한문 이외에 일본어, 산술 등을 교수하는 비교적 규모가 큰 곳은 개량 서당으로 호칭하고 있다. 또한 개량 서당은 공동 서당(共同書堂) 또는 이민 서당(里民書堂) 등으로 호칭하기도 했다.

[변천]

1910년대에 이르러 제주에서는 보통 교육과 중등 교육을 통하여 신교육이 실시되면서 재래의 한문 서당은 점차 위축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전통적인 교육 기관인 향교 교육과 서원 교육은 소멸하였으나 사설 교육 기관이었던 서당은 계속 유지되어 일반 대중의 초등 교육을 담당하게 되었다.

1910년대를 전후하여 재래의 서당을 개량, 근대적 초등 교육 기관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논의가 제기되었다. 당시 공립 보통학교가 제주, 정의, 대정에 개설되었고 1923년에 이르러 각 면에 1개교의 보통학교가 개설되었으나 그 통학권을 벗어난 마을에서는 개량 서당, 즉 사숙(私塾)을 주민들 스스로 개설하려는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이는 초등 교육 기관의 부족을 해결하기 위하여 서당을 정규 초등 교육 기관에 준할 수 있도록 학교의 성격, 교육 내용, 운영 방법 등을 개선하여야 한다는 인식의 결과에서 비롯된 것이다.

당시의 개량 서당은 근대 교육의 교과를 사용하고 교원도 신교육을 받은 사람을 채용하여, 정규 학교를 대신해 신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민족 교육의 장으로서 큰 구실을 담당하였다. 이에 따라 개량 서당의 숫자가 증가해 가자, 일제는 1918년 '서당 규칙'을 제정하여 종래의 서당 교육을 체계화하고 식민 통치를 강화해 나갔다.

1929년에는 개량 서당의 설립을 도지사의 인가제로 ‘서당 규칙’을 개정하여 서당 개설을 규제하고, 기존 서당을 폐쇄하는 등의 탄압을 가하였다. 따라서 1930년대 이후 서당의 수는 급격히 감소하였다. 이는 1면(面) 2교제(二校制)가 실시되어 보통학교의 아동수가 증가하고 기존의 보통학교 학급수가 증가된 데에서 일어난 현상이기도 하고, 더구나 산간 오지에 2년제 간이 학교의 개설로 일어난 현상이기도 했다. 이때에도 일제는 획일적인 서당 정책을 실시하지 않고 민족주의적 색채가 있거나 식민지 통치 정책에 방해가 되는 서당에 대해서는 탄압을 가하였다.

한편 그 밖의 서당에 대해서는 교육 내용의 개선과 서당 교사에 대한 강습 등 식민지 교육을 주입시키면서 경비를 지원하여 초등 교육 기관을 활용하였다. 일제 말기에 이르러 제주도의 초등학교가 1면 3교제로 증가됨에 따라 초등 교육 이수자가 증가하고 학급수도 불어났다. 이로 인해 개량 서당의 학동수는 감소하였으며 교육 내용 또한 전시 체제에 부응하는 식민지 교육 기관으로 성격이 뒤바뀌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내용]

전국적으로 개량 서당이 민족 교육 및 초등 교육 역할을 수행하며 그 수가 급증했기 때문에 일제는 1918년 서당 규칙을 발포하여 서당에 대한 탄압을 가하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탄압 현상은 제주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구한말부터 일제 강점기 시기에 세워진 서귀포의 주요 개량 서당과 폐숙 경위는 다음과 같다.

1) 일신 학숙은 1920년에 보목리에 개설되었는데 숙장은 양한표, 교사는 김석기, 양연백, 한무섭 등이 재임하였다. 1930년 보목 서당으로 이어졌으며 보목 서당 조합에서 운영하였다.

2) 양원 사숙은1923년 신효리에 향사가 개설되었다. 초대 숙장은 대정읍 보성리 출신의 조석인, 2대 숙장은 효돈 출신의 김완진이었다. 교사로는 강성건, 오창수, 김희룡, 이재현, 김성암, 김관해 등이 재임하였는데 이 사숙의 후원 단체는 월라계(月羅契)이며, 1938년 신효 공립 심상 소학교가 개설되자 학동수의 감소에 따라 서당 형태로 명맥을 유지하였다.

3) 중앙 의숙은 1930년 서호리 351번지에 개설되었는데 당시 중앙 의숙 기성회가 조직되었다. 기성회장은 초대 고대규, 2대 김향진이었고, 교사로 허은 외 여러 명이 재임하였다. 당시 ‘숙 창립가’와 ‘의숙 택지가’를 만들어 불렀다. 또한 재일 서호 제주회(在日西好濟州會)에서 후원금을 다액 보내온 바 있으나 1934년 5월 서호 간이 학교가 개교하면서 자연 폐숙되었다.

4) 법환 서숙은 1931년 법환리 214-1번지에 개설하였으며 서당 명칭으로 마을 이름을 사용하였다. 교사로는 백화중, 강치은, 강명옥, 강을봉, 김춘지, 강기완, 강봉윤, 오창수, 강정숙, 강태여 등이 재임하였는데 1945년 자연 폐숙되었다.

5) 보신 사숙은 1935년 토평리에 개설되었는데, 교사로는 정춘종, 진철화, 양서훈, 오재일, 현무현, 강영준, 박원일, 오동건, 오만부 등이 재임하였고 1945년에 자연 폐숙하였다.

6) 개성 학숙은 1905년 중문리 1699번지에서 이재교가 설립하였으며, 부집장으로 이기환이 있었다. 1908년 폐숙될 때까지 약 30여 명이 수료하였다.

7) 진수 의숙은 1920년 중문리 2078번지에 개설하였는데, 1926년 태풍으로 사숙 건물이 무너지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당시 숙장은 이기언, 교사로는 이태춘, 김옥현, 박찬일, 문달진, 이갑출, 김원옥, 고유만 등이 재임하였다. 1927년 5월 좌면 공립 보통학교[지금의 중문 초등학교]가 개교되면서 자연 폐숙되었다. 이 의숙에 바로 앞서 기독교 선교를 목적으로 사설 영명 학교를 세웠으나 진수 의숙이 개숙되어 학동이 없게 되자 폐교된 바 있다.

8) 진성 의숙은 1921년 하예리 괴화동에 개설되었는데, 당시 숙장은 김태순, 교사는 김태순을 비롯하여 이태춘, 오을남, 김대숙, 강승태 등이 재임하였다. 1927년 좌면 공립 보통학교가 개교되면서 학동 수가 점차 감소하였고, 1928년 4월 진성 의숙을 진성 서당으로 개편하여 진택주, 정영택, 강윤옥, 김상언 등에 의해 교육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1944년 5월 예래 공립 국민학교가 개교하게 되자 폐숙되었다.

9) 광제 의숙은 1922년 강정리 4515번지에 향사가 개설되었다. 숙장은 초대 고홍관, 2대 윤옥란, 교사는 고유만, 김영택, 윤공렬, 김홍수, 강치염, 윤광언, 고기생 등이 재임하였는데 1945년 자연 폐숙되었다. 또한 강정리 마을에는 광제 의숙 개설 이전인 1918년 강정리 4507번지에 배영 의숙이 개설되기도 하였다.

10) 진명 의숙은 1926년 강정리 용흥동에 개설되었는데, 당시 진명 청년회[회장 김찬민]와 이장 문용규의 활동으로 운영되고 좌면사무소의 옛 건물을 매입하여 학사로 활용하였다. 숙장은 강정 2구(區)의 4개 마을 유지들이 순환하면서 맡아 운영하였으며 교사로 강석봉, 이갑록 등이 재임하였다. 1940년 7월 도순 공립 국민학교가 개교하자 이 곳으로 취학하게 되면서 자연 폐숙되었다.

11) 육영 의숙은 1929년 도순리 861-1번지의 향사에서 개설되었다. 당시 마을 독지가 28명이 각자 2,000원을 기부한 재원으로 숙사를 건립하여, 운영하였다. 하원동, 도순, 회수, 월평, 염돈 마을에서 통학하였으며 교사는 강기완 등 여러 사람이 재임하였는데, 1940년 7월 도순 공립 국민학교가 개교되면서 폐숙되었다.

12) 한남 의숙은1925년 대정읍 모슬포에 설립되었는데, 일제의 탄압에 의해 1928년에 폐숙되었다.

13) 일신 서당은1934년 성산읍 신천리에 개설되었는데, 당시 재적 학생수는 30여명, 서당의 규모는 지금의 10평 규모의 초가였다. 그러나 정의 보통학교가 표선 심상소학교로 이전됨에 따라 통학이 용이하게 되자 학생들이 서당을 떠나게 되면서 1943년 자연 폐숙되었다.

14) 인명 사숙은 1925년 남원읍 위미리에 개설되었는데, 당시 재적 학생수는 50여명이었고, 일본 경찰의 탄압으로 인해 1938년 폐숙되었다.

15) 신유 의숙은 1922년 4월 2일 김성숙에 의해 가파리 355번지에 개설되었는데, 당시 재적 학생수는 30여 명이었다. 그러나 모표로 쓴 무궁화 도안이 빌미가 되어 일제의 탄압을 받아 1932년 폐숙되었다.

16) 효돈 서숙은 1920년 신효리에 개설되었는데, 당시 규모는 25평 규모의 교실과 3평 규모의 창고가 활용되었다. 그러나 신효 공립 심상소학교로 승격됨에 따라 1938년에 자연 폐숙되었다.

17) 진명 의숙은 1926년 강정동에 개설되었는데 당시 재적 학생수는 20여명 내외였고, 서당 규모는 기와 목조로 약 30여 평에 달하였다. 그러나 도순 초등학교 설립 개교로 인해 1940년에 자연 폐숙되었다.

18) 대동 서당은 1935년 대정읍 보성리 1216번지에 개설되었다. 당시 재적 학생수는 40-60명이었으나 사립 보성 심상소학교 개교로 인해 1940년 자연 폐숙되었다.

19) 의문 의숙은 1922년 대정읍 무릉리에 개설되었는데 1940년 5월 7일 무릉 공립 심상소학교의 개교로 1940년 폐숙되었다.

[의의와 평가

제주 개량 서당들 가운데 많은 수가 일제의 방침에 의해 근대 학교로 전환되었는데, 이는 제주 근대 교육이 서당 교육이라는 물적 토대를 근간으로 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즉, 일제 강점기의 초등 교육 기관 대부분이 개량 서당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제주도 근대 교육의 맹아로서 서당 교육의 역할은 그것이 식민지 제도 교육으로 전환됨과 동시에 일제의 식민지 반봉건 교육 정책에 의해서 반민족적 교육 기구로 고착되면서 철저하게 서당 교육의 역할이 왜곡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 중반기까지의 개량 서당은 근대 교육 시설이 부족하고 의무 교육이 실시되지 못했던 시대에 근대적 초등 교육을 실시하여 교육의 저변 확대와 문맹 퇴치에 큰 구실을 하였으며, 민족의식 고양과 애국 계몽 운동에도 일익을 담당하였다는 데 큰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3.02.04 내용 수정 원고 내용 교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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