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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제주 출신 항일 독립 운동가이자 사회주의 운동가 . 강문석(姜文錫)은 동아통항조합을 결성하여 일제수탈에 저항했고, 일본에서 항일운동과 노동운동을 주도하고 중국공산당 상해 한국인지부 책임자를 맡는 등 일제강점기 민족해방운동과 공산주의 활동을 지도하다 수차례 투옥되었다. 강문석은 1906년 제주특별자치도 대정읍 안성리 1661번지[추사적거지, 그의 증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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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안덕면 덕수리에서 매년 펼쳐지는 전통 민속 문화 축제. 덕수리 전통민속축제는 제주도의 대표적인 문화 축제로, 덕수리는 1977년 제6회 탐라 민속제 최우수상[불미 공예], 1979년 전국 민속 경연 대회 문공부 장관상[불무 노래], 1980년 전국 민속 예술 경연 대회 대통령상[방앗돌 굴리는 노래], 1981년 전국 민속 예술 경연 대회 문공부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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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도순동에 있는 6·25 전쟁기 국민방위군 훈련병들의 임시 매장지. 2003년 6월 13일 해군 제주방위사령부에서는 제주도 서귀포시 도순동 강정천 하천 속칭 ‘난쟁이도’에서 한국전쟁 당시 국민방위군으로 징집되어 훈련 중 질병 등으로 숨진 44구의 유해를 발굴하였다. 이들 유해들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12월 신속한 전시병력 동원령에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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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안덕면 동광리에 있는 제주 4·3사건으로 파괴된된 자연마을 터. 무등이왓은 1948년 11월 21일 마을이 전소되어 지금까지 복구되지 못한 잃어버린 마을이다. 이곳은 약 300년 전에 관의 침탈을 피해 숨어든 사람들이 화전을 일궈 살아가기 시작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주민들은 주로 목축과 조·메밀·콩 등을 재배하며 살았다. 교육열이 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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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의 대표적 주물공예인 ‘불미공예’의 무형 문화를 보존하고, 각종 민속 재현 행사를 통해 전통과 문화를 이어가는 문화마을 덕수리는 제주도의 서남쪽 산방산 북쪽 기슭에 위치한 안덕면에 위치하는 마을이다. 덕수리는 1979년 불미공예로 처음 문화공보부장관상을 수상하였고, 1980년에는 전국민속경연대회에서 「방앗돌 굴리는 노래」로 대통령상을 수상하였으며, 198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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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성산리에 있는, 제주 4·3 사건 당시 서북청년단 특별중대가 주둔했던 성산동국민학교 건물. 성산리 서북청년단 주둔소는 서북청년단을 중심으로 구성된 특별중대가 약 3개월 정도 주둔하던 곳으로 당시에는 성산동국민학교 건물이었다. 정확한 규모와 주둔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약 100여 명의 군인들이 주둔했었다고 증언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구좌면 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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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포 지역 특산 수산물인 자리돔을 테마로 한 수산 관광 축제. ‘수산일품보목자리돔큰잔치축제’는 서귀포시 보목동 지역의 특산 수산물인 자리돔과 유네스코 생물권 보존 지역인 서귀포 보목리 섭섬의 아름다운 해안 풍경을 배경으로 어업인과 시민, 관광객이 함께 만들어 가는 수산 관광 축제이다. 자리돔은 붕어만한 크기의 암갈색의 돔 종류로서 주로 제주도 연안과 일본 규슈 연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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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영남동에 있는 4·3 유적지. 해발 5백 m 고지에 위치한 영남동은 4·3 사건 당시 리 단위로 독립된 마을이었다. 16가호의 주민들은 옛부터 화전을 일궈 보리나 고구마를 재배했고, 숯을 굽거나 사냥하며 살았으며, 한문을 가르치던 서당도 있었던 평화로운 마을이었다. 그러나 1948년 11월 18일 토벌대가 초토화작전을 벌이며 영남리에 난입했다.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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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사건 당시 소개, 폐허 된 후 복구하지 못한 잃어버린 마을. 종남굴은 위미1리와 신예1리 경계에 있던 마을이다. ‘종남’은 떼죽나무의 제주말로 이 근처는 지금도 때죽나무가 많다. 4·3사건 당시에는 고씨·현씨 등 10여가호가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4·3사건 당시 이곳이 ‘산사람’들에게 은신처와 양식을 제공할 여지가 있다 하여 토벌대에서 이주를 명하므로 집을 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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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사건 당시 소개령으로 폐허가 되어, 복구되지 않은 마을. 천서동(川西洞)은 내[川] 서쪽에 있다 하여 일명 ‘냇서왓’으로 불리우며, 천서동은 ‘냇새왓슬’의 한자 차용 표기이다. 천서동은 마을 북쪽으로 제2산록도로와 접해 있다. 4·3사건 당시 약 45가구, 120여 명 정도의 주민이 화전갈이와 목축업을 하며 살았다. 천서동은 동동과 서동으로 나뉘어진 비교적 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