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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600002
한자 城邑民俗-邑治空間-原形-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오상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80년 5월 6일 - 지방민속자료 제5호로 지정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84년 6월 7일 - 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로 승격
성읍민속마을 -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리 지도보기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표선면에 있는 조선 시대 정의현의 읍치

[개설]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표선면에 있는, 조선 시대 정의현의 읍치였던 성읍 마을은 1423년(세종 5) 정의현 읍치를 성산읍 고성리에서 이곳으로 옮긴 이래 1914년 행정구역의 개편 때까지 고을의 중심지로 500년 동안 이어져 왔다. 현존하는 조선 시대 읍성 가운데 전통적인 모습이 가장 잘 남아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1980년 5월 6일 제주특별자치도 민속자료 제5호로 지정되어오다 1984년 6월 7일 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로 승격되었다.

성읍 마을은 제주도의 동남부 중산간에 위치한 마을로 행정구역 상으로는 서귀포시 표선면에 속해 있다. 제주시로부터 남동쪽으로 34km, 동쪽 성산포에서는 24km, 서쪽 서귀포에서는 36km 정도 떨어져 있으며, 수리적 위치로는 동경 126도 48분, 북위 33도 23분이 된다. 북쪽으로는 제주시 구좌읍과 접하고 있고 동쪽으로 서귀포시 성산읍, 서쪽으로는 표선면 가시리가 있고 남쪽으로 가면 표선리 해안 지역에 이르게 된다. 해발고도는 평균 125m이나 남쪽 해안가로부터 8km 이상 떨어져 있어서 통상 중산간 마을로 분류된다.

[마을의 자연지리]

한라산의 동남 사면에 위치한 성읍리 지역의 지세는 비교적 완만한 경사면을 지니고 있다. 성읍리는 사방에 여러 오름들이 분포해 있는 제주에서는 드문 분지형 지세를 지니고 있다. 성읍리의 오름 중에서 성읍을 대표하는 오름은 해발 326.4m의 영주산이다. 성읍1리의 북쪽에 위치해 있어서 마을을 진호하는 역할을 하고 겨울철에는 차가운 바람을 막아주는 기능도 지니고 있다. 오름의 명칭으로는 드물게 산방산처럼 ‘-산’으로 불리고 있다. 원래 영주산한라산의 별칭으로 사용되었던 것인데, 성읍 마을의 이 오름도 영주산이라 칭했다. 아마도 이 오름도 한라산처럼 신성한 산으로 인식되었던 것에서 연유한 것이라 생각된다.

[마을의 유래와 입지조건]

성읍 마을이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된 계기는 1423년 정의현의 읍치를 지금의 성산읍 고성리에서 옮겨오게 되면서이다. 조선 시대에는 북쪽의 제주목, 동쪽과 서쪽에 정의현대정현을 두었는데, 정의현의 읍치는 지금의 성산읍 고성리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의현의 읍치가 너무 동쪽으로 치우쳐 있어서 관리들뿐만 아니라 백성들이 행정 민원을 보는 데 불편하였다. 이에 따라 도안무사(都安撫司) 정간(鄭幹)정의현 지역을 순시하던 중 진사리(晉舍里)[성읍리의 전신 마을]에 이르렀을 때 이 지역이 정의현 고을의 중앙에 위치한 점을 고려하여 새로운 읍치로 최종 결정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시대 정의현의 범위는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서귀포시 성산읍·표선면·남원읍을 포함하여 과거 서귀포 시내의 동쪽 지역이 이에 해당한다. 따라서 성읍 마을은 이들 지역의 거의 중앙에 해당하기 때문에 정의현 고을의 중심지로서 손색이 없었던 것이다. 아울러 완만한 경사지에 너른 평지가 펼쳐져 있어서 한 고을의 읍치가 들어서기에 충분했다고 판단된다.

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성읍 마을 일대는 다른 중산간 지역처럼 용천수가 발달하지 못했다. 그러나 성읍리에는 한라산의 중턱에서 발원하여 영주산 서쪽을 경유하고 마을의 동쪽을 돌아나가는 제주도에서 가장 긴 하천인 천미천이 흐르고 있다. 이 하천은 마을 남쪽으로 흘러 신천리 해안 하구로 빠지는데, 경사도가 완만하여 여름철 집중호우 시에는 하천이 범람하여 마을이 물에 잠기는 피해를 주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 천미천에는 곳곳에 하천 바닥에 움푹 패인 웅덩이[피트홀]가 있어서 건기에도 물이 고여 있게 되는데, 바로 이 물이 용수로 이용되어 제주도의 다른 중산간 마을에 비해 음료수의 확보가 비교적 용이하였다고 볼 수 있다.

성읍 마을은 해안에서 인지가 불가능한 내륙 쪽으로 들어와 있다. 아울러 마을 주변으로는 여러 오름들이 둘러싸여 있어서 자연적인 방벽 역할을 하고 있다. 따라서 남쪽이나 동쪽에서 접근하는 외적을 막기에는 좋은 입지적 조건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지역의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성읍은 일찍부터 전란이 미치지 않는 ‘병화불입지지(兵火不入之地)’로 불리기도 했다.

[마을의 풍수지리]

풍수지리적 관점에서 성읍 마을을 보면 한라산이 조종산이자 전체 고을을 진호하는 진산(鎭山)이 된다. 그리고 마을의 주인이 되는 주산은 정의현성의 북쪽에 위치한 영주산[해발 326m]이다. 동쪽의 본지오름 방면으로 이어지는 맥이 좌청룡에 해당하며 서쪽 모지오름과 장자오름으로 이어지는 맥이 우백호에 해당한다. 남산봉[해발 178m]이 안산에 해당하며 천미천이 명당수 역할을 하여 육지부와 유사한 풍수적 해석도 가능하다. 그러나 제주의 지형적 특성상 육지부와 같은 전형적인 명당판 구조를 갖추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주로 형국론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강하다.

형국론(形局論)으로 보면 성읍 마을은 두 가지로 해석되고 있다. 하나는 포구에 정박하고 있는 배의 형국으로 보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한라산의 맥을 중심으로 장군이 앉아 있는 ‘장국대좌형(將軍大座形)의 형국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배의 형국으로 보는 것은 마을의 동쪽으로 천미천이 휘돌아 나가는 지형적 형상에서 연유한 것이고 장군대좌형의 경우는 군사적으로 볼 때 장군이 앉아 있는 큰 자리로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여 방어상 매우 유리한 지세적 특성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마을의 현황 및 공간구조]

성곽은 각이 없는 네모의 형태이고 직경이 약 770m 정도이다. 마을공간은 우리나라 읍성에서 많이 보이는 동서축 도로를 따라 동문과 서문이 설치되어 있고 이 도로를 남쪽으로 연결한 곳에 남문이 설치되어 있다. 중앙에서 북쪽으로는 주로 관청들이 들어서 있고 남쪽에는 민가가 혼재된 모습을 띠고 있다. 동북쪽에는 수령의 집무처인 동헌, 그 남동쪽으로는 객사가 있으며 향교는 다른 고을과 달리 읍성의 서문 안에 위치해 있다.

현재 이곳에는 성읍민속마을을 비롯하여, 건축학적 및 민속학적인 가치가 뛰어난 5건의 가옥이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되는 등, 국가지정 문화재로 6곳이 지정·보호되고 있다. 또 정의현의 동헌인 ‘일관헌’과 ‘정의향교’, 돌하르방 12기가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1984년 6월 7일 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 제188호[보호구역 3,191711㎡]로 승격되었으며, 1987년 9월에는 문화공보부 공시 제709호로 보호구역이 790,747㎡로 축소 조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마을의 공간구조를 보면 성읍1리는 방위에 따라 동상동·동하동·서상동·서하동·서동 등의 5개의 자연촌락으로 구성되어 있다. 조선 시대 정의현의 읍치 영역에 해당하는데 읍성 내부 지역은 현재 민속마을로 지정되어 상당 부분의 토지가 국가에 수용된 실정이다. 이로 인해 주민들의 거주공간은 주로 성밖 지역에 형성되어 있다. 최근에는 동상동 북쪽으로 문화마을이 조성되어 주민들의 입주가 이루어지면서 새로운 거주공간으로 자리잡고 있다.

마을의 주요 지명으로는 성뒷골·가가비통·막은골·아득골·남문골·버런방죽·창뒷골·옥골·둠부리·노더리방죽·안밧·생교골·닥남밧·벤저리동산·모름터·공문동산·성뒤·빌렛동산 등이 있다.

[마을의 문화적 가치]

성읍 마을은 현존하는 조선 시대 읍성 가운데 전통적인 모습이 가장 잘 남아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대부분의 조선 시대 읍치 공간은 일제 강점기 이후 시가지의 확장에 따라 원형을 상실했다. 그러나 성읍 마을은 중산간에 위치해 있어서 근대문명의 여파에도 불구하고 원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 비록 성곽이나 동헌, 객사와 같은 일부 관청 건물들이 복원된 모습을 띠고 있으나 제주문화의 정수를 느낄 수 있는 민가들은 잘 남아 있다.

민간의 주거공간이 읍성내부에 고스란히 남아있는 사례는 전국적으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제주 특유의 올레를 거쳐 마당으로 들어서면 독특한 구조를 지닌 초가와 부속 건물, 돗통시·우영·항[취수시설]까지 볼 수 있다. 이와 더불어 각 성문에는 제주의 상징 돌하르방이 세워져 있다. 제주목과 대정현에 있던 돌하르방이 뿔뿔이 흩어졌지만 정의현의 돌하르방만은 아직도 제자리를 지키면서 고을을 진호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서문 인근의 향교도 잘 보존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객사에 모셔져 있던 전패가 있다. 전패는 임금을 상징하는 것으로 중시되었는데, 일제 강점기 때 대부분 없어졌지만 정의현의 전패만은 지금까지 보존되어 내려오고 있다. 아울러 민요나 고소리술·오메기술 등의 제조법, 초가 건축술 등의 무형문화재도 전수되고 있다.

이처럼 유형·무형의 문화재가 남아 있는 성읍은 육지부의 하회마을·양동마을·외암리 등의 민속마을과는 차원이 다르다. 육지부의 민속마을이 육지부의 양반문화를 보여주는 전통촌락인 반면, 성읍은 정의현이라는 한 고을의 중심공간이자 성곽으로 이루어진 일종의 도회(都會)공간이다. 조선 시대 지방행정이 이루어지던 장소임과 동시에 사람과 물자가 모여드는 유통의 중심이기도 하고 관민의 문화가 어우러져 존재하던 거시적 규모의 문화경관이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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