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600004
한자 -加波島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가파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강경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750년 - 목사 정언유가 진상하여 가파도에 흑우장을 설치하고 흑우 50두 방목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40년 - 가파도 영국 선박 2척 내습하여 방목 중인 흑우 약탈사건으로 목장 폐지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42년 - 가파도에 이원조 목사가 흑우 약탈을 막기 위하여 주민들의 입도를 허가하여 40여 가구가 이주하면서 마을 형성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14년 - 모슬포 하모리에서 분리되어 행정동 가파리가 됨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21년 - 가파도에 김성숙에 의해 신유의숙 창설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23년 - 가파도 항개 서방제 축조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36년 - 가파도 연해어업의 멸치잡이, 자리잡이 등의 어로방법 도입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49년 - 가파초등학교 설립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72년 - 가파도 전신전화 취급 개시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77년 - 가파도 자가발전소시설 점화식 거행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79년 - 도항선 가파호 취항 (남군관공선)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82년 - 가파도 지하수개발 성공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83년 - 가파도 수도 통수식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87년 - 가파도 주민 김문창 밭갈이 작업 중 2천 년 전 돌도끼 발견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09년 - 제1회 가파도 청보리 축제 개최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10년 - 가파도 올레 10-1 코스 개장
가파도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가파리 지도보기
마을단체기관 가파리사무소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가파리 70-1 지도보기
마을단체기관 가파리보건진료소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가파리 83-1 지도보기
마을단체기관 가파초등학교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가파리 464 지도보기
의례 장소 포제단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가파리 하동 포구 동쪽 말 잡은 목지도보기
의례 장소 메부리당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가파리 하동 포구 바위지도보기
의례 장소 항개당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가파리 상동 포구 시리지도보기

[개설]

가파도는 행정구역상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가파리에 해당된다. 대정읍 모슬포 항구에서 뱃길로 20여 분, 남쪽으로 5.5㎞ 푸른 바다 위에 떠 있는, 한국의 유인도 중 고도가 가장 낮은 섬으로, 섬 평균 고도가 20.5m이다. 면적은 84ha에 불과하나 18만 평의 청보리 물결 위로 한라산을 비롯한 산방산·송악산·고근산·군산·단산 등 다섯 개의 산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으며, 국토 최남단 마라도가 보이는 비경을 품고 있는 섬이다.

은둔의 섬 가파도는 최근 새로운 관광 트랜드인 ‘녹색 관광’을 관광의 미래로 구상하면서 새로운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예전의 낚시 관광 위주에서 생태 체험 관광지로 변모하여 많은 관광객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다. 가파도 주변 해안은 암초가 많아 각종 어류와 해산물이 풍부한 황금 어장이고, 섬의 70%가 보리밭으로 2009년부터 개최된 청보리 축제가 국내외에 널리 알려지면서 가파도의 보리가 새로운 관광 자원이 되고 있다.

가파도 포구는 섬을 걸으며 아름다운 자연의 풍광을 만끽하고 뭍으로 나가는 사람들과 들어오는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모습으로 항상 활기차다. 2009년부터 개최된 청보리 축제와 2010년 3월 말에 올레 코스가 개장되면서 전국적으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걷기 바이러스’로 인해 끊임없이 사람들의 발길이 이 섬으로 향하고 있다. 조용한 섬이었던 가파도가 활기찬 섬으로 변하고 있는데, 섬의 자연과 역사는 얼마나 아름답고 깊은지, 그리고 사람들의 삶과 문화는 어떤 빛깔을 띠고 있는지 펼쳐 보자.

[아름다운 풍광과 역사적·문화적 자원을 고스란히 간직한 섬]

가파도가 있는 가파리는 1914년 모슬포 하모리에서 분리되어 상동과 하동 2개의 자연마을로 구성된 아름답고 소박한 마을이다. 섬의 옛 이름은 가파도(加坡島, 加波島)·가을파지도(加乙波知島)·개도(盖島)·개파도(盖波島, 盖波嶋) 등 여러 가지였다. 가파도는 비록 면적이 84ha에 지나지 않는 작은 섬이지만, 해안가를 따라서 주민들의 생명수였던 큰응진물·냇골챙이물·돈물깍·물앞 등 용천수가 있어서 제주도 부속 도서 중에서는 가장 물 이용 혜택을 많이 받은 섬이었다. 무엇보다도 작은 산이나 동산도 없어 섬 전체가 밭으로 이루어진 비옥한 경작지를 갖고 있었다.

이런 섬에 언제부터 주민들의 이주와 정착이 이루어졌을까. 가파도가 처음 역사에 등장한 시실은 1750년(영조 26) 국영 목장인 별둔장(別屯場)을 설치하여 진상용 흑우(黑牛)의 방목장으로 이용되었다는 기록에 나온다. 그러나 1840년(헌종 6) 영국 선박 두 척이 내습하여 방목 중인 흑우를 약탈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목장이 폐지되고 남은 흑우는 현재 무릉리모동장(毛洞場)으로 옮겨져 사육되었다. 그 후 1842년(헌종 8)에 제주 목사 이원조가 흑우의 약탈을 막기 위해 주민들을 입도시켜 개간을 허가하면서 본격적으로 사람들이 살게 되었다고 한다.

초기 개척민들은 ‘말을 싣고 가는 포구’라고 해서 붙여진 ‘마제포’라는 상동의 ‘모시리 포구’를 중심으로 취락을 형성해 거주했다. 이 포구는 모슬포와 최단 거리에 있으며 당시 유일한 모슬포와의 교통 관문이었다. 그러나 1923년 하동 포구의 ‘황개’ 일대가 개발되자 이곳으로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하동이 번창해졌다. 황개 포구에 세워진 ‘가파도 개경 120주년 기념비’를 보면, 최초로 입도한 사람은 대정읍 모슬포 상모리·하모리에 거주하고 있던 경주 이씨·진주 강씨·제주 양씨·나주 나씨·김해 김씨 등 40여 명이다. 이들은 농번기 섬을 왕래하면서 10여 년 동안 농사를 짓다가 1865년(고종 2) 대정 지역의 혹심한 흉년으로 섬에 건너와 살았고, 이후 마을이 커졌다고 한다. 이처럼 가파도의 개척 역사는 약 170년에 지나지 않지만, 제주도 유일의 선돌[높이 183㎝, 폭 120㎝, 두께 45~55㎝] 유적과 조개더미, 토기·석기 등 선사 시대의 유물 산포지가 있어서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사람들이 거주하여 했음을 가늠할 수 있다.

가파도는 개발과 인파로 몸살을 앓는 여러 섬들과 달리, 비록 작은 섬이지만, 섬의 원형이 그대로 남아 역사적·문화적 자원이 풍부한 섬이다. 봄철의 청보리 물결과 더불어 해안의 돌담과 야생식물, 할망당·전설 등 중요한 자연적·문화적 요소들이 가파도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만들게 될 것이다.

[민족 교육의 산실 신유의숙(辛酉義塾)과 마을 사람들의 자부심]

마을을 빛낸 인물은 고향 마을에 대한 애착심과 향토 정신을 심어줌으로써 마을 사람들의 동질성을 강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가파도에는 김우석(金遇石)·김성숙(金成淑)·김한정(金漢貞)·김태능(金泰能)·김성문(金成文)·나승대(羅升大) 등 마을을 빛낸 인물들이 많다. 이들은 모두 가파도 사람들이 해낼 수 없는 일들을 선견지명과 용기를 갖고 행하여 마을 사람들의 생활에 크게 기여하거나 정신적 힘이 되었던 인물들이다. 마을 사람들은 그들을 자랑스러운 가파도민의 상징으로 내세우고 있다.

특히 김성숙은 교육 시설이 없던 이 섬에 1921년 신유의숙(辛酉義塾)을 창설하여 주민들을 개도하려고 노력하였고 섬의 문화 향상에 힘을 쏟은 인물이다. 신유의숙은 1949년 가파초등학교가 설립되기 이전 주민들의 초등 교육의 터전이었다.

1896년 가파도에서 출생한 김성숙은 1919년 경성제일고등학교 시절 3·1독립운동으로 투옥된 적이 있고, 그 후 고향에 돌아와 향토 발전을 위하여 매진하였다. 먼저 교육사업을 전개하여 모슬포 등지에서 문맹 퇴치 운동을 하였다. 모슬포에 대정보통학교 부설 학교를 세웠고 1921년 가파초등학교의 모체인 ‘신유의숙’이라는 신학문의 전당을 설립하여 인재 양성에 힘을 쏟았다. 그래서 가파도는 어느 지역보다도 일찍 선진 문화를 경험한 개화된 섬이었다.

가파도 사람들은 “교육에 있어서 어느 마을에 뒤지지 않는다”는 자부심을 갖고 학생이 얼마 안 되는 가파초등학교를 지키려고 부단히 노력을 해 왔다고 한다. 이런 마음을 상징하듯, 1981년 가파도 마을 사람들과 문하생은 ‘가파신유의숙 개교 60주년 기념 행사’를 거행하면서 김성숙의 향토애와 교육열을 추모하기 위해 동상 건립 계획을 추진하여 1982년 2월 동상 제막식을 행했다.

무엇보다도 교육의 선각자를 배출한 마을로서의 자부심을 갖고, 동상을 건립하기 위한 마을 주민들의 열의와 협력은 향토 위인을 재인식하는 과정 속에 가파도 주민의 정체성을 강화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동상 건립을 추진하기 위한 준비 과정에서 동상 건립의 취지문과 안내문을 신문에 게재하고, 각 기관에 공문서를 발송하여 가파도의 향토 위인의 업적을 널리 알림으로써 주민으로서의 긍지와 자부심을 재형성하고 가파도민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아직도 공동체 사회와 신앙이 살아 있는 섬]

가파도에는 공동체 신앙인 마을 포제를 비롯하여 상동 메부리당과 하동 항개당의 할망당제가 여전히 행해지고 있다. 어로 작업과 물질로 생계를 꾸려가는 가파도 마을 사람들은 한 치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바다라는 대자연 속에서의 작업이 항상 위험하고 불안이 따르기에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으로 마을의 공동체적 신앙에 의존했고 개인적으로도 의례를 행하며 삶을 영위해 왔다. 이러한 행위는 이 섬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꼭 필요한 문화적 전통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가 공동체적 의식을 갖고 지극정성으로 마을의 안전과 집안의 평안을 기원했다. 더욱이 집안의 어머니들은 “할망당에 다녀오면 바다에 나갈 때 마음이 편하고 뭍에서 사는 아이들이 덜 걱정된다.”라고 하듯이, 영원한 마음의 안식처인 할망당에서 항시 정성스레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 섬에서의 삶을 지탱해 왔다. 이처럼 자연의 질서에 순응하며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가파도 사람들의 소박한 정서가 생활 곳곳에 깃들어 있다.

본향당제는 가파도에서 행하고 있는 대표적인 무속 신앙이다. 정월 초에 본향당에서 당골 심방을 불러 당굿을 성대하게 행하고 있는 다른 지역의 마을들과는 달리 이러한 당굿은 행하지 않고, 주부들이 개인적으로 제물을 차리고 당을 찾아 비념 형태로 당제를 지내고 있다. 제의의 목적은 어로와 해녀의 안전과 풍요, 가족의 무병과 평안을 기원하는 데 있다.

가파리의 본향당은 모두 바닷가에 돌담으로 바람막이 울타리를 쌓아 놓았다. 울타리 안의 공간이 바로 신성한 공간으로 당신(堂神)이 주재하고 있다. 가파도에는 자연마을 단위로 각각 본향당이 있고 사람들의 이주와도 관련이 있다. 상동의 ‘메부리당’은 이주민들이 정착 과정에서 대정읍 상하모리의 ‘문수물당’에서 분리해 온 당이며, 하동의 ‘항개당’은 메부리당에서 나눠 온 당이다. 제일(祭日)은 일정하지 않으나 1월, 6월, 8월에 각 한 번씩 길일을 택하여 새벽에 각 가정의 주부들이 깨끗한 옷차림을 하고 각자 제물을 준비하여 당에 가서 제의를 행한다. 이외에도 제사나 뱃고사를 지낼 때, 그리고 가내에 불안한 일이 있을 때에 수차례 축원하러 당을 찾고 있다. 무엇보다도 당에 갈 때 부정이 타지 않도록 거리에서 사람들을 만나도 말을 걸거나 인사하지 않는 것을 서로에 대한 예의로 여긴다.

가파도 사람들은 부모대부터 상동할망당[메부리당]을 다닌 경우에는 하동에 살고 있더라도 먼저 상동할망당을 다녀온 후에 하동할망당[항개할망당]에 간다. 제물로는 메·떡·술·건어·돼지고기·과일 등을 다섯 조씩 준비하여 셋은 할망신에게, 하나는 용왕에게,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조상에게 올린다. 이외의 제물로서는 백지·물색천[황·주·청]·실·돈 등을 함께 올려서 향을 피우고 배례하고 나서 앉아서 기원 드리고 재차 배례하고 의례를 마친다.

한편 유교식 마을제로는 남성들에 의해 행해지는 포제(酺祭)가 있다. 포제는 마을 수호신인 이포지신(里酺之神)에게 풍농과 마을의 평안을 기원하며 지내는 마을의 공동 의례로서 전 주민이 참여하는 가장 큰 의례이다. 마을의 어른들은 “누구나 포제를 지낼 시기가 되면 마을에 불상사가 없기를 간절히 바라고, 특히 제관들은 함부로 행동을 하지 않고 항시 주의를 해야 하므로 제관을 맡는 것이 무척 어려운 일”이며, “마을의 안녕을 위해서는 반드시 포제를 행해야 하며, 포제가 치르고 나서야 한 해의 모든 일이 시작된다.”라고 하였다. 그렇듯 포제는 마을의 모든 일의 시작을 상징하는 제의이기도 하다.

마을 포제는 한 해 동안의 마을의 평안을 빌며 거행되는 음력 정월의 춘포제와 풍농을 기원하며 거행되는 음력 칠월의 농포제 등 두 가지가 있다. 가파도에서는 40여 년 전에 농포제는 없어지고 현재까지 춘포제만이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춘포제는 음력 정월의 정일(丁日)이나 해일(亥日)을 택하여 마을 동쪽에 있는 ‘말 잡은 목’이라는 곳에 제단을 마련하고 매년 거행되고 있다. 제사장에는 제단 집이 지어져 있고, 신성시되어 평소에는 사람들의 출입이 금지된다.

제의의 관리는 마을 남성들에 의해 이뤄지는데, 음력 섣달그믐이나 정초에 이장이 마을 총회인 향회를 소집한다. 향회에서 새해의 마을 운영에 관한 제반 사항을 비롯하여 제의에 소요될 예산의 규모, 제관의 선출 등 제의의 준비 및 계획에 관하여 토의한다. 제의에 소요되는 비용은 마을 공금에서 충당되고 있는데 1995년부터 읍에서 포제 지원금을 보조받고 있다.

포제는 우선 천신에게 드리는 천제를 드리고 나서 토신제와 테우리제를 행한다. 토신제는 공동묘지에서 앞으로 1년 동안 장례식이 있어도 따로 제를 지내지 않을 것을 고하면서 행하는 제의이다. 토신제가 끝난 후 이어서 테우리제를 행한다. 제의 목적은 과거에 농기구가 없어서 가축을 이용하여 농사를 지을 당시 가축의 번창을 기원하면서 가축으로 인한 농사의 피해가 없기를 기원하며 지내는 제의로서 현재도 행하고 있다. 제의가 끝난 다음날 제물로 준비했던 음식은 주민들과 나눠 먹으며 신에게 바쳐진 정성이 어지럽혀지지 않도록 전 주민이 행동을 조심하며 제의의 효험이 이루어지기를 기원한다.

[바다밭에서는 해녀의 강인한 삶의 소리, 숨비 소리가 울려 퍼진다]

가파도의 아침은 일기 예보를 듣는 것으로 시작된다. 바다로 둘러싸인 섬은 파도의 세기와 바람에 따라 그날의 물질 작업과 어로 작업이 가능한지를 판단하기 때문이다. 가파도 주변 해안은 암초가 많아 각종 어류와 해산물이 풍부한 황금 어장을 형성하고 있다.

가파도에는 약 130명의 여자들 중 70여 명의 잠녀들이 현재 활동하고 있을 만큼 많은 여자들이 세계적으로 특이한 어로 방식인 물질 작업에 종사하고 있다. 그들 중에는 물질 기능이 뛰어나고 어장 지식이 월등히 높은 상군 해녀들이 많다. 그래서 섬의 여성들은 물질 소득이 많아 생계 경제하에 자급자족적인 생활을 이끌어 나가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해 왔다. 섬의 여성들은 물질 작업 금지 기간에도 쉬지 않고 밭일을 하는 등 근면하고 강인한 생활을 하면서 진취적인 삶을 이끌었던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물질을 했는데 시집가면서 물질을 못했어. 근데 뭍에서 살다가 남편이 죽자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25여 년 전 고향 가파도로 들어와 물질하면서 자식들 공부시키고 장가보냈어. 자식들이 제주시 내에서 함께 살자고 했는데 하루라도 물에 들어가지 않으면 몸살이 나서 가파도를 떠나 살 수 없다.”라는 한 할머니의 이야기 속에는 집안의 살림을 이끌어가는 가파도 여성의 강인한 삶의 모습을 느낄 수 있다. 이런 마음을 간직한 잠녀들이 많아 바다밭에서는 숨비 소리가 끊임없이 울려 퍼지고 있다.

칠십이 넘은 지금도 물질을 하는 할머니가 25여 년 전 가파도에 들어와 물질을 하려니 규약이 엄격하여 일정한 기간이 지나고 나서 물질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아직도 마을 공동어장의 이용은 어촌계의 규약에 따라 엄격하게 적용된다. 이 규약은 서로 간의 약속이며 모든 결정은 회의에서 이뤄지고 있다. 가파도는 주요 자원을 공동으로 소유하여 주민들 사이에 그 이용권을 균등하게 배분함으로써 내부 집단의 통합을 강화하는 반면, 외부 집단에 대해서는 자원 이용의 개입을 규제하는 등 까다로운 관행이 오늘날까지 유지되고 있다.

외부 지역으로 혼인하는 여성의 경우, 혼인하는 날로부터 주민으로서의 자격뿐만 아니라 물질 작업과 관련된 모든 자원 이용권이 상실된다. 반면 가파도의 남성과 결혼하여 섬으로 전입한 여성에게는 그날로부터 주민으로서의 자원을 이용할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된다. 그러나 할머니처럼 비록 가파도의 여성일지라도 외부 지역으로 갔다가 다시 전입할 경우에는 일정 기간, 약 6개월에서 1년 사이에는 조업권을 얻을 수 없다. 부득이 조업권을 얻기 위해서는 벌과금으로 50만 원을 지불하고 마을 총회에서 동의를 얻어야 한다. 지난 2006년 2월에 열린 정기총회에서는 외부 지역에서 오는 사람들의 물질 작업에 대한 경계를 더욱 강화시켰다. 실제로 3년 거주와 500만 원을 지불해야 한다. 이는 외지인들이 물질 작업하러 들어오는 것을 경계하여 고갈되어 가는 바다의 자원 보호하고 자신들의 조업권을 확보하려는 차원에서 이뤄지고 있다.

4월 해안가에는 삼삼오오 잠녀들이 채취한 미역을 분산하게 정리하며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다. 가파도의 미역은 특산물으로 판매되는 좋은 수익원으로 잠녀들의 작업을 한층 즐겁게 만들고 있다.

[은둔의 섬에서 미래적 가치를 발견하다]

자연이 살아 숨 쉬는 섬 속의 섬 가파도는 최근 청보리 축제와 올레 코스 개장으로 많은 관광객들이 붐비고 있다. 그동안 고즈넉이 조용했던 은둔의 섬이 청보리 물결이 출렁거리면서 북적대는 외지인으로 활기찬 섬으로 변모하고 있다. 더욱이 요즘 제주도 올레길이 슬로우 생태 관광과 접목되어 전국적으로 각광을 받으면서 가파도 역시 2010년 개장된 올레 코스로 1년 내내 섬을 찾는 관광객들로 매우 붐빌 것으로 보인다.

한편 최근 제주도에는 농어촌 중심으로 마을 만들기 사업이 한창 진행되고 있다. 가파도의 청보리 축제는 도서 지역의 경제 활성화를 위한 마을 만들기 사업의 일환으로 추진되었다. 가파도가 사회적·경제적 발전을 거듭하여 마을 사람들이 더 살기 좋은 마을 환경 속에서 지낸다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기쁜 일이다. 가파도는 개발과 인파로 몸살을 앓는 제주도 주변 여러 섬들과는 다르게 개발이 늦어져 섬 문화의 원형이 그대로 남아 있는 덕택에 새로운 가치가 되어 명품 섬이 되고 있다. 섬 자체가 아름다운 풍광을 빚어내는 고유한 자연 경관과 풍부한 해산물과 해초류가 풍부한 바다의 생태적 자원과 전승되어 온 해녀 문화와 신앙 등 역사적·문화적 자원은 앞으로 가파도의 미래를 밝혀 줄 커다란 자산으로 섬의 진정한 미래적 가치를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이와 더불어 가파도의 미래적 가치는 한마디로 탄소 없는 녹색섬을 만드는 데 있다. 그 일환으로 제주특별자치도가 2011년 11월 1일 한국전력공사와 한국남부발전과 ‘가파도 탄소 없는 섬(Carbon Free Island) 구축 사업’ 업무 협약을 체결하였다. 이로써 가파도는 화석 에너지를 사용해 전력을 생산하는 디젤 발전 대신 친환경 에너지인 태양광과 풍력 발전 등 신재생 에너지로 100% 대체되어 세계 최초 탄소 없는 섬이 구현될 것이다. 섬에 있는 전신주와 통신주는 2012년 3월까지 철거돼 지중화되고 지능형 전력망이 구축되었다.

가파리 이장은 “가파도 전신주 지중화 사업이 드디어 첫 삽을 떴다.”라며 “지중화 사업은 주민 숙원 사업이었던 만큼 이번 사업을 시작으로 가파도를 녹색 섬으로 만드는 데 한 발짝 더 다가섰다.”고 환영했다. 또한 탄소를 배출하는 모든 차량이 전기 자동차로 교체되고 농기계와 어선도 연차적으로 전기 동력으로 대체될 것이다. 이와 함께 가파도 전 세대에 스마트 미터기, 홈 지능화 기기 등 스마트 홈 시스템을 갖출 것이고 가파초등학교를 스마트그리드 스쿨 시범 모델로 운영할 것이다.

이러한 사업은 2012년 8월 말까지 마무리하여 2012년 9월 6~15일에 열리는 세계자연보전총회 참가자들의 녹색체험 코스로 운영할 것이다. 이어 2014년까지 가파도 전역을 농약과 비료를 사용하지 않는 친환경 농업 지구로 만들 계획을 가지고 있다.

가파도 주민들은 이 사업을 통해 앞으로 최첨단 녹색 생활 환경과 탄소 제로 시범 관광지 구축 및 운영으로 인구 유입을 기대할 뿐만 아니라, 녹색 체험과 볼거리 등 새로운 상품 개발하여 관광객 증대로 관광 수익 및 일자리가 창출될 것을 기대하고 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