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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600013
한자 濟州-軍事戰略-要衝地-地域
분야 역사/근현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동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35년 - 알뜨르비행장 1차 공사 완성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38년 - 알뜨르비행장 2차 공사 완성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44년 10월 - 알뜨르비행장 3차 공사 시작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02년 5월 31일 - 제주도의 모슬포 알뜨르비행장 비행기 격납고를 근대 문화유산으로 지정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06년 12월 4일 - 알뜨르비행장 지하벙커를 비롯한 12군데의 일본군 전쟁 유적을 근대 문화유산 지정
유적 알뜨르비행장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 일대지도보기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대정읍 상모리 일대에 일본이 중일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만든 군사 기지

[개설]

알뜨르비행장제주특별자치도 대정읍 상모리 일대에 일본이 중일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만든 군사 기지이다. 1926년 일본이 중국 공격 기지로 활용하기 위하여 처음 계획하여, 1차 공사[1931~1935년]로 활주로 1,400×70m에 규모 약 18만평으로 완성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의 발발로 군사적인 중요성은 더욱 부각되었고, 결국 중국 난징 및 상해를 공격하기 위해 나가사키현의 오무라[大村] 항공 기지를 알뜨르비행장으로 옮기게 되었다. 오무라 해군 항공대 등의 주둔으로 알뜨르비행장의 규모는 2차 공사[1937~1938년]를 통해 40만 평으로 확장되었다.

그러나 태평양 전쟁 말기 미군 상륙 가능성이 가장 많았던 알뜨르비행장 지역은 해안 전지 거점 지역으로 진지화하였으며, 1944년 10월 3차 공사로 비행장 규모는 66만 7천 평으로 확대하였다. 이 시기 모슬봉에 레이더 기지를 설치하는 한편, 미군 공격으로부터 사람과 물자를 보호하기 위한 항공기지 지하 격납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전투사령실·격납고·프로펠러 조정장·발동기 정비장·계기 시험장·연료고·통신실·섯알오름 탄약고 등의 지하 시설을 마련하였다. 나아가 미군의 상륙에 대비한 사령부 등 군사 주요 시설의 지하수용을 목적으로 하는 갱도 진지를 구축하였다.

[태평양 전쟁의 시작]

태평양 전쟁은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하와이 진주만 기습에서 시작하여 연합국의 공격으로 일본이 패망한 1945년 8월 15일까지 약 3년 9개월간 일본과 연합국 사이에 일어난 전쟁이다. 1942년 초에 일본은 순식간에 필리핀까지 점령했고, 동남아시아와 미얀마의 대부분 지역, 네덜란드령 동인도와 태평양의 많은 섬들을 점령했다.

그러나 미드웨이 해전[1942.6. 3~6]으로 태평양 전쟁은 일대 전환점을 맞이하여 미군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1942년 8월 미군은 과달카날 섬(Guadalcanal)에 상륙하였고, 1943년 11월에는 길버트 제도(Gilbert Islands)에서 일본군을 전멸시켰다. 1944년 2월 미군 공격으로 일본군은 트랙 섬에서의 거점 기능을 상실하였으며, 7월에는 마리아나 제도와 사이판의 일본군 수비대가 사실상 마비되어, 결국 10월에 미군은 필리핀 레이테 섬 상륙에 성공하였다.

1945년 계속 북상하던 미군은 2월 19일 이오우지마[硫黃島]에 상륙을 단행하였고, 3월 10일에는 동경 대공습, 3월 14일에는 오사카 대공습을 실시하였다. 4월 1일에 미군은 오키나와 본토에 상륙하여 오키나와 전투가 실시되었는데, 6월 23일 일본군은 오키나와에서 더 이상 미군에 대한 조직적 저항이 불가능하였다. 계속된 미군의 공격은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폭 투하, 8월 9일 나가사키에 원폭 투하로 이어졌고, 이에 사실상 일본은 미군에 대한 저항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8월 15일 전쟁 종결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이어 9월 2일 미전함 미주리호에서 항복 문서를 공식적으로 조인하였다.

[결7호 작전과 제주]

미군의 북상으로 일본은 미군과의 본토 결전을 구상하였다. 1945년 2월 9일 일본방위총사령관은 미군과의 본토 결전에 대비하여 7개 방면의 ‘결호 작전’[미군 공격으로부터 일본 본토를 방어하기 위한 작전 암호명]을 마련하였다. 결1호 작전은 홋가이도[北海道], 지시마[天島] 방면, 결2호 작전은 도호쿠[東北] 방면, 결3호 작전은 간토[關東] 방면, 결4호 작전은 도카이[東海] 방면, 결5호 작전은 츄부[中部] 방면, 결6호 작전은 규슈[九州] 방면, 결7호 작전은 조선 제주도 방면이었다. 결1호에서 결6호까지의 작전 계획이 일본 영토를 중심으로 한 것이었다면, 결7호 작전은 유일하게 일본 본토가 아닌 조선 제주도였다.

태평양 전쟁 말기 일본군이 미군에 밀리기 시작하면서 1944년 봄부터 미 해군 잠수함이 제주도 근해에 출몰하는 등 상황이 심각해졌다. 일제는 1944년 5월 제주도비행장[현 제주국제공항]을 완성하여 미군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그러나 1944년까지 제주도 수비 병력은 총 200여 명에 불과했다. 1944년 10월 미군에 의해 필리핀이 점령당하자, 일제는 제주도의 방위를 매우 심각한 문제로 여겼다. 1944년 12월 일본방위총사령부는 미군의 제주도 공략을 상정, 제주도를 전략상 요지라고 인식하였다. 일본군 방위총사령부는 제주도를 직접 시찰한 후 1944년 12월 말에 제주도 연안을 중심으로 전쟁 준비 계획을 수립하였다.

그 결과 1944년 11월에 제408특설경비공병대가 제주도에 배치되었고, 그 임무는 비행장 복구 축성에 협력하는 것이었다. 병력은 약 930명으로, 3분의 1이 일본인, 3분의 1이 제주도의 조선인, 3분의 1이 조선 ‘육지’의 조선인이었다.

제주도에서 축성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945년 2월 중순이며, 상순에 공사 지도 기간 요원 장교 80명이 모집되어 지하 갱도 진지와 대포를 감추기 위한 엄체호(掩體壕) 굴삭 교육이 10일간 행해졌다. 또한 방위 총사령부에서 제11공사대가 파견되고, 제408특설경비공병대도 모슬포 알뜨르비행장 업무에 할당되었다.

1945년 3월 20일, ‘결호 작전 준비 요강’의 요지가 비밀리에 고시되었다. 제주도에 제58군, 제96사단, 제111사단, 독립혼성 108여단, 독립속사포 제32대대, 제1특설 근무대를 배치하여 독자적인 병력을 확보한다는 것이었다. 1945년 4월 15일 제주도 방비 강화를 위해 제58군사령부가 신설 편성되었으며, 58군사령부는 제주도의 육군 부대 지휘권을 총괄하였다. 3월 말에 약 3,000명이었던 병력은 2개월만인 5월말에 한꺼번에 10배 이상인 약 36,000명의 병력으로 급증하였다. 나아가 일본 본토의 부대를 비롯하여 만주의 관동군 등을 포함하여 종전 직전까지 4개월 사이에 무려 7만 5천여 명에 달하는 병력이 제주도에 집결하였다. 제주도를 미군의 침공으로부터 사수한다는 방침을 정한 일본군 7만 5천여 군대는 제주도 전역을 요새화하기 시작하였다.

[알뜨르비행장의 설치와 확장]

일제는 1926년에 군사적 목적으로 산지항 축항 공사를 실시하면서 제주도를 주목하기 시작하였다. 그 과정에서 제주도 서남부에 위치하고 있는 알뜨르에 해군 항공기지 및 비행장 건립 계획을 마련하여 나갔다. ‘뜨르’는 원래 제주도 방언으로 ‘넓은 평야’를 의미하며, ‘알’은 ‘아래’라는 의미로 ‘위에’를 의미하는 ‘웃’에 대응하는 개념이다. 따라서 ‘알뜨르’는 ‘웃뜨르’에 대응하는 말로, 모슬봉 밑에 위치한 데서 유래한 것이다.

알뜨르비행장 제1차 공사는 1931년 3월부터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5년에 걸친 공사의 결과, 비행장 활주로 1,400×70m, 약 60만㎡의 비행장이 완성되었다. 지역 주민들은 지명을 따서 알뜨르비행장[혹은 모슬포 비행장]이라 명명하였다.

1937년 8월에 전면전으로 전개된 중일전쟁으로 제주도는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으로 인식되었다. 동년 8월 15일 일본은 중국 난징[南京]에 대한 해양 폭격을 개시하였는데, 당시 항공기는 나가사키현의 오무라 항공 기지에서 이륙하여 난징을 공격한 후에 제주도 항공 기지인 알뜨르비행장으로 귀착하도록 하였다. ‘세계 항공전 사상 미증유의 대공습’으로 중국 난징 공습이 성공하면서 이후 난징과 상하이 등지로의 해양 폭격 거점은 제주도 항공 기지로 이행되었다. 제주도 항공 기지에는 오무라 해군항공부대가 주둔하였는데, 그 부대는 모슬봉 앞 지금의 해군 9506부대의 자리에 위치하였다.

알뜨르비행장 제2차 공사는 제주도 항공 기지의 중요성이 부상하면서 약40만 평으로 확대하는 확장 공사가 1937년과 1938년에 이루어졌다. 그러나 1937년 11월에 일본군이 상하이 부근을 점령하여 그 곳에 비행장을 마련하면서 오무라 해군항공대의 본거지는 상해로 이동하였다. 대신에 제주도 항공 기지는 오무라 해군항공대의 비행 연습 항공대로 활용하여 나갔다.

알뜨르비행장 제3차 공사는 1944년 10월 상순부터이며, 약 220만㎡로 확장할 예정이었다. 이 건설에 임한 것은 진해경비부의 시설부 제201부대였으며, 그 규모는 600명에서 1,000명 정도였다. 건설 부대에는 해군의 병사나 민간 토목회사의 노동자 등이 포함되는데, 그 중에는 강제 연행자도 많았다. 알뜨르비행장 건설에도 하루 4,500명의 강제 노동자가 동원되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제주도 항공기지 제3차 확충공사는 연료고, 거주시설, 창고, 치료시설, 프로펠러 조정장, 발동기 정비장, 계기시험장, 목공금속공장 등을 넣기 위한 지하 진지를 마련하였다. 이외에도 유개엄체 20개, 통신 수신소, 발신소, 비행대 지휘소, 자력 발전소 건설도 진행하였다.

[알뜨르비행장 전쟁 유적 개황]

일본군 전쟁 유적지는 대정읍 상모리 알뜨르비행장을 중심으로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으며, 크게 비행장 관련 시설과 오름 지하호, 해안 어뢰정 갱도 진지로 구분할 수 있다. 그 현황은 다음 [표]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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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유적의 보존과 활용]

2002년 5월 31일 문화재청은 제주도의 모슬포 알뜨르 비행장 비행기 격납고를 근대 문화유산으로 지정한 바 있다. 이어 2006년 12월 4일에는 알뜨르비행장 지하벙커를 비롯한 12군데의 일본군 전쟁 유적을 다시 근대 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알뜨르비행장 일대는 일본의 전쟁 유적을 가장 효과적으로 보여 줄 수 있는 곳으로 비행장·갱도진지·고사포 진지·특공기지·탄약고 등 군사 시설의 용도에 따라 차별화해서 특화시킬 수 있는 활용 방안이 총체적으로 마련할 필요성이 있다.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세대들이 전쟁 체험 장소로 활용하는 방안도 하나의 활용 사례가 될 것이다. 즉, 지하호에서의 음성, 가상 비행시설, 폭탄 투하 장면, 각종 총기류 등 무기 제작 체험, 지하호 모형 쌓기 및 굴착 체험 등 다양한 전쟁의 가상 체험을 통해 전쟁의 참혹상을 간접적인 체험을 통해서라도 평화의 소중함을 교육할 필요성이 있다. 나아가 일본군 전쟁 유적을 대상으로 한 문화 콘텐츠화로의 활용 방안이 모색되어야 한다. 특히, 게임 소재, 드라마 및 영화 촬영 장소, 영상 콘텐츠 제작, 전쟁 유적을 소재로 한 평화 백일장 등 반평화적인 만행을 고발하는 소재로 적극 활용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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