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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면 청년회 씨름대회 사건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600474
한자 旌義面靑年會-大會事件
이칭/별칭 성산청년 항일의거,성산포 소요 및 상해 치사 사건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임승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27년 5월 16일연표보기 - 정의면 청년회 씨름대회 사건 발생
발생|시작 장소 고성마을 씨름장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성산읍 고성리 352 지도보기
성격 사건
관련 인물/단체 고은삼, 송세훈

[정의]

1927년 5월 16일 정의면 중앙청년회 주최로 열린 대운동회에서 정의면 청년들과 일본인 선원 간에 싸움이 벌어진 사건.

[역사적 배경]

제주 성산면 성산리 성산포 근처는 우도와 가까이 위치하고 있어 황금어장을 이룰 만큼 어족 자원이 풍부하였다. 이에 옛날부터 왜구의 노략질이 심했을 뿐만 아니라 일제 시기에는 일본 어부들이 제주 근해에 상륙하여 불법 어업을 감행하고 어장 침탈을 행하였기 때문에 당시 성산포 일대의 청년들과도 자주 싸움이 일어났다.

[경과]

1927년 5월 27일 정의면 중앙청년회 주최로 정의면 고성마을[지금의 성산읍 고성리] 씨름장[속칭 소금막]에서 씨름대회가 개최되었다. 그런데 씨름대회가 한창 열리던 도중, 당시 고등어 잡이 원양 어업을 하다 풍랑을 피해 성산포로 대피하였던 박몽주·윤정도·권해룡·하정구 등의 다른 도 출신 선원과 200여 명의 일본인이 씨름구경을 하다가 선원 중 일부가 주최측의 허가를 받아 씨름 선수로 참가하였다. 그러나 씨름경기에 참가한 선원들은 경기 도중 제주민에 대해 차별적인 언행과 강압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원할한 경기 진행을 방해하기 시작했다.

그러한 와중에 다른 도 출신의 박몽주가 정의면 청년과의 씨름경기에서 패하자 심판에게 이의를 제기하며 재시합을 무리하게 요구하였다. 이에 심판인 박규언[정의면 청년]이 대회 규칙상 불가하다고 거절하자, 이에 격분한 타도 출신의 윤정도가 박규언의 빰을 때렸고 이에 격분한 500여 명의 정의면 청년들과 200여 명의 일본 어부[다른 도 출신 포함] 사이에 집단 싸움이 벌어졌다.

이처럼 1927년 성산포의 청년들에 의해서 일본인 어부들을 폭살(爆殺)시킨 청년운동의 지도자가 바로 당시 중앙청년회 회장이었던 고은삼이었다. 고은삼과 함께 당시 성산리청년회장이었던 송세훈이 주축이 되어, 수세에 몰린 일본인들이 도망쳐 숨기 시작하자 이를 알고는 정의면 청년들을 규합하여 방두포(防頭浦)[지금의 서귀포시 성산읍 고성리 섭지코지 근처]까지 추격하였고 일본 선원과 어부들에게 더욱 폭행을 가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일본 선원 가운데 2명이 상해를 당하자 일제 경찰이 출동하여 이를 진압하고 52명의 정의면 청년들이 체포되어 제주경찰서로 압송되면서 사건이 일단락되었다.

[결과]

일제 경찰은 이 사건을 ‘성산포 소요 및 상해 치사 사건’이라 칭하고 전남 경찰부의 병력을 출동시켰다. 또한 임시 검사국을 설치하는 한편 목포 경찰서의 증원군이 제주도에 들어와 1927년 5월 23일 혐의자 또는 선동자라 하여 92명을 제주경찰서 유치장과 유도장에 가두었다. 조사 후에는 이들 중 52명을 같은 해 5월 25일 목포로 옮겨 조사하였고, 체포된 청년들은 대부분 광주지방법원 재판에서 1년 이상의 징역형을 받았으나, 당시 싸움을 유발한 일본인 선원들에 대해서는 어떠한 처벌도 내려지지 않았다. 결국 1927년 12월 16일 광주지방법원과 1928년 12월 15일 대구복심법원 상고 결과 오조리 출신의 고승운, 성산리 출신의 한봉희, 온평리 출신의 박군평, 종달리 출신의 김영화 등이 소요상해 및 상해 치사죄로 1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러나 당시 이 사건의 배후 주도자였던 고은삼송세훈은 상고심을 통해 증거불충분으로 무죄 판결을 받았는데, 이는 일제가 이 사건을 항일의거가 아닌 단순 폭행사건으로 처리했기 때문이다.

[의의와 평가]

이 사건은 당시 일본 어민과 어상들이 성산포 근해에서 불법 어업을 자행하던 시대상황과 1910년 8월 한일합방 이후 더욱 극심해진 민족적 차별과 맞물려, 청년들의 항일 정신이 분출되어 나타난 집단 항일의거였다. 이러한 청년들이 중심이 된 항일 정신은 이후 우도와 구좌 지역으로도 확산되어 1932년 해녀항일운동의 도화선이 되었고, 이는 1932년 1월 제주해녀항쟁과 같은 해 5월 추자어민 투쟁으로 이어지는 결과를 낳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 일제가 이 사건을 단순한 폭력 사건으로 규정하였으며, 또한 이후에도 항일운동으로서 그 가치를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였다. 따라서 당시 옥고를 치렀던 사람들에 대해서도 국가 차원에서의 정당한 보상이 내려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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