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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삼읍군제』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600507
한자 濟州三邑軍制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기록 유산
유형 문헌/전적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송문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소장처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 서울시특별시 관악구 관악로 1103
성격 서적|고서
표제 『제주병제봉대총록(濟州兵制烽臺摠錄)』

[정의]

1880년대 제주의 군제(軍制)와 봉수(烽燧)·연대(烟臺)를 기록한 문헌.

[개설]

『제주삼읍군제(濟州三邑軍制)』는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제주병제봉대총록(濟州兵制烽臺摠錄)』[규 4485)] 수록되어 있는데 1880년대 서귀포 지역의 군제(軍制)와 봉수(烽燧)·연대(烟臺)의 상황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서지적 상황]

편자·간행지 미상의 필사본으로, 1책(冊) 18장(張)으로 되어 있으며, 크기는 30.8×19.5cm 이다. 표제는 『제주병제봉대총록(濟州兵制烽臺摠錄)』이다. 본 글의 저본(底本)은 서울대 규장각본이다.

[구성/내용]

구성 순서는 제주의 속오군(束伍軍)·아병(牙兵)·마대(馬隊)의 군액(軍額)을 기록한 「제주삼읍군제(濟州三邑軍制)」, 「제주목소속잡색병총(濟州牧所屬雜色兵摠)」, 「대정현소속잡색병총(大靜縣所屬雜色兵摠)」, 「정의현소속잡색병총(旌義縣所屬雜色兵摠)」, 「제주삼읍봉수연대 및 장졸총록(濟州三邑烽燧烟臺及將卒摠錄)」으로 되어 있다.

당시 제주 3읍의 군액(軍額)은 제색군관(諸色軍官) 499명과 군병(軍兵) 1만 3372명으로, 총 1만 3771명에 달하고 있었다. 여기에는 속오군와 아병·마병 이외에 제주 3읍의 읍성(邑城)과 9진(鎭)의 현감(縣監) 수솔군(隨率軍)·조방장(助防將)·성장(城將)·치총(雉摠)·성정군(城丁軍)·유직군(留直軍) 그리고 63처(處)에 달하는 봉수(烽燧)와 연대(烟臺)의 별장(別將)·봉군(烽軍)·직군(直軍)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수군(水軍)과 산성군(山城軍), 이노대(吏奴隊)는 별도로 두지 않았다.

「대정현소속잡색병총」에는 읍성의 현감 수솔군 115명, 성장 2명, 치총 4명, 성정군 380명과 모슬진(摹瑟鎭)의 조방장 1명, 치총 4명, 성정군 177명 그리고 차귀진(遮歸鎭)의 군액이 기록되어 있다.

「정의현소속잡색병총」에는 읍성의 현감 수솔군 133명, 성장 2명, 치총 4명, 성정군 870명, 유직군 155명이 기록되어 있다. 이외에 수산진(水山鎭)의 조방장 1명, 치총 □명, 성정군 168명, 유직군 8명과 서귀진(西歸鎭)의 조방장 1명, 치총 1명, 성정군 132명, 유직군 9명이 기록되어 있다.

「제주삼읍봉수연대 및 장졸총록」은 제주목을 비롯한 대정현의 봉수 5곳과 연대 9곳, 정의현의 봉수 10곳과 연대 11곳의 위치와 근무 장졸에 대한 기록이다.

대정현의 봉수는 대정현 소속의 구산(龜山)[구산봉호산(蠔山)[월라봉]·저별(貯別)[송악산]과 모슬진 소속의 모슬(摹瑟)[모슬봉], 차귀진 소속의 당산(堂山)[당산봉]이다. 이 가운데 서귀포 지역에 해당하는 봉수는 대정현과 모슬진 소속이다. 대정현 봉수에는 각각 별장 6명과 봉군 12명이 근무하였다.

정의현의 봉수는 수산진(水山鎭) 소속의 지미(指尾)[지미봉]·성산(城山)[성산일출봉], 수산(水山)[수산봉]과 정의현 소속의 독자(獨子)[독자봉남산(南山)[남산봉달산(達山)[달산봉토산(兎山)[토산오름], 그리고 서귀진 소속의 자배(資盃)[자배봉]·예촌(狐村)[예촌봉]·삼매양(三每陽)[삼매봉]이다. 정의현 봉수에는 각각 별장 6명과 봉군 12명이 근무하였다.

대정현의 연대는 대정현 소속으로 변수(邊水)[서귀포시 강정동]·마희천(亇希川)[서귀포시 강정동대포(大浦)[서귀포시 대포동]·별노천(別老川)[서귀포시 색달동당포(唐浦)[서귀포시 하예동산방(山房)[안덕면 사계리서림(西林)[대정읍 일과리]과, 모슬진 소속인 무수(茂首)[대정읍 하모리]에 있었다. 대정현의 연대에는 각각 별장 6명과 직군 12명이 근무하였다.

정의현의 연대는 수산진 소속의 종달(終達)·오조포(吾召浦)[성산읍 오조리협자(俠子)[성산읍 고성리]와 정의현 소속의 말등포(末等浦)[성산읍 온평리천미(川尾)[성산읍 신천리소마로(所亇路)[표선면 표선리]·벌포(伐浦)[남원읍 태흥 2리], 그리고 서귀진 소속의 금로포(金路浦)[남원읍 남원리]·우미(又尾)[남원읍 위미리]·보목(甫木)[서귀포시 보목동연동(淵洞)[서귀포시 서호동]이다. 정의현의 연대에는 각각 별장 6명과 직군 12명이 근무하였다.

당시 제주도의 봉수와 연대의 운영을 『호남봉대장졸총록(湖南烽臺將卒摠錄)』과 비교해 보면, 이를 담당했던 군인들의 역(役)이 매우 힘들었음을 알 수 있다. 즉 호남의 경우 1개월 씩 번갈아 근무를 한 반면 제주의 경우는 5일 단위로 윤직을 했다. 또 호남의 경우 봉수와 연대가 43곳 가운데 3곳이 서로 상응하는 반면, 제주도의 경우, 봉수는 봉수와 연대는 연대와 상응하는 체계를 이루고 있다.

[의의와 평가]

『제주삼읍군제』는 19세기 중후반 서귀포 지역의 군제와 봉수와 연대의 실태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아울러 제주 관련 읍지류와 『탐라영사례(耽羅營事例)』 등과 마찬가지로 서귀포 지역의 군제변천의 추이를 알 수 있는 귀중한 문헌적 자료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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