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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600695
한자 -戰鬪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법환동
시대 고려/고려
집필자 김일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374년(공민왕 23)연표보기 - 최영(崔瑩)장군과 제주 몽골족의 목호 세력(牧胡勢力) 간에 범섬 전투 발생
발생|시작 장소 범섬 전투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법환동 범섬 일대지도보기
종결 장소 범섬 전투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법환동 범섬 일대
성격 전적지

[정의]

1374년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법환동 범섬 일대에서 최영 장군과 목호 세력(牧胡勢力)이 제주 관할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벌인 전투.

[개설]

범섬 전투는 1374년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법환동 소재 법환 포구 앞바다에 자리잡은 범섬 일대에서 최영(崔瑩) 장군과 제주 몽골족의 목호 세력(牧胡勢力)이 제주 관할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벌인 최후의 결전이다.

당시 1374년(공민왕 23) 고려와 제주 몽골족의 목호 세력이 총력전을 벌였다. 이는 양자가 벌인 최후의 결전이었고, 실질적 종착지가 서귀포시 법환동 소재 법환 포구 앞바다에 자리잡은 범섬이었다.

[역사적 배경]

제주는 1273년(원종 14)에 제주 삼별초가 몰락함으로써 몽골의 직할령으로 편입되었다. 이로부터 제주와 몽골의 교류가 이루어졌으며, 제주의 말 사육 규모가 크게 확대되었다. 이후 말은 고려와 새로 국교를 맺은, 중국의 새 주인으로 등장한 명나라에도 바쳐졌다. 1374년(공민왕 23)에도 명은 제주에서 좋은 말 2천 필을 뽑아 보낼 것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이에 고려 관리가 제주에 가 말을 취하려 하자, 몽골의 탐라 국립 목장을 관할하던 몽골족 목호는 자신의 황제 쿠빌라이가 풀어놓아 기른 말을 명에게 바칠 수 없다 하며, 단지 3백 필만 내주었다. 그러나 명이 2천 필 채울 줄 것을 강력히 요구함으로 공민왕도 어쩔 수 없이 제주 정벌을 결정한 다음, 제주 출정군을 편성했다.

[경과]

제주 출정군의 총사령관은 최영이고, 출정군은 정예군 2만 5605명과 전함 314척으로 구성되었다. 이는 국경 지대까지 더해 동원했던 요동정벌군 3만 8830명과도 견줄 전력이며, 당시 제주 인구와도 맞먹었을 병력이었다. 출정군 외에도 예비 부대가 경기·충청·전라도 지역에 따로 주둔했다. 그럼에도, 출정군은 제주 서쪽 명월포에 도착해 벌어진 목호군과의 첫 전투에서는 졌다.

한편, 목호도 출정군에 맞설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목호 세력의 수뇌부는 석질리필사(石迭里必思)·초고독불화(肖古禿不花)·관음보(觀音普) 등이었다. 이들은 동·서아막(東·西阿幕)의 탐라 목장 중 서아막을 관할했던 목호이다. 이들 목호 수뇌부는 기병 3천여 명과 수많은 보병을 거느리고 명월포에 포진했다. 목호군에는 당시 ‘部落(부락)’을 이루어 살았던 몽골족, 이들과 제주 여성 사이에 태어난 반(半) 몽골족화의 제주민, 그리고 고려 관리의 잦은 수탈에 반감을 품었을 제주 사람도 가세했을 것이다. 목호군은 명월포에 처음 상륙한 출정군을 모두 죽여 기세를 올렸으나, 재차 벌어진 명월포 전투에서는 고려군에 패하였다. 이후 양자의 전투는 제주의 서쪽 명월촌으로부터 계속 목호군이 서남부 쪽으로 밀리면서 한 달여간 주야로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전투에서 밀린 목호군 수뇌부는 서귀포시 법환동 소재 법환 포구 앞바다 범섬으로 피했다.

최영도 목호 세력을 쫓아와 법환 포구 속칭 ‘막숙’이라는 곳에 주둔하고, 이어 배 40척을 동원해 속칭 ‘배연[배염]줄이’라는 곳을 통해 직접 범섬을 압박해 들어갔다. 이에 석질리필사는 처자식 등과 함께 항복하고, 초고독불화와 관음보는 벼랑에서 몸을 던져 자살하기에 이르렀다. 범섬 전투 이후에도 동아막의 목호 등이 수백 명을 거느리고 성에서 계속 저항했다. 이에 최영이 장수들을 거느려 성을 쳐부수고, 도망가는 무리를 샅샅이 찾아내 전부 죽였다.

[결과]

최영이 제주에 와 한 달여간 전투를 치렀던 목호 정벌은 “우리 동족이 아닌 것이 섞여 갑인년(1374)의 변을 불러들였다. 칼과 방패가 바다를 뒤덮고 간과 뇌는 땅을 가렸으니 말하면 목이 메인다”고 묘사될 정도로 고려와 목호 세력의 총력전이었다. 이로써 제주의 몽골족 목호 세력은 영향력과 힘을 상실하게 되었고, 원의 직할령이 된 이후 고려에 환속되더라도 실질적으로는 양국에 이중 귀속된 상태였던 제주는 제주민의 커다란 희생을 안은 채 고려에 재 귀속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또한 최영 장군이 탐라 목호 세력을 정벌하러 가 개경에 없을 때, 개혁 정치를 단행해 나라를 바로 잡아보려는 공민왕이 시해(弑害)되었다. 그리고 우왕은 자신이 10세가 되는 1374년(공민왕 23)에 최영이 제주 정벌에 나아가 개경에 없었기 때문에 선대 부왕 공민왕이 시해되었다고 확신했다. 이는 우왕이 24세의 성년에 이르러서도 깊이 각인되어 있었다. 그래서 요동(遼東)[만주 지역]정벌을 재촉하기 위해 최영 장군이 서경(西京)[평양]으로 나아가자 줄곧 따라 다녔고, 개경으로 돌아가라는 최영의 간곡한 건의도 거절한 채 같이 서경에 남았다. 즉, 우왕은 부왕에게 일어났던 일이 자기에게도 되풀이될까 두려워한 나머지, 곁에 최영을 두어 자신의 신변 안전을 도모하려는 의도에서 요동 정벌을 위해 전장 터로 가려는 최영의 발길을 막았던 것이다. 이로써 이성계가 조선 왕조 건국의 길로 나아가는 위화도 회군의 기회를 잡는 일이 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의의와 평가]

최영이 제주에 와 몽골족 목호 세력과 전투를 벌였던 범섬 전투는 고려가 자주성을 회복하는 정책의 일환으로 몽골족에게 빼앗겼던 영토를 되찾기 위해 이루어졌으나, 제주 사람들은 커다란 희생을 치르게 되었음과 아울러, 그 동안 몽골족과 더불어 살았던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계기로도 작용했다고 하겠다. 또한 결과적으로는 이성계가 조선 건국으로 나아가는 길을 닦는 기회를 잡을 수 있는 상황도 만들어 준 셈이 되었다. 현재 범섬 일대에는 최영장군 전적 터가 남아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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