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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600760
한자 川西洞
이칭/별칭 냇서왓,냇새왓슬
분야 역사/근현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색달동 산50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동만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48년 11월 - 4.3 사건으로 천서동 마을 소개됨
현 소재지 천서동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색달동 산 50번지 일대지도보기
성격 4.3유적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색달동에 있는 제주4.3사건 당시 소개령으로 폐허가 된 마을.

[개설]

천서동(川西洞)은 내[川] 서쪽에 있다 하여 일명 ‘냇서왓’으로 불리우며, 천서동은 ‘냇새왓슬’의 한자 차용 표기이다. 천서동은 마을 북쪽으로 제2산록도로와 접해 있다. 4·3사건 당시 약 45가구, 120여 명 정도의 주민이 화전갈이와 목축업을 하며 살았다. 천서동은 동동과 서동으로 나뉘어진 비교적 큰 자연마을이었고, 주민들은 서동보다는 주로 동동에 많이 거주하였다.

천서동은 1948년 11월경 낮에 토벌대가 마을을 방화하면서 대부분의 집들이 불타 없어졌다. 이 날 토벌대는 안덕면 서광리 쪽에서부터 마을을 불지르면서 강정리, 염돈 방면으로 넘어가다 천서동을 방화한 것으로 사전에 주민들에게 통지도 하지 않은 채 이루어졌다. 다행히 주민들은 서쪽에서 들어오는 토벌대를 보고 미리 피해서 인명피해는 없었다. 당시 주민들은 집들이 방화되는 동안 근처에 숨어 있다가 토벌대가 가버리자 불타버린 집 귀퉁이에 움막을 짓고 살았다. 그 후 주민들은 색달리 본동으로 내려가거나 인근인 안덕면이나 한림면으로 소개하는 등 각처로 흩어졌고, 일부는 근처의 곶자왈에서 숨어 지내다 토벌대에게 잡혀 희생되기도 했다.

허경화[남, 04년 85세] 씨의 증언에 의하면 색달리는 자연동굴 같은 은신처가 없어서 주민들은 근처에 숨어 지낼 때도 뿔뿔이 흩어져 곶자왈에 숨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렇게 숨어 지낼 때에도 주민들은 아기 엄마와는 같이 숨어 있으려 하지 않았다고 한다. 아기가 울면 바로 토벌대에게 발각돼 희생되었기 때문이다. 그 후 약 보름에서 한달 정도 뒤인 12월경 색달리 본동에도 소개령이 내려졌고 주민들은 대부분 중문으로 소개했다.

이듬해 색달리 본동이 재건되고 주민들이 돌아오면서 천서동 주민들 중 일부도 마을로 돌아왔으나 바로 천서동으로 가지 못하고 본동에 머물렀다. 그 후 1960년대에 천서동이 재건되면서 원래의 천서동 아래쪽에 14세대 정도가 돌아와 살았다. 그러나 이들도 생활고로 본동으로 이주하거나 각처로 흩어지면서 현재는 아무도 살지 않는 잃어버린 마을이 됐다. 천서동 주민들 중 4·3사건 희생자는 약 15명이다.

당시 천서동에 거주하던 주민들은 강영만·한흥만·김영지·김보신·한형팔·한갑생·김경함·오태진·김공삼·성상호·성개천·허치생·허달규·허치일·허달구·한흥률·한흥염·김서생·양달호·양시종·김필현·한흥찬·한흥선·김축생·김남순·송관평·김달흥·강시윤·허달화·허달희·강권삼·강천권·한무생·김기택·박명원·김성권 등이다.

[형태]

천서동서귀포시 중문동 제2산록도로 연변에 위치해, 행정구역상으로는 서귀포시 색달동 산 50번지, 산 51번지, 산 52번지이다. 현재 천서동에는 1960년대에 몇호가 재건되어 살았던 흔적이 있으나 인적이 드물어 새로 조성된 삼나무숲 속에 가시덤불만이 무성하다. 마을 흔적은 올레길과 당시 그 곳 주민들이 농사를 짓던 곳으로 보이는 화전밭의 형태가 남아 있는 정도이다.

[현황]

신설됐던 천서동은 향교 땅에 무상으로 조성한 것이었으나 그 후 주민들이 살기 힘들어 색달 본동으로 가거나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면서 그 곳마저 아무도 살지 않게 되었다. 현재는 타지에서 온 2가구 정도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 그러나 신설된 마을마저 롯데골프장 부지에 편입되면서 없어져 버릴 위기에 놓여 있다.

4·3사건 당시 폐허가 되어 잃어버린 마을로 역사교육을 위한 현장으로서 의미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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