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600819
한자 金萬鎰
이칭/별칭 중림,헌마공신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남원읍 의귀리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조성윤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50년연표보기 - 김만일 출생
활동 시기/일시 1594년 - 김만일 조정에 말 500필 헌납, 지중추 오위도총관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18년 - 김만일 조정에 말 500필 추가 헌납
활동 시기/일시 1629년 - 김만일 숭정대부 헌마공신 임명
몰년 시기/일시 1632년연표보기 - 김만일 사망
묘소 김만일묘역 - 서귀포시 남원읍 의귀리 1773번지 지도보기
성격 공신
성별
본관 경주 김씨
대표 관직 숭정대부 헌마공신

[정의]

임진왜란과 그 이후 시기에 조정에 말을 바친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의귀리 출신의 공신(貢臣).

[개설]

전국 최대의 목장지대였던 제주도에서 임진왜란 발발 당시 가장 많은 말을 소유하고 기르던 부자였다. 그는 목장 경영에 성공하여 많은 말을 소유하였고, 임진왜란 이후 계속되는 전란으로 중앙정부가 말 부족에 시달릴 때 자신의 말 중에 상당 부분을 국가에 바쳤고, 자신은 물론 아들 손자까지 벼슬을 제수 받았다.

[가계]

김만일(金萬鎰)은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자는 중림(中臨), 헌마공신(獻馬功臣)이며, 1550년(명종 5) 7월 정의현(旌義縣)에서 출생하였다. 경주 김씨 입도조(入島祖)인 김검룡(金儉龍)의 7세손이며, 자녀로 김대명(金大鳴)·김대길(金大吉)이 있다. 당시 김만일이 소유한 말이 1만필에 달했다고 한다.

[활동사항]

김만일은 대대로 부유한 집안에서 일찍이 목축사업에 뜻을 두어 육마(育馬)사업에 공을 들인 결과 사업은 크게 번창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조정에서는 전마(戰馬)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다. 당시 전쟁의 피해로 전국 대부분의 목장이 제 기능을 잃어버린 상태였고, 따라서 전마를 보충할 방법은 전쟁의 피해를 입지 않은 제주에서 말을 가져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해진 수량의 진상마(進上馬)와 국영목장에서 차출하는 말만으로는 크게 부족했다. 이때 그는 자신의 사둔마(私屯馬) 500필을 조정에 헌납하였고, 이후 광해군인조 대에도 정부가 요청하면 그의 사둔마를 제공하였다.

이에 조정에서 지중추(知中樞) 오위도총관(五衛都摠管)을 제수(除授)하였고, 벼슬은 이후로 계속 증직되어 1629년(인조 6)에는 종1품 숭정대부(崇政大夫) 헌마공신(獻馬功臣)에 이르렀다. 1632년(인조 10) 10월 사망하였다. 그가 죽은 뒤 아들 김대길(金大吉)과 사손(嗣孫) 김여(金礪) 또한, 2백필의 말을 헌납하였다.

1658년(효종 9)에 당시 제주목사 이괴(李襘)의 장계에 의해 김대길에게 종6품의 산마감목관(山馬監牧官)직을 주어 자손들인 경주 김씨 문중에게 종문세습직(宗門世襲職)으로 세습하게 함으로써 감목관직이 폐지된 1895년(고종 25)까지 약 210년간 83명에게 세습되어졌다.

[묘소]

서귀포시 남원읍 의귀리 1773번지에 속칭 ‘서위남루’에 김만일 묘역이 조성되어 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23.02.02 내용 수정 獻馬貢臣 -> 獻馬功臣 이회(李襘) -> 이괴(李襘)
이용자 의견
김** 김만일 할아버지의 후손입니다. 김검룡 입도조의 7세손이 아니라 6세손이라 고쳐주세요. 또한 대대로 부유하게 자랐다는 건 아닌듯합니다. 다들 가난하게 자랐다고 알고 있는데요.. 2015.06.20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