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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600828
한자 流配人
이칭/별칭 적거인(謫居人),유인(流人)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김재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392년 - 정의현에 한천이 유배됨을 시작으로 총 38명이 유배됨
특기 사항 시기/일시 1495년 - 대정현에 김순손이 유배됨을 시작으로 총 60명 유배됨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40년 - 대정현에 김정희가 마지막으로 유배됨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48년 - 정의현에 이승헌이 마지막으로 유배됨

[정의]

조선 시대 형벌 제도인 유형(流刑)을 집행받아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에 유배된 죄인.

[개설]

제주 유배는 고려 시대에 시작되었지만 조선에 이르러 오형(五刑) 제도가 정착하면서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섬이라는 고립성과 폐쇄성, 그리고 한양과 가장 먼 지역 중 하나라는 지리적인 특징은 추방과 격리라는 유형의 본질에 가장 잘 부합되는 지역으로 1392년(태조 1)부터 유형 제도가 폐지되는 1909년까지 제주도에는 261명이 유배되었다.

한편, 서귀포시 정의현에는 조선의 건국을 반대한 이유로 1392년(태조 1) 한천이 유배되는 것을 시작으로 1848년(헌종 14) 이상헌이 상소문의 내용으로 인해 유배될 때까지 38명이 유배되었다. 또, 대정현에는 1495년(연산군 1) 연산군의 난폭한 행동을 읍간(泣諫)[임금이나 웃어른에게 눈물을 흘리면서 간절하게 간함]한 환관 김순손이 군역을 지는 충군으로 유배되는 것을 시작으로 1840년(헌종 6) 윤상도 흉소 사건에 연좌되어 위리안치(圍離安置)되었던 김정희까지 총 60명이 유배되었다.

[유배의 집행 방법]

『영조실록』을 살펴보면 유배의 집행 방법으로 유·배·천도·충군·변원충군·수군충군·도배·정배·무기정배·원지정배·변원정배·극변정배·절도안치·절도정배·감사정배·위노·위리안치 등 다양한 용어가 사용되는데, 울타리를 치는 위리안치와 천극안치, 군역을 지는 충군, 노비로 좌천시키는 위노를 제외한 나머지는, 용어는 다르지만 유배인의 생활 모습을 살펴보았을 때 같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유배인 신분과 유배 사유]

서귀포 대정현정의현에 유배된 98명은 왕족·외척·관료·유생·환관·노비 등 다양한 신분의 사람들이 여러 사유로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1628년(인조 6) 선조의 제7자 인성군 모반 사건으로 인해 그의 부인과 세 명의 아들, 그리고 딸이 1635년(인조 13)까지 정의현에 유배되었으며, 1644년(인조 22)에는 이덕인이 왕으로 추대되었다는 이유로 대정현에 유배되었다가 유배 중 사사되었다. 그리고 1694년(숙종 20)에는 장희빈의 오빠 장희재가 갑술환국으로 대정현에 유배되었는데 1701년(숙종 27) 유배 도중 반란을 모의하다 서울로 압송되어 공개 주살되었다. 그리고 1801년(순조 1)에는 황사영 백서 사건으로 인해 그의 처 정난주가 노비로 대정현에서 유배되어 1838년(헌종 4) 사망할 때까지 천주교를 전파하였다. 이외에도 조선 개국을 반대한 이유로 한천정의현에, 과거 시험 부정을 저지른 이유로 민시준오석하정의현대정현으로 각각 유배되었다.

전체적으로 대정현정의현에 유배된 사유를 보면, 대부분 반란이나 정치 주도 세력의 변화로 인한 반대 세력 축출이지만, 이외에도 다양한 사유로 유배되었다.

[유배 노정]

출발지는 같지만 중간 기착지와 제주도 도착지는 각각 달랐고, 유배인을 태운 배 역시 해로가 바뀌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도착지인 경우 유배인이 제주도에 입도하게 되면 먼저 제주 목사에게 보고를 한 뒤 유배지로 이동하였기 때문에 목 관아와 가장 가까운 별도포나 화북포, 조천관을 통해 제주도로 입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제주 유배인의 노정을 살펴보면, 1614년(광해군 6) 7월 4일 영창 대군의 처형을 비판하고 영창 대군을 죽인 강화 부사 정항의 처벌을 주장하다 제주로 유배된 정온은 1614년 8월 13일 해남 어란포에서 배를 타고 제주로 출발하여 다음날 새벽 별도진(別刀津)에 도착하였고, 목사에게 보고를 한 후 대정현 안성리에 위리안치되었다.

조관빈은 1731년(영조 7) 11월 20일 서울을 출발하여 10여 일 만에 강진에 도착하고, 여기서 일기 불순으로 15일간이나 바람이 그치기를 기다리다가 12월 17일 출항하였는데, 또 날씨가 좋지 않아서 완도·백도[보길도]·소안도 등 여러 섬에서 며칠씩 바람을 기다린 뒤 12월 27일에야 별도포에 도착한 후 대정현으로 유배되었다.

김정희는 1840년(헌종 6) 9월 4일 대정현으로 유배명을 받은 후 고향인 천안을 지나 전라도 삼례와 완주를 거쳐 해남현을 떠나 9월 27일 당일에 화북포를 통해 제주도에 입도하였다. 그리고 1897년(고종 34) 제주목으로 유배된 김윤식은 12월 20일 유배명을 받은 후 1898년(고종 35) 인천 월미도에서 해룡함을 타고 출발하여 전라도 군산과 목포를 거쳐 소안도를 지난 후 산지포로 입도하였다.

1727년(영조 3) 7월 초에 평안도 순안[평양 인근]에서 유배 생활을 하는 도중 대정현으로 유배지를 옮기라는 명을 받은 임징하는 평안도 순안을 출발하여 평양과 개성·한양·영광을 거쳐 강진을 통해 별도포로 제주도에 도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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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배 중 저술 활동과 유배 생활]

유배인이 남긴 저서로 1614년(광해군 6) 영창 대군을 죽인 강화 부사 정항(鄭沆)의 처형을 주장하다 유배된 정온의 『동계집(桐溪集)』, 1628년(인조 6) 인성군 모반 사건과 관련하여 유배된 이건『제주풍토기(濟州風土記)』, 1727년(영조 3) 탕평책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대정현에 유배된 임징하의 『서재집(西齋集)』, 그리고 1731년(영조 7) 역시 탕평책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대정현에 유배된 조관빈의 『회헌집(悔軒集)』, 그리고 1777년(정조 1) 정조 시해 음모 사건과 관련하여 유배된 조정철의 『정헌영해처감록(靜軒瀛海處坎綠)』 등이 있다.

유배인들은 식량·거주·일상생활의 어려움과 함께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고독, 정치적 소외·절망감 등 정신적인 어려움을 겪었다. 특히 위리안치된 유배인은 혼자 입도하였기 때문에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다른 유배인보다 더 컸다. 또한 행동반경도 엄격히 제약되면서 실질적으로 배소에서 할 수 있는 건 서책을 읽거나 저술 활동 등 지극히 개인적이고 지루한 생활의 반복이었기 때문에 다른 유배인보다도 훨씬 힘든 생활을 하였다. 일반 유배인 역시 가족들을 동반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이들 또한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애절히였다. 그렇기 때문에 임금에 대한 충성과 연군의 감정, 가족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관직 복귀에 대한 갈망이 유배 문학의 가장 큰 특징으로 나타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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