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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600847
한자 李仲燮
이칭/별칭 중섭,둥섭,대향,아고리,구촌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예술인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서귀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전은자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16년 9월 16일연표보기 - 이중섭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29년 - 이중섭 평양 종로공립보통학교 졸업
수학 시기/일시 1934년 - 이중섭 서울 오산고등보통학교 졸업
활동 시기/일시 1938년 - 이중섭 일본 자유미술가협회 제2회 공모전 협회상 수상
수학 시기/일시 1940년 - 이중섭 일본 문화학원 졸업
활동 시기/일시 1941년 - 이중섭 조선신미술가협회 결성하여 도쿄에서 창립전 개최
활동 시기/일시 1943년 - 이중섭 일본 자유미술가협회 제2회 공모전 태양상 수상
활동 시기/일시 1946년 - 이중섭 조선조형예술동맹 가입
활동 시기/일시 1950년 - 이중섭 신미술가협회 결성 회장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51년연표보기 - 이중섭 서귀포로 피난, 이주
활동 시기/일시 1952년 - 이중섭 종군화가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53년 - 이중섭 통영 성림다방에서 개인전 개최
활동 시기/일시 1955년 - 이중섭 서울 미도파 화랑, 대구 미국 공보원에서 개인전 개최
몰년 시기/일시 1956년 9월 6일연표보기 - 이중섭 사망
추모 시기/일시 2002년 11월연표보기 - 이중섭기념관 개관
출생지 이중섭 출생지 - 평안남도 평원군
거주|이주지 이중섭 서귀포거주지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정방동 512-1 지도보기
묘소 이중섭 묘소 - 서울특별시 중랑구 망우동
기념관 이중섭미술관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서귀동 532-1 지도보기
성격 화가
성별
본관 장수
대표 경력 조선조형예술동맹|신미술가협회 활동

[정의]

한국전쟁 중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 지역에 피난 와 거주하면서 활동한 서양화가.

[개설]

이중섭이 제주도 서귀포로 피난 온 때는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월경이었다. 이중섭이 일본 여자인 이남덕[본명 야마모토 마사코]과 결혼해서 북한 지역인 원산에서 살다가 피난길에 나선 것은 1950년 12월 10일로 그때까지 그린 작품을 고향에 있는 어머니께 맡기고, 그리다 만 풍경화 한 점을 들고 피난길에 올랐다.

이때 이중섭은 아내와 두 아들, 조카 이영진과 함께 원산항을 출발하여 3일 후 부산에 도착했다. 부산에서 한 달 정도 어려운 생활을 하던 이중섭 가족은 조카 이영진이 먼저 와 있던 제주도로 들어왔다.

이중섭 가족이 서귀포에 도착해 머문 곳은 알자리 동산으로, 이 마을 반장이던 송태주·김순복[2012년 현재 이중섭 거주지 거주] 부부가 이중섭 가족에게 4.6㎡[약1.4평] 정도의 방을 하나 내주었다. 이중섭 가족은 이곳에서 피난민 배급품과 고구마로 연명했고, 이러운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이중섭은 「서귀포의 환상」 등 많은 명작들을 남기고 1951년 12월 경 부산으로 떠났다.

[활동 사항]

이중섭의 서귀포 시대는 불과 11개월이라는 길지 않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여러 개의 대표작을 남기고 있다. 서귀포로 피난을 와 얼마 되지 않아 그린 「섶섬이 보이는 풍경」 등의 풍경화들은 인상주의 화풍의 평범한 그림으로서 이후 통영 시대의 풍경화의 맥락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서귀포에서 자주 대했던 섬·게·물고기·아이들·귤이라는 소재는 이후 이중섭의 유화나 담배를 싼 종이에 그린 은지화에 자주 등장하면서 이중섭의 대표적인 캐릭터가 되었다.

특히 이중섭의 서귀포 시대의 소재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게였다. 배가 고파 게를 많이 잡아 먹다보니, 그것이 미안하여 게를 그리게 되었다는 화가의 말은 곧, 게를 관찰 할 수 있는 시간이 상대적으로 많았음을 의미한다. 제주도를 떠난 이후 그린 「그리운 제주도 풍경」에서 아이들과 어울려 노는 게의 모습은 행복한 가족의 모습을 표현하는데 가장 활력 있는 소재가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이중섭이 가족의 사랑을 더욱 심도 있게 표현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마지막 행복한 시간'이라고 할 수 있었던 서귀포 시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가족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의 표상이라고 할 수 있는 바다·아이들·게·물고기 등의 소재들은 은지화에서도 하나가 되어 서로 뒤엉켜 있다. 서귀포에서 더욱 친숙해진 이 소재들은 이중섭 그림의 강한 모티브로서 작용했다. 결국 이중섭은 서귀포에서 가족과 함께 생활하면서 생애 최고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서귀포 시대와 관련한 이중섭의 그림들은 따뜻하고, 해학적이고, 즐겁고, 포근한 사랑으로 표현됐다. 이중섭의 작품 중에서 서귀포 시대와 그 이후의 그림들이 전쟁이라는 현실에서 멀리 떨어진 이상세계로 보이는 것은 아마도 전쟁 기임에도 불구하고 서귀포에서 느낄 수 있었던 안도감 때문일 것이다.

이중섭은 서귀포 시대에 초상화 4점을 그렸다. 이 초상화의 주인공들은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이웃 주민 세 사람과 집주인 송태주다. 이중섭은 원산에 있을 때 어머니가 그려달라고 해도 다음으로 미루었을 정도로 초상화 그리는 것을 꺼려했다. 그러나 이중섭은 이웃 주민과 집주인의 간곡한 부탁을 받고 마당에 쌓아 놓은 땔감 위에 전쟁터에서 사망한 세 사람의 증명사진을 올려놓고 초상화를 그려 주었다.

[저술 및 작품]

이중섭의 대표작으로는 「서귀포의 환상」·「섶섬이 보이는 풍경」·「바닷가의 아이들」·「길 떠나는 가족」·「가족」·「싸우는 소」·「물고기와 노는 세 아이」·「어린이와 물고기와 게」·「꽃과 어린이」 등과 다수의 은지화가 있다.

[묘소]

이중섭의 묘소는 서울특별시 중랑구 망우동의 망우리 공동묘지에 있다

[상훈과 추모]

이중섭은 1938년 일본 자유미술가협회 제2회 공모전에 출품해 협회상을 수상했고, 1943년 제7회 협회전에 출품해 태양상을 수상했다.

1972년 서울 갤러리현대[당시 현대갤러리]에서 15주기 추모전을 열었고, 1986년 서울 호암갤러리에서 30주기 추모전이 열렸다. 1989년 이중섭미술상이 제정[조선일보, 이중섭기념사업회]됐고, 1999년 1월에는 이달의 문화인물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1997년 서귀포에서 이중섭거리 선포 및 이중섭거주지 복원 기념식이 열렸고, 2002년 이중섭전시관이 개관됐다. 2004년에 이중섭미술관이 제1종 미술관으로 등록되어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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