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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601017
한자 房星七
이칭/별칭 방진두,방갑,능헌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전라남도 화순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조성윤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49년연표보기 - 방성칠 출생
활동 시기/일시 1898년 2월 7일 - 방성칠 민란 주도
몰년 시기/일시 1898년 3월연표보기 - 방성칠 사망
출생지 방성칠 출생지 - 전라남도 화순군 동복면
거주|이주지 방성칠 제주 거주지 - 제주도 대정현 광청리

[정의]

1898년 제주민란을 일으킨 주동자.

[개설]

1898년 제주민란은 일명 ‘방성칠의 난’이라고도 하는데 당시 제주 지역은 서울에서 파견된 세리(稅吏)의 지나친 조세 수탈로 농민들의 삶은 대단히 고단하였다.

세리들의 횡포를 견디다 못한 농민들은 1898년 2월 7일 방성칠을 지도자로 하여 광청리 일대 화전민 수백 명이 제주성 내의 관아에 몰려가 화전세·목장세 및 호포의 과다징수와 환곡의 폐단을 바로 잡아 달라는 소장을 제출하였다. 그러나 당시 제주목사이던 이병휘는 민심이 두려워 받아들이는 척 하면서 장두인 방성칠을 잡아들일 궁리만 하였다. 제주목사는 위장된 술수로 위기를 모면하고자 하며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 이에 방성칠과 화전민들은 크게 분노하여 각 마을에 통문을 돌려 집집마다 장정 1명씩 모아 일전을 불사하는 대오를 정비하여 3월 1일 주성 안으로 쳐들어가 인부(印符)를 빼앗고, 목사와 대정군수 채구석을 구타하여 성 밖으로 내쫓았다. 이들은 머리에 백건(白巾)과 황전립(黃氈笠)을 쓰고 몽둥이로 무장, “남(南)”이란 글자를 몸에 붙이고 활동하였다.

1898년 3월 2일 민란 지도부는 관청 앞에 “제주·대정·정의 3군수를 내쫓고, 환곡 부담을 절반으로 줄인다”는 방문(方文)을 내걸어 민란의 성공을 알렸다. 그러나 남학당 중심의 민란 지도부와 일반 농민간의 결속력의 약화, 그리고 전 현감이었던 송두옥(宋斗玉) 등이 일으킨 창의군(倡義軍)에 민란군의 좌·우대장이었던 김낙영(金洛榮)이 회유당하여 난은 실패로 끝났다. 조정에서는 이 일로 제주찰리사에 박용원(朴用元)을 파견하여 사건을 수습케 하였다. 이 민란은 3년후에 발생하는 신축민란 즉 이재수의 난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가계]

본관은 남양(南陽). 본명은 방진두(房鎭斗), 일명 방갑(房甲)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성칠(聲七)은 자이고, 호는 능헌(菱軒)이다. 아버지는 방상규(房祥圭), 어머니는 김해 김씨, 형은 진석(鎭錫), 동생은 진영(鎭榮), 자제로는 대원(大源)·하원(河源)이 있다. 1849년에 전라남도 화순군 동북면에서 태어났다.

[활동 사항]

방성칠은 전라남도 화순군 동복에서 살던 남학(南學) 간부였다. 남학은 동학과 비슷한 시기에 발생한 후천개벽을 주장하는 신흥종교였는데, 1894년 동학혁명이 발생하자 남학교도들도 호응하였다가, 관군의 탄압을 받고 뿔뿔이 흩어졌다. 이 때 방성칠을 비롯한 일부 남학교도들이 제주도에 들어와 화전지대인 대정현 광청리[현 서귀포시 안덕면 서광리]에 거주하며 화전을 일구고 남학을 포교하며 살았다.

원래 방성칠은 처음에는 소장(訴狀)을 제출하는 대표자로 나섰을 뿐이었지만, 목사가 그를 잡아 가두려 하자, 남학교도들과 함께 적극적으로 민란을 주도하였고, 목사를 내쫒은 다음에는 아예 중앙정부와 관계를 끊고, 정감록 예언에 따른 국가건설을 추진하였다. 그의 이러한 구상은 제주도를 중앙 정부와 분리시키겠다는 구상이었지만, 또 다른 왕조를 건설하는 복고적인 것이었고, 이 구상에는 일본에 의지하려는 경향이 있었고 농민들과의 거리도 벌어져, 민란이 실패하게 되었다.

방성칠은 주성을 점령한지 7일만에 애월읍 귀일(貴日)리에서 붙잡혀 죽임을 당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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