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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601207
한자 佛敎
분야 종교/불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집필자 한금실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18년 -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 발생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 지역에서 활동하는 석가모니를 교조로 하는 종교.

[개설]

제주도의 불교 전래에 관해서는 크게 존자암(尊者庵)과 관련한 남방 전래설과 삼국 시대에 전래 되었다는 북방 전래설이 있다. 전래설을 뒷받침할 수 있는 유물로는 곽지사지(郭支寺址)의 삼국 시대 도기편과 강림사지(江臨寺址)의 신라 시대 토기편, 고내리 사지의 통일 신라 시대의 질그릇, 수정사지(水晶寺址)의 9~10세기경의 청자편 등이 있다. 또한 최근 발굴된 용천굴(龍泉窟)의 인화문 토기도 관련성을 조사할 필요가 있다. 이외에도 고려 시대 전래설이 있으나, 고려 초에는 이미 제주불교의 정착기에 해당하는 시기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에 관해서는 문헌상의 기록이나 발굴된 유물들이 뒷받침해 주고 있다.

[변천]

1. 고려 시대

제주불교는 고려 시대에 와서 조정으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으며 성장 발전하였다. 현재 문헌 기록에 남아 있는 대부분의 제주 사찰들은 고려 시대에 창건된 것들이다. 제주도 사찰 가운데 존자암은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는 비보 사찰(裨補寺刹)이었으며, 특히 법화사와 수정사는 원의 지배 이후 국가의 지원을 받아 산남과 산북의 사찰들을 관리하는 비보 사찰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존자암법화사는 제주도를 대표하는 사찰로 서귀포시 하원동에 위치해 있다. 존자암의 경우 조선 시대 때도 중앙에서 파견된 대부분의 관리들이 주요 방문지로 손꼽았을 만큼 유명한 곳으로 제주 지역의 호족과 관가의 관원들뿐만 아니라 민가의 아낙들까지도 안녕을 기원하는 사찰로 중요하게 여겼던 곳이었다. 존자암지는 현재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43호로 지정되어 복원되고 있으며, 이곳의 존자암 세존사리탑은 제주특별자치도 유형문화재 제17호로 지정된 도내 유일의 부도이다.

법화사는 고려의 비보 사찰로서 국가 차원의 각종 지원을 받는 산남의 대표적 사찰이었다. 조선 태종 때까지도 법화사의 노비가 280명이었고, 조선 시대의 배불 정책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사찰 정비 이후에도 여전히 노비 30여 명을 거느렸을 만큼 제주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사찰이었다. 발굴 조사 결과 법화사 터에서는 고려의 왕궁지인 개성의 만월대(滿月臺)와 몽골 왕궁에서 출토되는 것과 흡사한 용과 봉황문 막새가 출토되었다. 특히 이곳에서 출토된 기와는 고려가 왕실 건축 이외의 건물에는 사용할 수 없도록 금지하였던 것들이었으며, 12세기 중반에서 13세기 중반에 걸쳐 유입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고급 청자들이 발굴되었다.

2. 조선 시대

조선 시대에는 조선의 억불 숭유 정책으로 사찰의 경제적 기반이 축소되고 불교가 점차 쇠퇴하게 되었다. 국가의 지원이 중단됨에 따라 사찰은 개인적 신앙에 의지하여 유지하게 되었고, 특히 지방의 불교 사찰의 존폐는 지방 관리에 따라 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국성재를 지내던 존자암이 조선 시대에 와서 폐사되었고, 그것을 제주 사람들은 어떻게 받아들였는지에 대한 내용을 홍유손(洪裕孫)의 『소총유고(篠叢遺稿)』 중 「존자암개구유인문」[1507년]에서 엿볼 수 있다. “정의현의 대족들이 나쁜 병에 많이 걸리는 것이 이 암자를 폐한 뒤부터이고, 비바람 때문에 흉년이 드는 것도 이 암자를 중수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한다. 민간의 호족들과 관가의 관원으로부터 논밭을 가는 사내와 물을 긷는 아낙들은 말할 것도 없고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늙은이와 초동, 목동들까지도 모두 달려와 이 절을 중수하자고 하소연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이에 중수하는 일이 법에 저촉된다고 하며 아무리 만류하여도 그들의 마음은 더욱 끓어올라 어떻게 막을 도리가 없었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의 억불 숭유 정책은 오히려 불교 신앙을 민중들의 생활 속에 토착화되게 만들었다. 1520년(중종 15) 제주에 유배왔던 김정(金淨)『제주풍토록(濟州風土錄)』에서 “음사(淫事)와 함께 부처에 기울이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묘사하고 있다. 이렇듯 조선 시대의 억불 정책은 제주불교가 민간 신앙과 혼재되어 토착화되는 변화를 가져왔다.

이러한 양상과 함께 16세기 이후 들어 본격적인 목사들의 불교 탄압이 행해지는데, 1565년(명종 20) 변협(邊協) 목사에 의해 제주로 유배온 보우(普雨) 스님이 도내봉에서 장살(杖殺)당하였고, 이후 곽흘(郭屹) 목사에 의해 불상과 사찰이 훼철되기 시작하였다. 1703년(숙종 29)에는 제주에 1년 남짓 재임했던 이형상(李衡祥) 목사에 의해 마을의 신당과 사찰이 철폐되었다. 「명와선생 이공행장」에는 “도민 700여명이 건포에 모였는데 어찌 감히 공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겠냐면서 신당 129곳을 불사르고, 두 곳의 사찰을 불사르고 1,000개에 가까운 불상을 바다에 던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3. 근대

근대에 들어와서 제주불교는 중흥의 시기를 맞는다. 이 배경에는 제주 유림 사회에 지속되어 온 불교적 성향에서 영향 받은 바가 컸다. 제주도에 유배 온 유학자들을 스승으로 모시고 학문적·사상적 가르침을 사사받았던 제주 유림의 제자들은 유배인들의 불교적 성향까지도 이어받아 유교경전과 더불어 불교 경전을 읽으며 신앙행위를 이어나갔다. 조선 후기에서 개항기 사이의 유배인들 중에 제주 유림 사회에 영향을 끼친 인물로는 김정희(金正喜)·최익현(崔益鉉)·김윤식(金允植)·박영효(朴泳孝) 등을 들 수 있다.

개항기 제주도 출신으로서 불가에 귀의한 승려는 1892년 출가한 강창규, 1894년 출가한 김석윤이 있는데, 이 중 김석윤은 승려이면서 제주 유림의 일원이었고, 제주의병 항쟁을 이끈 항일 운동의 주역이었다. 이들의 등장과 더불어 1908년 김석윤의 도움으로 봉려관 등에 의해 관음사(觀音寺)가 창건되었다.

제주불교는 1918년 법정사(法井寺) 항일 운동을 통해 일제의 국권 유린에 항거하며 적극적으로 사회 문제에 동참하였다. 그러나 법정사 항일 운동 이후에는 제주불교의 포교와 활성화라는 당면 문제에 부딪혀 친일 성향으로 기울어져 갔다. 1920년대 일제의 문화 정책에 따라 친일 성향의 제주불교협회가 제주불교를 대표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제주불교 저변의 지지를 얻을 수 없었던 제주불교협회의 활동은 곧 침체 일로를 걷게 되었고, 이에 1930년대에 이르러서는 제주불교 인물들이 주도하여 제주불교연맹을 조직하는 등 자주적 활동을 시도하고자 하는 노력이 일어났다. 1930년대 제주불교는 1908년 관음사 창건 이후 가장 왕성한 활동의 시기를 맞이하였다. 1945년 말 활동하고 있던 제주불교의 사찰 수는 82개 소로 조사되었다.

4. 현대

해방 이후에는 친일을 반성하고 일제 통치로 왜곡된 불교계의 혁신을 위해 근대 제주불교의 원로와 청년 승려들이 함께 나섰다. 그러나 제주 4·3 사건이 발발하고 제주불교 역시 제주 사회의 흐름에 동참하면서 근대 제주불교가 이루어 놓은 그 동안의 모든 인적·물적 토대는 파괴되고 혁신 운동은 좌절되었다.

당시 토벌대는 “1948년 10월 20일 이후 해안선에서 5㎞ 이상의 지점과 산악 지대의 무허가 통행 금지를 포고하고 위반하는 자는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총살한다.”는 포고문을 발표하여 주민 소개령을 내리고 마을을 방화하고, 주민을 무차별 학살하였다. 제주도의 지형상 토벌대가 지적한 그 경계는 해변 마을을 제외한 제주도 전 지역에 해당되는 것이었고, 해안 마을조차도 무장대를 고립시키기 위해 마을마다 성을 쌓게 하여 주민들을 차단하고 마을 밖 출입도 통제하였다.

이로 인해 산간 지역이나 인가에서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던 사찰들의 피해는 매우 심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제주도 대부분의 사찰은 소각되거나 파괴되어 폐사 상태에 이르게 되었는데, 관음사와 법화사를 비롯한 제주도 내 주요 사찰들이 거의 모두 토벌대에 의해 불태워지거나 철거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결국 마을로 소개되었던 사찰들은 오랫동안 본래 터로 되돌아가지 못하거나, 다른 장소를 구해 이전하는 양상을 보이게 되었는데, 고운사·귀이사·서관음사·소림사·은수사·호촌봉 암자와 백양사 북촌 포교소는 폐사된 후 현재까지도 복원되지 않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해방을 맞아 제주불교 교무원을 구성하고 의욕에 찬 활동을 계획하고 있던 제주불교의 핵심 승려들 대부분이 희생당하는 아픔을 겪게 된다. 1940년대 제주불교를 이끌던 대표적 승려인 이일선과 이세진은 수장당하였고, 근대 제주불교 활동의 중심이었던 오이화는 고문의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이외에 원문상과 이성봉을 비롯한 여러 승려들이 토벌대에 의해 총살당하였다.

현재 서귀포시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찰 종단은 조계종·태고종·법화종·일붕선교종 등이 있다. 그 중 조계종(曹溪宗) 사찰은 존자암·법화사·약천사·남국선원 등 20곳이 있으며, 태고종(太古宗)은 정방사·원만사·광명사·동암사 등 30곳이며, 법화종(法華宗)은 혜관정사 등 8곳이 있다. 그리고 일붕선교종 35곳, 천태종 2곳, 원효종 13곳, 기타 30여 곳이 있다.

불교 관련 주요 단체로는 서귀포 불교문화원서귀포 불교신행단체연합회 등이 있는데, 이들 단체를 중심으로 하여 지역의 불교 문화 창달과 함양에 이바지하고, 불자 상호간의 화합과 도모를 통해 서귀포 지역 사회 발전에 큰 역할을 담당해 가고 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21.04.16 내용 수정 어도봉->도내봉으로 수정, 관음사 창건 주체 김석윤->봉려관으로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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