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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601543
한자 救荒飮食
분야 생활·민속/생활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집필자 오영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763년 - 고구마 제주도 유입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15년 - 고구마의 획기적인 재배기술 도입(일본인 제주도사 이마무라 도모에 부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19년 - 고구마의 획기적인 재배기술 도입(일본인 제주도사 이마무라 도모에 이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40년 - 주정공장 건설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지역에서 흉년 등 빈궁기에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하여 서민들이 먹었던 음식.

[개설]

우리나라의 최남단 서귀포는 태풍이 오는 길목이다. 밭작물이 왕성히 생육하는 9월을 전후하여 해마다 몇 차례씩 태풍과 홍수가 휩쓸고 지나갔다. 조선 왕조의 역대 『실록』에 기록된 제주 흉년의 건수 만해도 5백년 동안 100회를 상회한다. 1800년대에는 3년에 한 번꼴로 흉년에 대한 기사가 있을 정도였으니, 당시 식량 상황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특히 서귀포 지역에서는 모진 바람으로 이름난 옛 대정현 지역에서 가장 심했다고 한다. 근현대에 들어서도 식량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일제 강점기에는 일제의 식량 공출을 강요받아 먹거리가 턱없이 부족하여 늘 기근으로 허덕였다.

해방 후에는 1948년 4·3 사건으로 중산간 마을이 소개되고 중산간 지역에서 농사도 맘 놓고 지을 수 없어 기근에 시달려야 했다. 뿐만 아니라 1954년 9월 한라산 입산 금지가 해제되기까지 6년 이상 동안 한라산에서 나는 초근목피도 제대로 채취할 수 없어 구황 음식 재료도 맘대로 이용하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6·25 전쟁 때에는 15만 명이 넘는 피란민이 한꺼번에 제주도로 유입되어 식량이 바닥날 지경이었다. 이렇듯 가혹한 자연환경에 연이은 역사의 질곡으로 인한 서귀포 주민들은 인간의 기본적인 식생활 욕구마저 제대로 충족되지 못할 정도로 참담한 궁핍 생활의 연속이었다. 사실,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서귀포 지역 음식은 구황 음식이 대부분이라고 해도 크게 무리가 따르지 않는다.

다행히도 남쪽 지역인 서귀포시는 아열대성 기후가 뚜렷하고 생물종 다양성을 가진 섬인 까닭에 한라산 자락에 연중 식물이 풍부하고 연안에는 해조류가 많이 자생하였다. 야생식물과 해조류를 채취하여 구황 음식으로 삼아 부족한 곡물을 대신함으로써 기근을 견디어 나갈 수 있었다. 그래서 서귀포 지역에는 본토와는 다른 종류의 구황 음식이 많고, 조리법도 큰 차이가 있다. 또한 이러한 궁핍한 식생활은 주민의 의식에도 크게 영향을 미쳐 서귀포 특유의 생활 정신인 ‘냥정신’[근검·절약 정신]과 ‘수눌음정신’[상부상조 정신]을 낳았다. 보통 때에는 흉년을 생각하면서 근검·절약하고, 편안하게 사는 사람은 고생하는 사람을 생각하며 상호간에 상부상조하는 삶의 철학을 만들어 낸 것이다.

[서귀포 지역 구황 음식의 특징]

서귀포 지역의 구황 음식은 약간의 밭작물에 육상 자생식물, 그리고 바다 연안의 해초류로 구성된 식단이다. 보통 육지에서는 보릿고개라 하여 봄철 춘궁기에 구황 음식이 집중된 반면, 서귀포에서는 사계절 구분이 없었다. 육지의 구황 음식은 죽이 주류를 이루나 서귀포의 구황 음식은 약간의 낱알 곡식, 특히, 곡물을 가루로 내어 여기에 해조류를 넣어 조리한 범벅이나 잡곡밥, 대용식 떡 등이 많다는 점이 다르다. 절해고도이기에 조정으로부터 단시일에 구휼을 기대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기근을 이겨나가기 위한 독자적인 행보가 구황 음식 문화의 발달을 가져왔다고 하겠다. 이러한 서귀포의 구황 음식의 특징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첫째, 해조류를 이용한 구황 음식이 많다. 서귀포 지역은 다양한 해류가 교차되고 화산암이 연안에 깔려 있어 여러 종류의 해조류가 분포한다. 이 중에 구황 음식으로 사용되었던 해조류는 톳·우뭇가사리·홀파래·갈파래·청각·도박·모자반·넓패·감태 등이다. 톳은 보리쌀과 같이 삶아 ‘톨밥’[톳밥]으로 먹거나, 여기에 고구마가루나 메밀가루를 더 넣어 점성이 있게 조리하기도 한다. 또는 보리가루에 톳을 넣을 죽을 쑤기도 한다. 우뭇가사리는 ‘말치’[큰솥]에 넣어 끓인 후 국물과 건더기를 분리하여, 국물은 식혀 묵처럼 굳게 하여 ‘개역’[보리 미숫가루]과 냉수를 함께 섞어 먹고, 건더기는 밀가루나 보리가루와 함께 반죽하여 떡을 만든다. 홀파래는 여러 번 민물에 씻어 탈색시킨 후, 보리가루나 좁쌀가루를 섞어서 범벅이나 죽을 만든다. 또는 말린 파래를 보리쌀과 파래를 3:1의 비율로 넣어 밥을 짓기도 한다. 모자반은 좁쌀과 함께 끓여 ‘ᄆᆞᆷ죽’을 만들거나, ‘는쟁이’[메밀기울]을 섞어 는쟁이범벅을 만들어 먹었다.

둘째, 잡곡 가루로 만든 범벅과 식사 대용의 떡 종류가 많다. 범벅은 메밀범벅과 고구마범벅이 주를 이루고, 그 외에 수제비[메밀·고구마가루]와 칼싹두기[칼국]이 있다. 구황 음식용 떡은 돌레떡[메밀가루·좁쌀가루·고구마가루]·좁쌀오메기떡·메밀빙떡·조침떡[조시루떡]·‘감제침떡’[고구마가루 시루떡]·‘세미떡’[메밀가루]·보리상애덕[발효빵] 등이 있다.

셋째, 서귀포 서부 중산간 곶자왈 지대 또는 오름 주변의 야산에 자생하는 식물을 효율적으로 이용한다. 이 중 대표적인 것이 ‘믈릇’[무릇]이다. 믈릇은 서귀포 지역에서 춘궁기 구황 식품으로 가장 흔히 이용된 야생 뿌리식물이다. 육지부에서는 무릇에 참쑥을 넣어 고아 먹었는데, 서귀포에서는 넓패·패·톳 등과 함께 고아 다. 무릇을 작은 오지항아리에다 무릇과 넓패를 층층이 넣고 물을 부은 다음, 진흙을 항아리에다 바르고 미리 만든 화덕에 얹어 1~2일 동안 말똥이나 보리가시랭이를 땔감으로 하여 은근히 고아 다. 여기에 보리개역을 넣어 먹거나 보리가루와 무릇을 1:3의 비율로 섞어 범벅으로 먹기도 한다. 또는 무릇이나·절간 고구마 가루를 켜켜로 뿌려 푹 쪄서 먹기도 한다. 이때 반찬으로는 바닷게를 보리가루에 묻혀 뽁은 것을 먹는다. 무릇을 곡물처럼 먹었다 여 ‘믈릇’[릇쌀]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 외에 ‘대’[리대 열매]·‘섯보리’[덜 익은 청보리]·피쌀·송피·개자리·떡쑥·느릅나무순으로 밥 또는 죽을 만드는 데 이용하였다.

[기근을 이겨 낸 고구마]

고구마가 제주도에 처음 도입된 것은 1763년(영조 39)의 일이다. 조선 통신사 정사 조엄(趙曮)이 일본으로 가던 중 대마도에서 고구마 종자를 얻어 부산진과 동래로 보냈다. 그는 대마도와 토질이 비슷하고 식량이 늘 부족한 제주도를 주목하여 구황음식으로 재배하도록 명하였다. 조엄의 손자 조인영이 이 명을 받들어 제주도로 보냈으며, 제주도에서는 이를 파종하여 재배에 성공을 거두었다. 제주인은 조엄의 뜻에 감복하여 ‘조저’[趙藷]라는 명칭을 붙여 그 덕을 기념하였다. 그러나 그 후 종감저가 제주에서 어떻게 관리되었고, 얼마나 성공을 거두었는지 상세히 알 수 없다. 아마 11월에 수확한 종감저를 다음해 4월까지 부패하지 않고 저장할 수 있는 기술이 열악하고 먹을 것이 부족하여 식량으로 먹어 버렸기 때문에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하였다.

그 후 150여 년이 지나고 일제강점기인 1915년~1919년에 일본인 제주 도사(濟州道士) 이마무라 도모에[1870~1943]가 고구마의 획기적인 재배 기술을 도입하면서 대대적으로 재배되었다. 그는 신품종인 중승 100호 등 2~3개 품종을 도입하고, 직접 면서기와 순사를 이끌고 마을을 순회하면서 고구마 재배법을 교육하였다. 그 결과 크게 성공을 거두어 고구마가 구황 식량으로서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당시 항상 부족하던 식량이 대체되어 3년째 되는 해에는 유사 이래 식량이 남아돌아 조를 육지에다 수출하여 3만원의 수익을 올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제주에 동양척식회사 지사를 설립하면서 상황은 판이하게 달라졌다. 1940년 제주시 건입동에 군수용 바이오 연료 생산을 위한 주정 공장을 건설하여 주정을 만드는 데 심혈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그것도 모자라 도내에서 생감으로 처리할 수 있는 물량이 초과되자 절간 ‘빼떼기’를 만들어 공출하도록 강요하였다. 곡식을 재배해야 할 토지에 고구마를 갈고 수확한 다음 절간고구마로 말려 공출하는 일에 얽매어야만 했다. 예전에 곡물에 고구마를 혼합하여 조리함으로써 식량을 크게 절약할 수 있었던 대체 자원이 더 이상 주민의 먹거리가 되지 못하고, 일제의 군수 물자로 빼앗기고 말았다. 이로 인해 주민들은 고구마 전분박을 끼니로 때워야 할 정도로 식생활은 더욱 궁핍해질 수밖에 없는 배고픔 자체였다. 해방 후 도내에 전분 공장이 도처에 건설되면서 고구마는 환금 작물로 탈바꿈하게 되었고, 부족한 곡물을 대용할 수 있는 구황 작물로 제자리를 차지하였다.

[구황 음식의 기본 틀, 메밀가루]

서귀포 지역의 주식 중 가루음식은 범벅이 무려 37종류이고, 면류가 10종이나 된다. 실제로 제주 여성들이 불렀던 노동요의 대부분은 「멧돌·방아노래」이다. 김영돈의 『제주도민요연구』[1965]에 수록된 노동요의 1,142수 중 815수가 제분을 하면서 부르는 노래이다. 제주 노동민요의 70% 이상이 멧돌·방아소리라는 것이다. 그 만큼 식생활의 주체자인 여성이 담당하는 가사 노동 중 제분 작업이 차지하는 비율이 높았음을 의미하며, 서귀포 음식에 가루음식이 많은 이유를 단적으로 방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구황 음식에 가루음식이 많은 것은 서귀포 지역의 척박한 토질에서도 잘 자라는 메밀에 기인한다.

메밀은 가루음식을 만드는 데 조리·가공 적성이 뛰어난 식재료이다. 육지에서는 메밀의 활용성을 놓고 볼 때 국수나 묵, 또는 부침에 불과하여 극히 단조로운 성향을 보인다. 반면 서귀포 지역에서는 메밀가루를 이용한 음식의 조리법과 종류가 다양하다. 메밀가루로 만든 메밀범벅은 이를 모체로 하여 주변에서 얻을 수 있는 다양한 제철 부재료를 조합한 범벅류를 파생시켰다. 또한 메밀의 제면성을 이용하여 ‘칼국’[칼싹두기]·‘베기’[수제비]를 만들었고, ‘개역’[미숫가루]·묵·적·부침·돌레떡·‘돗수애’[순대]·탕 등의 재료로도 활용하였다. 서귀포 지역의 척박한 자연환경에 부합되도록 식생활 담당자인 여성들이 식량을 절약하고, 식생활 준비 시간을 최소화한 효율성 중심의 구황 식생활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구황 음식 관련 속담]

서귀포 지역에 퍼져 있는 구황 음식 관련 속담 중 “빈 맷돌질 하면 흉년 든다”는 습관적으로 빈 맷돌질 하지 않도록 정신 차리라는 말이고, “남의 호박 따먹으면 죽을 때까지 부어서 죽는다”는 남의 먹거리에 손대지 말라는 말이다. 또 “갑인년 흉년에도 먹다 남은 건 물뿐”은 물이 후한 인심의 상징이라는 뜻이며, “누룽지 버리면 죄 짓는다”는 하찮은 먹거리도 소중히 하는 말이다. “감태[털모자]밥에 섯보리 메”는 흉년에 제수로 보리밥 위에 쌀밥을 모자 씌우듯 덮은 밥을 말하며, “늙은이만 먹는 막떡”은 떡을 만들 때 마지막에 만든 떡은 힘없는 노인의 몫이라는 뜻이고, “칼 받은 삼월 호미[낫] 받은 사월, 닭도 굶는 유월”은 춘궁기가 들었다는 말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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