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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601587
한자 衣生活
분야 생활·민속/생활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집필자 현진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20년 - 고무신보급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30년 - 고무신상점 개업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 지역 사람들이 일생 동안 입는 일이나 입는 옷에 관한 생활.

[개설]

사람은 태어나면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어떤 형태든 간에 의복을 입고 생활을 영위한다. 의복은 그 사람이 살고 있는 지역의 기후나 풍토와 같은 자연환경과, 원료의 공급, 사람들의 기술, 도덕적 기준과 미적·정치적 관념뿐만 아니라 종교적 가치 등 자연과 사회 환경에 영향을 받게 되며, 무엇보다 이러한 환경을 극복하는 수단으로서 착용하게 된다. 서귀포 지역에서는 이러한 영향이 평상복보다 노동복이나 의례복에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서귀포시민들이 언제부터 어떤 옷을 입었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거의 없다. 다만 육지와의 관계와 역사서에 기록된 단편적인 기록, 얼마 되지 않는 유물과 구전을 통해 유추해 볼 수 있다.

[고대]

삼국 시대 이전, 서귀포 지역에 최초로 살았던 사람들의 의생활을 알아볼 수 있는 단서를 찾기는 불가능하나 어느 지역에나 그랬듯이 자연에 있는 풀이나 동물의 가죽을 이용하여 신체를 보호하였을 거라 여겨진다.

삼국 시대로 넘어와서, 제주도가 백제와 신라와 교류하였고, 더 나아가 일본과 중국 등의 대외 교류가 활발하였다는 것을 통해 서귀포 지역의 의생활 모습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이 시대에는 직물에 의한 의생활이 보급되었을 것으로 여겨지며, 다른 지역과 문물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의생활에도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고려 시대]

고려 시대의 의생활은 단편적인 기록으로 유추해 볼 수 있다. 고려가 탐라의 왕자에게 벼슬과 함께 공복과 은대(銀帶)·비단·약품 등을 주었다는 기록과 제주 사람들의 의관(衣冠)이 중국 당나라 사람과 같고 붉은 가죽띠와 각대(角帶)를 매고 짧고 검은 베적삼을 입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신라 시대 말부터 관복이 당제(唐制)로 개편되는 등 당의 영향을 받았던 것이 제주에도 영향을 끼쳤다는 증거가 되면서, 이러한 영향이 서귀포시에도 일정부분 끼쳤던 것으로 짐작해 볼 수 있다. 13세기에는 몽골이 제주도에 탐라총관부를 설치하고 직접 관리하게 되므로, 100여 년간 실질적인 몽골의 영향을 받게 되는데, 서귀포 지역도 예외는 아니라고 보인다. 가죽감태나 여자들이 머리에 수건을 쓰는 것 등이 몽골과 공통된 현상이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

조선 시대에는, 18세기 초 『탐라순력도』에 나타난 의복으로 그 형태를 가늠할 수 있다. 그림에서는 관원의 관복과 일반인들이 입는 평상복과 노동복으로 구분 지을 수가 있다. 관복 차림은 한반도와 다르지 않고, 일반인들이 입은 의복을 살펴보면 외출복 차림과 노동복 차림으로 구분된다. 외출복으로는 남자들은 기본적으로 바지와 저고리 위에 도포를 입고, 갓을 쓰고 있으며, 여자들은 치마, 저고리에 얹은머리의 모습이다. 노동복은 목자들이 바지, 저고리에 털벙것을 쓰고 있고 가죽발레를 입고 있다. 물질할 때 입은 물옷은 흰색으로 가슴과 하체를 가린 모양의 옷을 입고 있는데, 이는 1970년대까지 입고 있었던 물옷의 형태와 비슷하다. 뱃사공의 옷은 상투머리에 바지와 저고리 차림이다.

[근대]

1900년대를 전후한 시기의 의생활을 유물과 구전을 통해 정리해 보면, 태어나서 최초로 봇뒤창옷이라고 하는 배냇저고리를 입었다. 이 옷은 의례적인 성격의 옷이며 삼베로 만들었다. 아이가 돌이 지나 걸음마를 하게 되면, 저고리와 풍차바지라고 하여 밑이 터진 바지를 입거나 두렁치마를 입혔다. 점차 자라면서는 바지, 저고리와 치마를 입었고, 남자아이는 저고리 위에 조끼를 입거나 두루마기를 입었다.

평상복과 외출복은 육지와 큰 차이가 없다. 남자는 무명이나 여유가 있으면 명주나 삼베, 생명주를 사용하였다. 옷은 바지, 저고리 위에 두루마기를 입고 갓을 썼다. 두루마기는 갑신의복개혁으로 인해 소매가 넓은 도포 등을 폐지하고 두루마기를 입게 하면서 남녀 귀천 없이 모두 겉옷으로 입게 되었다. 배자는 조선 후기에 남녀가 저고리 위에 입었지만, 서양복의 조끼가 들어오면서 점차 입지 않게 되었다. 1940년대부터 젊은 여성들은 통치마로, 발목이 보이는 검정 치마에 흰 저고리를 입었으며, 일제 강점기 말에는 소녀들이나 부녀자들은 치마 대신 검정물을 들은 ‘몸뻬’를 입기 시작하였고, 남자들은 국민복을 입었다.

[현대]

1950년대 후반으로 들어와서는 양장이 서서히 대중화가 되었는데, 특히 재일교포들이 보내주는 의복은 서귀포시의 의생활에 영향을 끼쳤다.

노동복으로는 밭일을 할 때나 들에 나가서 가축을 돌보는 목자들은 갈옷을 입었고, 머리에는 털벙것과 정당벌립과 대패랭이를 썼다. 특히 목자들은 겨울철에는 털가죽옷을 입었으나 제주 4·3사건을 계기로 서서히 사라졌다. 물질을 할 때 입은 물옷은 1970년대까지는 물소중이와 물적삼, 물수건을 썼는데 1960년대에 외부로 물질하러 나갔던 사람들이 물수건 대신 까부리라는 모자를 쓰고 와서 보급시켰으나 1970년대 고무옷이 들어오면서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서귀포시에서는 부지런해야만 살 수 있었기 때문에 옷치레하며 살 여유가 없었다. 특히 직조를 해야만 식구들의 옷을 마련할 수 있었기에, 한 올의 실오라기도 귀하게 여겼다. 그래서 옷을 만드는 데도 검약 정신을 바탕에 두고 궁리를 하여 실용성과 편리함, 그리고 다양성을 염두에 두어 한 올이라도 허투루 낭비하는 일이 없도록 하였다.

[생활민속적 관련사항]

조선 시대 오백년 동안 대정현에는 많은 사람들이 유배 와 살았다. 이들은 지방 자제들에게 학문을 가르치고 예의범절을 전수시켰을 뿐만 아니라 의식주의 개선과 여러 가지의 습속에 영향을 미쳤다. 일제 강점기에는 서귀포시에 일본인들이 많이 들어와 상주하면서 일본인 상점이 들어서게 되어 신식 물건들을 어느 지역보다 빨리 접할 수 있었다. 양복과 구두를 살 수 있었으며, 고무신은 육지에서는 1930년대가 되어야 대도시에서 보편화되었는데, 서귀포시에는 1920년대에 노동자에게도 보급되었다는 기록을 볼 때 많은 사람이 신었다고 보인다. 특히 1930년도에 고무신을 파는 상점이 서귀포와 대정에 생겨났다고 하니 일반인들이 많이 신었다는 증거가 된다. 부녀자들이 외출할 때 들었던 는대구덕은 강오라고 하는 전선줄을 이용한 가방과 핸드백이 나오면서 의례적인 용도로만 사용하게 되었다. 그리고 남자들이 맨 머리로 다니듯이 여자들도 머리에 수건을 쓰고 외출하는 모습도 사라졌다. 그리고 한복도 더 이상 평상복이 아니고, 결혼식이나 명절 등 특별한 날에만 입는 의례복이 되었고, 평상복으로는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양복을 입으며 특히 여자들은 스커트 보다는 바지를 더 많이 입어 실용성과 편리함을 추구하고 있다. 그러나 서귀포시 의례복 중에서 호상옷은 아직도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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