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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601835
분야 생활·민속/생활
유형 물품·도구/물품·도구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집필자 김동섭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생활도구
재질
용도 항아리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 지역에서 사용하는 흙을 구워 만든 다양한 종류의 항아리.

[개설]

제주에서 이용되었던 통개[항아리]는 크게 2가지로 분류된다. 하나는 묽은 기운이 나는 일반적인 항[항아리]을 가리키고, 또 하나는 지세항이라고 하는 것이다. 항에는 고팡에서 곡식을 담아 보관하면서 이용하거나 장항굽[장독대]에서 장을 보관하거나 젓을 담았던 단지 등이 있다. 지세항에는 정지에서 식수로 이용할 물을 담아 보관하였던 물항, 떡을 찔 때 이용하였던 시루 등이 있다.

[형태]

통개는 제주점토를 가지고 ‘토래미’라고 불리는 흙판을 만들고 난 다음에 통(桶)으로 붙여 나무도구를 이용하여 두들겨서 만든다. ‘움집’이라는 흙과 돌로 만든 집에서 6~10개월 정도를 보관한다. ‘섬피’라고 하는 살아있는 나뭇가지를 묶어 말린 연료를 이용하여 3일 내외를 밤낮으로 소성한다.

제주옹기는 크게 노랑그릇과 검은 그릇으로 구분된다. 노랑그릇은 유약없이 불의 온도로 옹기의 표면에 유약의 효과를 낸다. 1200℃ 내외에서 산화소성(酸化燒成)을 한다. 그래서 옹기의 표면 색깔이 갈색으로 나타난다. 물·술·간장과 같은 섭취용 액체, 된장·곡식·씨앗·소금과 같은 물질을 보관하는 것으로 사용된다. 검은 그릇을 소성하다가 대략 700℃ 쯤에서 아궁이와 배연구를 막아서 불연소된 연기가 그릇에 스며들도록 한다. 이른바 환원소성(還元燒成)을 셈이다. 그래서 그릇이 표면이 회색으로 나타난다. 물이나 곡식을 보관하며, 시루와 같은 음식 제작용구 및 향로 같은 제사용 그릇들이 주류이다.

[생활 민속적 관련 사항]

서귀포시 대정읍 구억리에서의 굴제에 대해 고정순 씨에 의하면 굴[가마]제는 오래 전에 구억리에서 지냈는데 그릇과 항아리를 많이 만들어서 가마에 들여놓은 다음 가마에 불을 때기 전에 ‘메 3그릇, 골감주’를 올려서 제를 지냈고, 제가 끝나면 음복을 했다. 불대장이 제관이 되어서 집행하는데 본향당에 가듯이 준비한다. 구억리는 그릇을 빚어서 구웠기 때문에 특별히 날을 보지 않고 굴을 때는 날이 정해지면 돌아가면서 제관이 된다. 이 굴제를 1960년대까지 지냈다고 한다.

박경생씨는 굴제와 제사를 같이 지내는데 굴에는 불할망과 불하르방이 있다고 믿었다. 굴제를 지내는 날은 정해져 있지 않고 가마에 옹기를 가득 채우고 불 땔 준비가 되면 제를 지낸다. 가마 뒤쪽에서 제를 지내면 바로 불을 땐다.

어린아이들은 굴젯밥을 얻어 먹으러 다녔다. 즉 굴제가 끝나면 주변에 모여들었고, 곤밥[쌀밥]을 한 수저씩 나눠 줬는데 그러다보면 한 그릇이 소비되었다. 아이들은 굴젯밥을 먹기 위해서 이 날을 기다리기도 했다. 제가 끝나면 곤밥에 보리밥을 한 숟가락정도 섞어서 특별히 불대장을 대접했다.

굴제와 관련해서 신창현씨의 경험은 다음과 같다.

구억리에서의 ‘굴제’는 굴할망과 굴하르방을 위한다고 한다. 이를 관리하는 것은 굴대장 몫이며 굴대장은 굴을 총괄하는데 지금은 불대장이라 한다. 굴제를 지낼 때 금기사항이 있는데, 마을에 아기가 태어나거나 초상이 나면 비린다[부정탄다]고 해서 당사자 집에서 굴에 직접 들어가서 잡식을 하기도 했다. 1960년대초까지도 구억리에서는 집집마다 그릇을 만드니까 어느 집에 무슨 일이 있는지 다 알수 있었다. 마을에는 굴이 지정되어 있어서 집집마다 옹기와 그릇을 만들어 놓으면 한꺼번에 구웠다. 집안에 따라서 대개 옹기 70~80개를 만들어 놓고 순서대로 굴을 사용했다. 가마굴 책임자를 ‘황시’라 하는데, 황시에게 물어보면 집안의 순서를 알 수 있었다. 순서란 특별하지 않고 그릇 만들기를 마치는 것이 순서다. 그릇을 많이 만들면 마을에 굴이 여러 개 있었으니까 순서대로 구웠다. 1년 내내 가마를 이용하는 사람도 있으니까 한 집에서 3~5개의 굴을 이용하기도 했다. 보통 한 굴에서 5~6일이 소요되었다.

신창현씨에 의하면 굴제를 지낼 때 굴에 그릇을 차곡차곡 쌓는 일이 끝나면 굴 입구를 막는다. 돌담으로 구멍을 막고 돌 틈은 흙으로 막는다. 연기가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마른 흙을 옆으로 놓는다. 그런 후 굴대장이 제관이 되어 굴 뒤쪽에서 제를 지내는데, 바닥에 새[띠]를 깔고 그 위에 제물을 올려놓는다. 메 3그릇·탕쉬[콩나물, 고시리], 과일·옥돔[구운 생선]·갱 3그릇·소주 3잔을 올리고 떡은 올리지 않는다. 걸명은 굴주변에 뿌린다. 제를 지낸 후에 곤밥은 일꾼들에게 주었다. 이 당시에는 보리밥 위에 메밥[쌀밥]을 조금씩 얹어 놓으면[양푼에 밥을 담음] 일꾼들이 한 숟가락씩 나눠 먹는 정도였다.

구억리에는 4·3사건 전에는 검은굴과 노랑굴이 있었는데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데 2011년 12월 14일~17까지 노랑굴 큰불때기를 통해 일반에게 공개하였다.

석요는 세계에게 유일한 돌가마이다. 특히 ‘노랑굴’이라고 하는 무시유 옹기는 희귀하여서 도자사(陶瓷史)와 미술사에서 구명되어 재평가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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