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4005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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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樂育齋址 |
영어음역 | Nagyukjae Teo |
영어의미역 | Nagyukjae Pavilion Site |
분야 | 역사/근현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터 |
지역 | 경상남도 진주시 중안동 4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김유나 |
성격 | 유적|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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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건물 건립시기/일시 | 1894년 |
소재지 주소 | 경상남도 진주시 중안동 4번지 |
[정의]
1896년 진주시 중안동에 설치되었던 근대교육기관인 낙육재(樂育齋)의 터.
[개설]
낙육재는 1721년 경상도 대구의 경상감영 내에 설치된 것이 시초로, 유능한 유생을 선발해 독서와 학술연구 등을 담당한 향교(鄕校)였다. 진주(晋州)의 선비들은 조선의 영조(英祖) 시기부터 낙육재를 자신들의 지역에도 유치할 것을 청원했다. 1896년 경상도가 남도와 북도로 나뉘고, 경상남도 감영이 진주에 들어서자 낙육재도 함께 설치되었다. 이 때 군대가 주둔했었던 토포영(討捕營) 건물을 고쳐서 학당으로 사용했으며, 낙육재의 소유이던 밀양에 있는 300석 정도의 토지를 지용(支用)으로 삼았다.
[역사]
1897년 대한제국이 선포된 이후, 진주 낙육재는 관립진주낙육학교(官立晋州樂育學敎)로 개편되었으며, 구한말 의병활동의 중심지가 되기도 했다. 진주 낙육재의 학생들은 구국의 결의를 다지기 위하여 혈서로 연판장을 작성하기도 했다.
1906년 진주에 통감부 이사청 지청을 둔 일제는 낙육재를 폐쇄했고, 공립소학교를 낙육재로 옮겨왔으나 같은 해 폐쇄했다. 1910년에 그 자리에 진주공립실업학교가 들어섰다가 1923년에는 현 진주의료원의 전신인 진주의원이 들어섰으나 2013년 5월 진주의료원은 폐원하였다.
[평가 및 의의]
낙육재는 진주에 설치된 근대적인 교육기관으로, 지역의 인재를 육성하는 것은 물론 구한말 의병활동의 중심이 되었다는 점에서 한국 근대사에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