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4009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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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茅村先生文集 |
영어음역 | Mochon Seonsaeng Munjip |
영어의미역 | Collected Works of Mochon |
분야 | 역사/근현대,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문헌/전적 |
지역 | 경상남도 진주시 가좌동 900[진주대로 501] 경상대학교 문천각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구자익 |
성격 | 시문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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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인물 | 조식(曺植)[1501~1572]|임훈(林薰)[1500-1584]|하항(河沆)[1538~1590]|조종도(趙宗道)[1537~1597]|유종지(柳宗智)[1546~1589]|노옥계(盧玉溪)[1518~1578]|강익(姜翼)[1523~1567]|최영경(崔永慶)[1529~1590]|김우옹(金宇顒)[1540~1603]|김도화(金道和)[1825~1912] |
저자 | 이정(李瀞) |
편자 | 이현구(李鉉九)|이수형(李壽瀅) |
간행자 | 이수형(李壽瀅) |
간행연도/일시 | 1901년 |
권수 | 5권 |
책수 | 1책 |
판종 | 목판본 |
가로 | 29.1㎝ |
세로 | 20.3㎝ |
장정법 | 선장(線裝) |
지질 | 닥종이 |
어미 | 상하이엽화문어미 |
광곽 | 사주단변(四周單邊) |
반곽크기(가로) | 19.2㎝ |
반곽크기(세로) | 15.8㎝ |
행수 | 10행 |
한 행의 자수 | 19자 |
주석 | 쌍행 |
표제 | 모촌선생문집 |
권수제 | 모촌선생문집 |
판심제 | 모촌선생문집 |
계선형태 | 이어진 계선 |
소장처 | 경상대학교 문천각 |
소장처 주소 | 경상남도 진주시 가좌동 900[진주대로 501] 경상대학교 문천각 |
[정의]
조선 전기의 문인 이정(李瀞)[1541~1613]의 시문집.
[가계]
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여함(汝涵), 호는 모촌(茅村). 그의 증조부는 부제학을 지낸 이중현(李仲賢)이고, 아버지는 비인현감(庇仁縣監)을 지낸 이경성(李景成)이다. 그의 아버지는 남명 조식과 자주 왕래하였으며, 만년에는 모두 진양 원당(元塘)으로 이사하였다.
모촌 이정은 모은(茅隱) 이오(李午)의 5대손인데, 모은 이오는 모촌 이정이 태어난 모곡리 입구에 있는 고려동학(高麗洞壑)이라는 비석을 세웠다. 이오는 고려가 망하자 절의를 지키기 위하여 모곡으로 내려와 터를 잡고 고려동이라고 하였다. 그는 자신이 고려의 백성임을 나타내기 위하여 동네 둘레를 토담으로 쌓고, 담 밖은 조선의 영토이지만 담 안은 고려의 백성이 사는 고려의 땅이라고 하였다. 조선 태종은 이오를 여러 번 불렀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이오는 그의 아들에게, “내가 어찌 신왕조에서 벼슬을 할 수 있겠는가. 내가 죽은 후에는 절대로 신왕조에서 주는 벼슬 이름은 사용하지 말고 내 신주도 이곳 고려동 담 안을 떠나 다른 곳으로 옮겨가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이정은 5대조 이오의 절의를 기록하여 후세에 전했다.
[생애]
모촌 이정은 1541년(중종 36) 함안 모곡에서 참판 이경성(李景成)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정은 23세(1563년, 계해) 향시에 합격하였으나 24세 때 과거에는 급제하지 못하였다. 52세(1592년 5월)에 함안에서 의병을 일으켜 항전하였다. 1613년 73세를 일기로 원당에서 세상을 떠났다.
[활동사항]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의 소모관(召募官)으로 임명되었다. 함안군수 유숭인(柳崇仁)을 도와 진해, 창원 등지의 왜적을 토벌하여 공을 세워, 사근도찰방겸함안의병장으로 임명되었다. 1594년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에 임명되고, 곧 단성현감에 임명되었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에는 의령에 침입한 왜군을 격퇴시킨 공으로 통정대부에 승진되었으며, 청주목사, 상주목사, 창원대도부사를 역임하였다. 1609년 7월에 덕천서원으로 들어가 『서원록』을 중수하였다. 함안의 도림서원(道林書院), 진주의 대각서원(大覺書院)에 제향되었다.
[편찬/발간경위]
1901년(광무 5) 후손 이현구(李鉉九)와 이수형(李壽瀅)이 편집, 간행하였다.
[구성]
김도화(金道和)의 서문이 있으며, 권1에는 시, 부 26수가 수록되어 있고, 권2에는 서 26편, 제문, 서(序)3편 잡저 3편, 가장(家狀) 3편이 수록되었다. 권3에는 연보, 권4에는 행장 등 부록문건 11편, 권5에는 다른 인사들이 쓴 만시(挽詩)등 5편이 수록되어 있다. 문집 중 서(書)의 내용 두 부분은 모두 임진왜란 때 관계되는 것들이다.
[내용]
문집 중 「여종질이백서(與宗侄而柏書)」의 별지에는 성리(性理)의 요지가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중화(中和)와 비은(費隱)은 성명(性命)의 근원을 밝힌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잡저의「군약(軍約)」은 의병을 일으킬 때 행동지침으로 금지사항을 규정한 것이다. 「전격유왜문(傳檄游倭文)」은 왜장들에게 그들의 부당한 침략을 질책한 것으로, 이웃나라의 도리를 설명하고 백성을 죽이고 궁궐에 불을 지르는 등 악독한 짓만 골라서 자행한 왜군에게 반드시 천벌이 있을 것이니 하루 바삐 회개하여, 포로들을 속히 돌려보내고 철병하여 천벌을 면하라고 하였다.
수정일 | 제목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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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7.15 | 2011년 한자 재검토 작업 | 1) 조식(曹植)[1501~1572] ->조식(曺植)[1501~1572] 2) 김우옹(金宇옹)[1540~1603] ->김우옹(金宇顒)[1540~1603] 3) 중현(仲賢)이고, 아버지는 비인현감(庇仁縣監)을 지낸 경성(景成)이다 ->이중현(李仲賢)이고, 아버지는 비인현감(庇仁縣監)을 지낸 이경성(李景成)이다 4) 모촌 이정은 1541년(중종 36년, 신축) 함안 모곡에서 참판 경성(景成)의 아들로 태어났다. ->촌 이정은 1541년(중종 36) 함안 모곡에서 참판 이경성(李景成)의 아들로 태어났다. 5) 1901년(광무5) 후손 현구(鉉九)와 수형(壽瀅)이 편집, 간행하였다. ->1901년(광무 5) 후손 이현구(李鉉九)와 이수형(李壽瀅)이 편집, 간행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