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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우당선생실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401384
한자 守愚堂先生實記
영어의미역 Records of Master Suudang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문헌/단행본
지역 경상남도 진주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최창열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집
관련인물 최영경[1529~1590]
편자 양천익(梁天翼)|정영훈(鄭英壎)|김원적(金源積)
번역자 최인찬
편찬연도/일시 1700년(숙종 26)연표보기
간행연도/일시 1987년[번역본]연표보기
책수 1책
완전성 완전본
판종 목판본(後刷)
가로 34㎝
세로 33.2㎝
어미 상화문어미(上花紋魚尾)
광곽 사주단변(四周單邊)
반곽크기(가로) 반엽광곽(半葉匡郭) 22.4㎝
반곽크기(세로) 반엽광곽(半葉匡郭) 17.3㎝
행수 10행
한 행의 자수 19자
표제 守愚堂實記(수우당실기)
권수제 수우당실기(守愚堂實記)
판심제 수우당실기(守愚堂實記)
간행처 진양인쇄사[번역본]
소장처 국립중앙도서관|고려대학교

[정의]

조선 중기의 학자 최영경(崔永慶)[1529~1590]에 관한 사실을 모아 편찬한 실기(實記).

[간행경위]

1700년(숙종 26)에 양천익(梁天翼)이 수우당 최영경에 관한 사실을 모아 정리하여 펴낸 책이다.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고제(高弟)인 최영경이 기축옥사(己丑獄事)에 무고(誣告)되어 옥사한 이후 100여년이 지난 후 선생의 증손 최정석(崔廷奭)이 수우당 선생의 글들이 참화와 병란에 모두 소실되고 인몰(湮沒)되어 가는 것을 안타까워하여 양천익에게 부탁하여 시문(詩文) 약간 편과 제현(諸賢)의 서술을 수습하였고, 이를 정리하여 2권의 책을 만들어 간행하였다.

이후 200여년이 지난 1935년 사손(祀孫)들이 힘을 합쳐 중간을 의논하여 정영훈(鄭英壎), 김원적(金源積) 등에게 부탁하여 『은대록(銀臺錄)』, 『승정원일기』 및 선유(先儒)들의 문집 등에서 수우당에 관한 사실을 모아 5권 2책으로 간행하였다. 1987년에는 수우당 선생의 후손들이 오늘날의 한글세대들도 친숙하게 읽고, 선생의 유지(遺志)를 이어받도록 하기 위하여 초간본의 원문과 한글 역본을 병기하여 다시 간행하였다.

[서지적 상황]

초간본인 목활자본은 현재 덕천서원, 국립중앙도서관, 고려대학교 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으며, 재간본은 영남유림을 중심으로 각 문중에 반질(頒帙)되었다. 본서의 저본은 1935년 간행된 중간본과 1987년에 한글역본으로 재간된 것으로 덕천서원 및 후손이 소장하고 있는 것이다.

[구성]

책머리에 선조가 내린 사제문(賜祭文) 1편이 있으며, 권1은 시(詩) 7수, 소(疏) 1편, 공사(供辭) 2편, 서(書) 5편, 제문 2편이 실려 있으며, 권2~5는 부록으로 유사실록(遺事實錄), 척록, 옥중기적(獄中記蹟), 계(啓), 신리소(伸理疏), 봉안문, 전지(傳旨), 행록, 행장, 묘갈명, 묘지명 등이 수록되어 있다.

[내용]

최영경 선생의 생애를 진주와 관련해서 살펴보면, 39세 때 당시 서울에 살던 최영경남명 조식의 명망을 듣고 지리산 밑 산천재로 찾아가 스스로 제자가 되기를 청하여 조식을 스승으로 섬기다가 마침내 47세 때인 1575년 4월 진주로 내려왔으나, 남명은 이미 돌아가신 뒤였다. 최영경이 진주로 내려오게 된 것은 당시 조정에서 동서 분당의 기미가 있어 조용한 곳을 찾아 숨어살고자 하는 뜻이 있어서였는데, 진주에는 조상의 전답이 있고 아우 천민당(天民堂) 최여경(崔餘慶)이 먼저 내려와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주로 내려온 후 도동의 만죽산(萬竹山)[지금의 선학산]기슭, 한적하고 전망이 좋은 대나무 숲 가운데 집을 지어 수우당(守愚堂)이라 명하고, 그곳에서 심성을 수양하였다. 이때 최영경은 덕계 오건, 동강 김우옹, 한강 정구, 황암 박제인, 대소헌 조종도, 각재 하항남명의 문인들과 사귀면서 학문에만 힘을 쏟았다.

최영경의 나이 62세 때인 1589년 10월에 정여립 모반 사건인 기축옥사(己丑獄事)가 발생하자 최영경은 이 사건의 주모자 길삼봉(吉三峯)으로 몰려 선조 23년(1590) 아우 천민당(天民堂) 여경(餘慶)과 함께 진주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 후 서울로 압송되어 국문을 당하면서 갖은 곤욕을 겪다 1590년 62세로 별세하였다.

1594년 신원되어 대사헌(大司憲)으로 추증되었으며 선조는 예관을 보내 제문을 내려서 그의 충절을 기렸으며, 광해 3년(1611)에 덕천서원에 배향되었다. 그 후 영남의 유림들이 1918년에 존덕사(尊德祠)와 수정당(守正堂)을 세워 위패를 모셨으며, 다시 1936년에 옛 만죽당(萬竹堂) 자리에 도강서당을 세우고, 1984년 청풍사(淸風祠)를 지어 매년 음력 4월 15일이면 인근의 유림들이 모여 수우당의 덕망을 추모하는 석채례(釋菜禮: 1년에 한 번, 봄 철 새로 나는 나물과 생야채로 스승에게 제를 지내는 의식으로, 전국에 흩어진 제자들이 모여 스승의 업적과 덕을 기리고 학통을 이어가는 유학의 독특한 전통)를 올리고 있다.

지금 현재 진주시청사 뒤편 선학산 기슭에 있는 도강서당(道江書堂)에는 선조임금 사제문비(賜祭文碑 : 수우당최선생유허비)가 있다. 1594년 선조최영경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내린 글을 이 비석에 새겨 놓았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1.07.18 2011년 한자 재검토 작업 아우 천민당(天民堂) 여경(餘慶)이 먼저 내려와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우 천민당(天民堂) 최여경(崔餘慶)이 먼저 내려와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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