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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계춘 묘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401665
한자 柳繼春墓
영어음역 Yu Gyechun Myo
영어의미역 Tomb of Yu Gyechun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능묘
지역 경상남도 진주시 수곡면 원당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강명화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건립시기/연도 조선 후기
관련인물 유계춘(柳繼春)
비문찬자 정동주
비문서자 윤효석
소재지 주소 경상남도 진주시 수곡면 원당리 산 중턱

[정의]

조선 후기의 진주농민항쟁을 이끈 유계춘(柳繼春)[?~1862]의 묘.

[개설]

유계춘은 경상남도 진주시 원당면(元堂面) 원당촌(元堂村) 출생이다. 그는 환곡(還穀), 포흠(逋欠) 등 각종 폐단을 지적하며, 1862년 대대적인 농민항쟁을 일으켰다. 유계춘이 이끈 농민군은 수만 명으로 불어났고, 농민을 수탈하던 향리 4명이 죽고, 수십 명이 부상하고, 아전이나 부호의 집이 불탄 것이 126호, 재산을 빼앗은 것이 118호였다.

조정에서 파견한 안핵사 박규수(朴珪壽)는 현지에 도착해 주동자를 모두 체포했다. 이에 유계춘은 김수만(金守萬)·이귀재(李貴才)와 함께 효수형(梟首刑)에 처해졌다.

[위치]

경상남도 진주시 수곡면 원당리 산 중턱에 위치하고 있다.

[현황]

유계춘의 묘소 옆에, 2006년에 그를 기리는 비석이 세워졌다. 그가 죽은 지 144년만의 일이다.

[금석문]

비문은 정동주가 짓고 윤효석이 글씨를 썼다. 비문에는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다. "선생의 시대에는 국가재정의 근본인 삼정이 문란하여 농민의 고통이 하늘에 사무쳤다. 선생은 농민이 겪는 참혹한 수난을 바라볼 수만 없어 그들의 억울함과 슬픔을 덜어주기 위하여 농민과 한 몸이 되고자 했고 이는 시대의 부름이기도 했다. (… …) 농민들은 선생의 절규를 알아듣고는 마침내 오래 억눌려온 분노의 함성을 터뜨렸다. 그 함성은 해묵은 모순 덩어리를 깨뜨리는 천둥이 되어 진주 산하를 뒤흔들고 그 메아리는 온 나라로 퍼져 울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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