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4025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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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衡平社 |
영어의미역 | Social Equality Society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경상남도 진주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형목 |
[정의]
1923년 4월 경상남도 진주 지역에서 설립된 백정 신분 해방 운동 단체.
[개설]
백정은 도살업·제혁(製革)·유세공(柳細工) 등에 종사하는 천민층으로 주로 삼남일대에 많이 거주하였다. 갑오개혁의 중요한 성과는 법제적으로 이들에 대한 신분제 해방을 가져왔다. 그런데 강고한 인습에 따른 이들에 대한 차별대우는 잔존하는 등 이러한 의미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도수규칙(屠獸規則)」 제정 등 각종 부가세는 이들에 대한 경제적인 수탈로 이어졌다. 더욱이 일제는 민족구성원간 갈등·대립을 부추기거나 호적대장에 붉은 글씨인 도한(屠漢)으로 기록하는 등 백정들에 대한 차별대우를 잔존시켰다. 자제들 입학원서나 관공서에 제출하는 서류 등에도 반드시 신분 기록을 규정하였다. 이에 1923년 4월 24일 백정 출신 장지필(張志弼)·이학찬(李學贊)·천석구(千錫九)와 진주 지역 사회운동가인 신현수(申鉉壽)·강상호(姜相鎬)·이봉기(李鳳基) 등 70여 명은 진주시 대안동 진주청년회관에서 발기회를 개최함으로써 본격적인 신분해방에 착수하였다.
[설립목적]
계급을 타파하고 백정에 대한 모욕적인 칭호를 폐지하며 교육을 장려하여 백정도 참다운 인간이 되게 한다는 것이 설립 목적이었다.
[변천]
형평사 창립 당시 임원진은 위원으로 강상호·신현수·천석구·장지필·이학찬, 간사로 하석금(河石金)·박호득(朴好得), 이사 하윤조(河允祚)·이두지(李斗只)·하경숙(河景淑)·최명오(崔明五)·유억만(劉億萬)·이봉기 등, 재무 정찬조(鄭贊祚), 서기 장지문(張志文) 등이었다. 창립 10개월만에 지사 12개와 분사 67개소나 설립되는 등 사회적인 이목을 받았다.
이듬해 2월 부산에서 개최된 전국임시총회를 기점으로 운영노선을 둘러싼 갈등은 표출되었다. 경상도를 기반으로 활동하던 강상호·신현수 등은 본사를 진주에 둘 것과 충청·강원·전라도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장지필·오성환(吳成煥) 등(혁신파)은 서울로 본사를 이전할 것을 두고 대립하였다. 이른바 혁신파는 형평사 혁신동맹위원회를 조직하는 한편 혁신동맹창립총회도 개최하는 등 자파 세력확산에 노력을 기울였다. 8월 15일 대전에서 개최된 형평사통일대회는 조선형평사중앙본부를 서울에 두기로 결정했다. 이후 앙파간 갈등은 증폭되는 가운데 1926년으로 기점으로 혁신파에 의하여 운영은 장악되었다.
1931년 형평사 해소논쟁과 1933년 전위동맹사건은 형평사 활동을 위축시키는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1935년 중앙기독교 청년회 강당에서 개최된 제13회 정기총회는 대동사로 명칭 변경을 결정하였다. 이는 단순한 명칭 변경에 그치지 않고 민족해방운동 전선에서 일탈을 의미한다. 1938년 7월 비행기 ‘대동호’ 헌납식이나 기관총 대금 헌금 등은 일제의 침략전쟁에 동조하는 양상이었다.
[활동사항]
주요 활동은 사회적인 관심을 촉발시키는데 중점을 두었다. 초기 임원진은 백정 거주지역을 방문하여 취지를 설명하는 한편 동참을 촉구하고 나섰다. 취지문과 안내문 수천 장을 인쇄·배포하는가 하며 각 언론 보도를 교섭하는 등 홍보활동에 치중하였다. 또한 사원들에게 자긍심 고취와 동조적인 세력 확대에도 노력했다. 창립 3주만에 거행된 형평사창립축하식은 대표적인 경우이다.
창립축하식에는 각지 백정 대표 300여 명이나 참석하는 등 성황을 이루었다. 중앙본부인 본사에 서무부, 외교부, 재무부, 교육부, 정행부(正行部) 설치도 이러한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진주노동공제회·북성회(北星會)·청년단체 등과 일본 수평사(水平社)와 연대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조선청년총동맹 가입은 형평사의 사회적인 인식이나 민족해방운동사상 위상을 반증한다. 지사나 분사의 외곽단체로서 조직된 형평청년회·형평학우회는 형평사 운영에 윤활유나 다름없었다.
자제 교육이나 사원 교양 함양을 위한 야학·강습소 운영과 잡지 『정진』 발간 등도 주요한 활동 중 하나였다. 이리하여 형평사는 전국적인 조직망을 갖춘 사회단체로서 발전을 거듭할 수 있었다.
[의의와 평가]
사회적으로 차별받는 백정에 대한 신분해방을 목적으로 출발한 형평사는 시대변화에 따라 운동노선도 변화하였다. 초기 사원 교양함양이나 자제교육 등에 치중된 계몽운동에서 점차 벗어나 적극적인 항일운동을 모색하고 나섰다. 각종 파업·소작쟁의 등의 동참은 사회단체와 연대를 통한 실천적인 민족해방운동으로 전환을 초래하였다. 1927년 고려혁명당사건은 형평사의 위상을 재점하는 계기였다. 1930년대 해소론과 대동사 전환 이전까지 형평사는 백정의 사회적인 위상을 제고시키는 동시에 민족해방운동의 일익을 담당하는 사회단체로서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