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4031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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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河仁壽 |
영어음역 | Ha Insu |
이칭/별칭 | 천지(千之),이곡(梨谷) |
분야 | 종교/유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효자·열녀 |
지역 | 경상남도 진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한중기 |
[정의]
조선 중기의 효자·유림.
[가계]
본관은 진주. 자는 천지(千之), 호는 이곡(梨谷). 월촌(月村) 하달홍(河達弘)의 아들이다.
[생애]
『진양속지(晋陽續誌)』권3「효행조(孝行條)」에 하인수의 효행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타고난 인품이 순수하고 행동거지가 단정했으며 효심 또한 지극하고 학문의 깊이도 매우 뛰어났다. 어릴 적부터 필법이 출중했으며, 한결 같이 어버이의 뜻에 순응하여 털끝만큼도 어김없었다. 평생을 효행 실천과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학덕을 가르치는 데 보냈다. 7살에 어머니상을 당했는데, 어찌나 곡을 오래도록 했는지 피눈물이 옷깃을 적시었다. 아버지가 만년에 마음의 병이 들어 가르치고 명령하는 것이 엉뚱한 것이었지만, 자식 된 도리로 한결 같이 순응했다. 담장이 이러진 데가 없는데도 고쳐라 하면 즉시 고쳤고, 경지(經旨)나 문의(文義)에 이르기까지 오직 아버지의 가르침대로 따랐다. 혹 남들이 힐난하면 “아버지의 가르침을 어찌 감히 고치는가”라고 하였다. 이같이 하기를 수년 동안 했으나 아버지의 병은 약으로도 소용이 없었다. 하인수의 극진한 효행이 알려지자 원근의 선비들이 추거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하인수가 세상을 떠나자 노백헌(老伯軒) 정재규(鄭載圭)는 “효양(孝養)에 어김이 없는 것은 증씨(曾氏: 증자)의 뜻이었고, 시명(詩名)은 또 종문(宗文)의 집에 있었구나”라고 시로써 곡을 했다.
또한 당시 선비들이 남명 선생의 「학기(學記)」 및 「신명사도(神明舍圖)」를 바르게 배우고자 하니 자신이 직접 자세하게 조사하여 처치했다. 이후 남명 선생의 본뜻을 천명하고 항상 산천재에 머물면서 학문을 가르쳤다.
[저술]
『역설(易說)』과 『성리설(性理說)』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