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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403222
한자 晋州-洑-灌漑施設
영어의미역 Reservoirs and Irrigation Facilities of Jinju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남도 진주시
집필자 이전

[정의]

진주지역의 농업 생산량을 높이기 위해 물을 공급하는 시설.

[개관]

조선시대에는 덕천강 유역에서 수전농업(水田農業)이 크게 발달하였다. 적어도 덕천강 유역의 농업지대는 진주지방에서는 가장 큰 규모였을 것이다. 그래서 진주지방을 중심으로 전개된 역사적 사건과 활동을 해석하는 데 덕천강 유역의 수전농업에 대한 연구가 매우 중요하다고 하겠다. 조선 초기에 남명 조식(曺植)덕천강 상류 덕산에 정착할 바로 그 무렵에 보의 관개체계가 이 지역에 확산되고 있었다. 또한 진주농민항쟁이 덕천강 유역에서 시작된 것도 덕천강 유역의 수전농업과 깊은 연관성을 갖고 있는 것으로 판단되었다. 조선 전기의 수전농업은 광활한 평야지대에서 발달하지 않고 흔히 산간지방의 골짜기를 중심으로 발달하는데, 덕천강 유역은 이러한 사례 중에서도 매우 전형적인 지역에 속한다.

[조선시대 수전농업 일반]

조선시대에 들어오면 수전농업의 발달에 따라서 휴경법(休耕法)이 극복되고 연작법(連作法)이 보급됨으로써, 농업활동의 터전이 구릉지대나 산사면 지대에서 점차 하천을 끼고 있는 저지대로 옮겨가게 된다. 조선 세종 11년(1429)에 간행된 『농사직설』은 연작법의 성립을 직접 말해주고 있다.

하천에 인접한 저지대는 비교적 넓은 평지와 많은 양의 관개용수를 확보하기에 용이한 이점을 구비하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저지를 개간하기 위해서는 하천의 범람을 조절하면서 관개를 할 수 있는 농경기술을 확보해야 하고, 그러한 기술을 가동할 수 있는 사회조직의 변화를 수반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수전농업은 한강·낙동강·금강·영산강 등 대규모 하천 유역보다는 개간이 비교적 용이한 소규모 하천 유역에서 보다 일찍 발달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하천수를 이용한 관개체계에 대한 관심은 고대로부터 있었으나, 고려 말 혹은 조선 초에 들어와서야 하천수를 본격적으로 관개용수로 이용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이 당시에 먼저 관심을 기울인 것은 보(洑), 즉 천방(川防) 관개체계 개발이 아니라 수차(水車)를 통한 관개체계 개발이었다. 수차를 개발하여 수전농업의 관개에 실용적으로 사용하려는 노력이 실패로 돌아가자, 조선 문종 때부터 보(천방) 개발이 적극적으로 권장되기에 이르렀다. 그 이후 보(천방) 관개체계는 16세기에 실용적인 궤도에 오르게 된다. 16세기에 개발된 보(천방) 관개체계는 바로 당시 수리상의 제약을 타개하는 의미를 가진다.

우리나라에서 하천수를 이용한 수전농업은 영남지방의 소규모 하천 유역에서 가장 먼저 발달하였다. 『여지도서(輿地圖書)』(1760경), 『만기요람(萬機要覽)』(1808), 『대동지지(大東地誌)』(1864), 『조선지지(朝鮮地誌)』(1918)에는 보의 수가 기록되어 있는데, 영남지방 보의 수는 전국의 각각 96/119(81%), 1765/2691(66%), 1339/2126(63%), 1081/7337 (42%)를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여지도서』에 실린 제언(堤堰) 중에서 수심이 6척 이상 되는 제언은 총 570개인데, 이 중 401개가 영남지방에 있었다. 우리나라 보와 제언의 수에서 영남지방이 차지하는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은 것은 수전농업이 영남지방의 소규모 하천 유역에서 먼저 발달한 사실과 밀접하게 관련이 될 것이다.

또한 조선 초기에 영남지방의 일부 지역에서 이앙법(移秧法)이 실시되다가 17세기 이후에는 이앙법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미곡 수확량이 대폭적으로 증대되었다. 조선 초기에 이앙법이 국가의 농정상 억제되었다든지 혹은 이앙법이 영남지방에 한정되었던 것은 당시에 수리(水利)의 안정도가 낮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영남지방 내에서는 특히 진주지방에서 수전농업이 일찍부터 발달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여지도서』에서는 진주지방 수전(水田)의 결수는 경상도 전체로 보아 가장 넓은 면적으로, 비옥도뿐만 아니라 미곡의 총생산량도 단연 앞서고 있음을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이중환(李重煥)의 『택리지(擇里志)』에서도 진주지방이 남원·구례·성주와 더불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수확량이 높은 비옥한 지방으로 꼽히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시사하고 있다.

[지리산과 진주를 연결하는 덕천강]

덕천강은 지리산의 남동 사면에서 발원하여 진주에 이르러 남강(南江)의 본류와 합류하는 하천이다. 지리산 천왕봉(天王峯)에서 남서 방향으로 뻗은 수많은 계곡을 따라 흐르는 소규모 하천들은 산청군 시천면 원리, 일명 덕산(德山)에서 합류하여 덕천강을 이룬다. 이 덕천강은 산청군 시천면과 단성면, 하동군 옥종면, 진주시 수곡면, 사천군 곤명면, 진주시 내동면 등을 통과하여 진양호로 유입된다.

덕천강 유역의 저지대에서는 조선시대부터 보(천방) 관개체계가 발달하였고, 이에 의존하여 수전농업이 발달하였다. 오늘날 덕천강 유역의 농경지는 다른 대규모 하천 유역의 농경지에 비하여 규모가 작지만, 조선시대에는 덕천강 유역에서 발달한 수전농업의 규모가 경상남도 서부지역의 다른 어느 지역에 비하여 앞서는 것으로 추정된다. 진주지방에서는 덕천강 유역의 수전농업이 가장 큰 규모였다고 판단된다. 수전농업의 발달로 인하여 농업생산력이 증대됨으로써 덕천강 유역은 진주지방에서 중요하고 역동적인 인간 활동의 무대가 되었다.

조선시대에 진주 영역은 오늘날의 통합 진주시(구 진주시와 구 진양군이 1995년에 통합한 시) 영역보다 훨씬 광대한 것이었다. 조선시대에 진주목 자체의 강역은 서쪽으로 섬진강에 접하고 있었고, 북쪽으로는 천왕봉에 이어지는 능선을 따라 현재의 함양군 미천면 및 산청군 금서면과 접하고 있었다. 그리고 동쪽으로 창원군 진전면의 일부 지역까지 미치고 있었고, 남쪽으로는 사천군 축동면, 구 삼천포시의 일부 지역과 남해군 창선면까지 포함하고 있었다.

조선시대의 진주 영역에서 주요한 역사적 사건이나 활동이 덕천강 유역을 중심으로 자주 일어났는데, 이러한 덕천강 유역에서 일어났던 역사적 사건이나 활동은 덕천강 유역의 농업활동이나 농업생산력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이중환의 『택리지』는 진주와 지리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농업생산성이 높은 비옥한 곳으로 기술하고 있다.

진주 : 진주는 지리산 동쪽에 있는 큰 도읍이며, 높은 문무관이 많이 나온 도읍이다. 토지가 비옥할 뿐만 아니라 강산의 경치도 좋아 사대부들은 넉넉한 살림을 자랑하고 주택과 정자 꾸미기를 좋아한다. 비록 사대부가 벼슬을 하지 못하여도 한유(閑遊)하는 공자(公子)라고 칭한다(晋州 在智理東 爲大邑 多出將相之才 土肥而且有江山之槪. 士大夫 誇富豪 喜治第宅亭臺 雖祠之 不仕宦 有遊閑公子之名).

지리산 : 지리산은 남해 가에 있는데, 이는 백두산의 큰 줄기가 다한 곳이다. 그래서 일명 두류산이라고도 한다. (중략) 이런 까닭으로 온산이 풍년과 흉년을 모르고 지내므로 부산(富山)이라 부른다(智異山 在南海上 是爲白頭之大盡脈 故一名頭流山(중략). 是以一山 不知歲年豊凶 故號爲富山).

덕천강 유역은 지리산지에 속하면서도 진주에 속하는 지역이다. 그러므로 이중환의 『택리지』에서 덕천강 유역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비옥한 지역 중의 하나로 꼽히고 있는 셈이다.

[조선시대 덕천강 유역의 수전농업]

15세기에 간행된 『경상도지리지』(1425)와 『경상도속찬지리지』(1469)에서는 진주목의 제언(堤堰)에 대한 기록은 있지만, 보(천방)에 대한 기록은 없다. 이것은 그때까지 보(천방)의 관개체계가 발달하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또한 중종 25년(1530)에 간행된 『신동국여지승람』에서도 진주목의 산천·토산·성곽·관방·봉수·풍속 등에 대한 기록은 있으나, 관개체계에 대한 기록은 나타나지 않는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 16세기 중엽까지 진주지방에서 보의 관개체계가 본격적으로 발달하지 않았을 것이다.

『진양지』관개조(灌漑條)에서는 25개의 보를 기록하고 있으므로 17세기 초에 이미 진주지방에서는 보의 관개체계가 보편화되었음을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진양지』성여신(成汝信)[1546~1632] 등 몇 사람에 의해 조선 광해군 14년(1622)에 시작하여 인조 10년(1632)에 완성된 것인데, 원래의 필사본은 오늘에 전해지지 않고 다소 증보된 필사본이 현재까지 남아 있다. 이에 의하면, 덕천강 유역에 거주하던 참봉 조정(趙程)이 농민들과 함께 명월암(明月岩) 옆을 뚫어 물길을 내고, 다회탄(多會灘)[현재의 덕천강을 말함]을 막아 명월암방천(明月岩防川)을 만들고, 그 물을 원당촌 앞의 넓은 평야에 관개할 수 있도록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하여 17세기 초에 보 관개체계를 이용한 수전농업이 덕천강 유역에서 확대되어갔음을 알 수 있다.

1832년(순조 32)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되는 『경상도읍지』에는 진주지방 보의 이름과 규모, 그리고 위치가 기록되어 있다. 『경상도읍지』에 기록되어 있는 진주지방의 보는 총 18개인데, 이 중 8개가 덕천강 유역에 위치하고 있다. 나머지 10개 중 9개는 영천강(永川江) 유역에 위치하고 있고, 1개만이 덕천강 유역이나 영천강 유역에 위치하고 있지 않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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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1]

그러므로 『경상도읍지』에 의하면, 덕천강 유역은 영천강 유역과 더불어 진주지방에서 수전농업이 크게 발달하였던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진양지』관개조에 기록된 25개의 보 중에도 8개의 보가 영천강 유역에 위치하고 있다. 이는 영천강 유역에서도 덕천강 유역과 더불어 일찍부터 수전농업이 발달하였음을 시사해주고 있다.

[덕천강 유역의 덕산에 자리잡은 남명 조식]

『경상도읍지』에는 또한 진주목 내에 장시(場市)가 번성하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진주관아 근처의 읍장을 제외하고 12개의 장이 서고 있었고, 그 중 3개의 장시, 즉 덕산장(德山場)·문암장(文岩場)·수곡장(水谷場)이 덕천강 유역에 입지하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특히 수곡장은 규모가 매우 큰 것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은 덕천강 유역이 많은 인구의 활동 무대였음을 시사하는 것이고, 덕천강 유역의 농업생산성이 매우 높았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하는 것이다.

남명 조식[1501~1572년]이 덕천강 상류의 덕산에 정착하였던 사실이 덕천강 유역의 수전농업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조선시대에 경상우도 사족들의 이데올로기를 구축한 대표적인 사람이 남명 조식이었다. 남명은 조선조 성리학의 전성기인 명종~선조 시대에 퇴계(退溪)와 더불어 영남 성리학의 양대 산맥을 이룬 학자였다. 남명의 문인들은 동서남북 분당 이후 주로 정인홍(鄭仁弘)의 주도하에 있던 북인계열에 속하였고, 북인세력은 임진왜란 이후에 서서히 중앙정계를 장악하여 광해군대에는 다른 정치세력을 압도하였다. 그런데 남명이 정착한 곳이 바로 덕천강 상류에 해당하는 덕산이었고, 남명 사후 경상우도 사림들이 남명의 학맥을 이어가기 위해 덕천서원(德川書院)을 건립한 곳도 덕산이었다.

남명 조식이 왜 하필이면 덕천강 상류의 덕산에 정착하였는가? 흔히 이에 대해서 덕산 일대는 속세를 떠나 은둔하여 생활할 수 있는 분지(盆地)이기 때문에 남명 조식이 정착하였다든지, 남명 조식이 풍수지리설에 입각하여 명당(明堂)을 찾아서 정착하였다든지, 혹은 남명 조식이 유학에서 권장하는 계거(溪居)를 선택하였다고 해석한다. 이러한 해석은 고문헌에 기초를 둔 것이고 잘못된 해석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남명 조식이 활동하던 당시의 농업기술 수준과 당시의 사회조직면에서 볼 때, 덕산은 보의 관개체계를 이용하는 수전농업에 매우 적합한 자연환경 조건을 갖추고 있던 지역이라는 사실이 간과되고 있다.

남명 조식이 수전농업에 적합한 덕산에 정착하였다는 문헌자료는 발견되지 않는다. 또한 남명 조식이 직접적으로 보(천방) 관개체계 개간에 관여하였다는 기록을 발견할 수도 없다. 그렇지만 남명 조식이 덕산에 입지한 것이 경제적 활동, 특히 농경활동과 전혀 무관하였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남명 조식이 덕산에 정착할 무렵에는 영남지방에서 보(천방)의 관개체계 개간이 매우 활발하게 일어난 시기였고, 특히 덕산 일대는 보(천방)의 관개체계를 개간하기에는 최적의 자연환경을 갖춘 지역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남명 조식이 덕천에 입지한 것이 농경활동과 전혀 무관하였다고는 단언할 수는 없는 것이다. 남명 조식은 당시의 관점에서 농경활동에 매우 적합한 자연환경을 갖춘 지역이면서도 경개가 빼어난 곳을 찾아서 정착하였음은 틀림없다.

사실, 이태진 교수도 16세기에 있어서 사림계(士林系)의 활동과 보(천방)의 개발과 같은 경제활동이 매우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을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래서 이태진 교수는 향약류의 보급을 추구하던 인물들이 보(천방) 개발에 직접 관여한 사실이 있음을 지적하면서 사림계는 16세기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새로운 움직임으로 서원(書院) 건립활동을 펼치게 되는데, 이러한 일이 경제적 뒷받침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라고 한다면, 보(천방)의 개발과 같은 것이 바로 그것을 가능하게 한 지방 중소 지주층 경제력 신장의 구체적인 면모로 들어져야 할 것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덕천강 유역에서 시작한 진주농민항쟁]

조선 후기 소규모의 민란이 거의 쉴 새 없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는데, 그 중에서도 철종 13년(1862)에 일어난 진주농민항쟁은 가장 두드러진 것이었다. 진주농민항쟁은 진주지방의 농민들이 들고 일어나 진주읍내에 진입해 진주목사 홍병원(洪炳遠)과 병사 백낙신(白樂莘)으로부터 도결(都結 : 세금을 정해진 이상으로 징수하던 일)과 통환(統還 : 통을 단위로 환곡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던 일)을 실시하지 않겠다는 완문(完文)을 받아내고, 각종 수탈에 앞장섰던 목과 병영의 수리(首吏)들 몇 명을 타살하여 불태우고, 일부 상인 부호가들의 집을 파괴한 사건이었다.

진주농민항쟁의 지도자적 역할을 수행한 사람은 잔반(殘班) 출신 농민 유계춘(柳繼春)[1815?~1862]이었다. 유계춘은 조계(潮溪) 유종지(柳宗智)의 자손으로서 본래 진주 원당면 원당촌(元堂村) 출신이었는데, 그가 35세 되던 해(1850년경)에 어머니를 따라 원당에서 가까운 축곡면 내평촌으로 이거하였다. 진주농민항쟁에 관한 시발적 논의는 유계춘이 거주하던 축곡에서 몇 차례의 회합을 통하여 진전되었다. 항쟁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과정을 보면, 먼저 마동(馬洞)과 원당면의 농민들은 제1차 집회가 열렸던 수곡장을 장악하였고, 백곡면과 금만면의 농민들은 서쪽 변경지역인 삼장과 시천 등지를 옮겨 다니면서 세력을 규합하여 제2차 집회가 열렸던 덕산장(德山場)을 공격하였다.

그런데 진주농민항쟁의 초기 활동과 관련되는 위의 지명을 『경상도읍지』와 『여지도서』에 실려 있는 고지도와 일제강점기 때 제작된 지형도를 통하여 고찰하면 모두 덕천강 유역에 입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진주농민항쟁의 초기 활동 중심지는 덕천강 유역이었음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덕천강 유역에서 시작된 진주농민항쟁의 전개과정을 좀 더 살펴보면, 농민들이 덕천강을 따라 행진하면서 인근 면리의 부호가를 공격하는 한편, 농민들을 규합하여 읍내 공격을 감행하였다.

그러면 진주농민항쟁이 왜 하필이면 덕천강 유역에서 시작되어 농민들이 덕천강을 끼고 행진하면서 세력을 규합하여 진주에 이르렀는가? 이에 대해서 향토사학자들은 덕천강 유역의 주민들이 다른 지역 주민들보다 기질면에서 보다 저항적이었다든지, 덕천강 유역의 사족들이 진주지방에서 비교적 소외되면서 불만이 클 수밖에 없어서 농민들을 규합하게 되었다든지, 혹은 덕산이 분지였기 때문에 농민군을 진압하기가 어려웠다고 해석한다. 그런데 이러한 해석들은 문제의 본질에서 벗어난다. 진주농민항쟁이 일어날 당시에 덕천강 유역은 수전농업이 매우 발달하였던 지역이었고, 따라서 관개 및 치수사업에 필요한 노동력 동원을 위해서 농민들을 결속하는 사회조직이 어떠한 형태이든 다른 지역보다 발달하였던 지역이었다. 다시 말해, 조선시대에 덕천강 유역은 진주지방의 핵심적 농업지역이었다. 진주농민항쟁은 진주지방의 핵심적 농업지역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진주농민항쟁 과정을 좀 더 고찰해보면, 농민군들은 읍내 공격을 끝마치고 항쟁을 외촌으로 확대시켜나간다. 이때 농민군들의 주력부대는 진주의 동남쪽으로 진출하여 영천강 유역을 따라 전진하고, 마침내 영천강 상류의 옥천사(玉泉寺)에 이르는 것을 알 수 있다. 진주농민항쟁에 참여한 농민군들의 주력부대가 진주지방에서 가장 중요한 수전농업지대인 덕천강 유역에서 출발하여 진주읍내를 공격한 다음, 영천강 유역을 따라 이동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당시에는 영천강 유역도 덕천강 유역과 더불어 진주지방에서 매우 주요한 수전농업지대였던 것이다.

덕천강 유역에서는 16세기 중엽부터 보의 관개체계가 발달하였고, 이에 따라 19세기까지 덕천강 유역은 진주지방에서는 매우 중요한 농업지대였다. 진주농민항쟁이 왜 하필이면 덕천강 유역에서 시작되어 농민들이 덕천강을 끼고 행진하면서 세력을 규합하여 진주에 이르렀는가? 조선시대에 덕천강 유역은 진주지방의 핵심적 농업 지역이었다. 진주농민항쟁은 진주지방의 핵심적 농업지역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근래의 덕천강 유역 수전농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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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2]

1910년대에 제작된 1:50,000 지형도를 통하여 덕천강 유역의 토지용도를 조사해보면, 그 무렵 덕천강 유역의 대부분의 저지가 논으로 표시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1927년에 편찬된 『경남산업(慶南産業)』에는 남강 하류와 낙동강 본류를 낀 지역의 수리조합은 소개되고 있지만, 덕천강 유역에서는 수리조합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일제강점기 동안에 산미증식계획(産米增殖計劃)에 따라 전국에서 미작지가 확장되지만, 덕천강 유역에서는 경지 개간이 대규모로 진행되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덕천강 유역의 수전농업은 오늘날에도 보의 관개체계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데, 1994년 현재 필자가 직접 확인한 보의 수는 25개에 이른다. 덕천강으로 흘러드는 소규모 지류에 축조된 보의 수를 합치면 덕천강 유역에 입지하는 보의 수는 이보다 훨씬 많아진다. 오늘날 덕천강 유역과 그 지류에 축조된 보의 대부분은 1960년대 후반이나 1970년대 초에 기존의 보를 보강하여 축조된 것이고, 일부 보는 그 무렵 새로 설계되어 축조된 것이다.

기존의 재래식 보는 하천에 적당한 간격마다 말목을 박아 통나무를 가로질러 말목에 기대어 놓고 돌이나 솔가지 등으로 수심을 높이는 식이었다. 이러한 재래식 보는 홍수가 날 때마다 쉽게 유실되어 다시 쌓아야만 되었다. 그러나 근래의 보는 콘크리이트 구조물로 되어 있어 쉽게 유실되지 않는다. 그래서 보는 반영구적인 구조물로 자리잡게 되었다.

더구나 1970년대와 1980년대에 덕천강 유역에서는 대규모의 경지정리가 이루어졌고, 하천을 따라서 제방이 새롭게 단장되었으며, 여러 곳에 양수시설과 배수시설이 갖추어졌다. 그러므로 덕천강 유역의 수전농업은 홍수나 한발에 대한 대처 능력이 보다 강해서 안정적인 농업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덕천강 유역의 저지대가 대규모 하천의 범람원이나 서해안의 평야지대에 비하여 협소하기 때문에 농경지의 개간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인근에 대도시나 공업단지가 발달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덕천강 유역은 오늘날 매우 낙후한 지역으로 밀려났다. 1969년에 남강댐이 준공되어 진양호가 형성됨으로써, 즉 지역 중심지인 진주 시내로 통하는 길이 우회적으로 뚫리게 됨으로써 덕천강 유역은 진주 중심부에서조차도 비교적 거리가 먼 지역으로 낙후된 셈이었다. 오늘날 덕천강 유역의 농경지 규모는 남강 하류의 농경지 규모에 비하여 훨씬 뒤지고 있으며, 더욱이 덕천강 유역의 평야는 낙동강·한강·금강·영산강 등의 대규모 하천에 인접한 평야에 비하면 보잘 것 없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정도로 협소한 평야로 인식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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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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