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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평리 옥방6지구 유적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403447
영어음역 Daepyeong-ri Okbang6jigu Yujeok
영어의미역 Okbang Archaeological Site 6 in Daepyeong-ri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유물 산포지
지역 경상남도 진주시 대평면
시대 선사/청동기
집필자 고정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생활유적
소재지 주소 경상남도 진주시 대평면 대평리 675-4지도보기
소유자 국유

[정의]

경상남도 진주시 대평면 대평리에 있는 청동기시대의 생활유적.

[개설]

대평리 옥방6지구 유적이 위치하는 대평리 일대는 하천의 범람으로 강안이 확대되고 그 배후에 모래가 퇴적되어 현재 지층과 같은 충적대지가 형성되었다고 추정된다. 신석기시대라고 하는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인간들의 생활공간이 이곳에서 시작된 것은 남강을 이용한 발달된 수로와 농경을 위한 넓고 평평한 대지, 풍부한 수자원 등에 기인할 것이다.

대평리 옥방6지구 유적은 지형적으로 강변에 근접하는 곳이어서 주로 밭으로 추정되는 경작지만 확인되었다. 즉, 곡물류와 채소류, 그리고 구근류를 주로 재배하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경작으로 인한 자연 교란은 있었으나 그 아래의 퇴적층은 범람으로 입은 훼손부분을 제외하면 비교적 원상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위치]

대평리 옥방 6지구는 경상남도 진주시 대평면 대평리 675-4번지 일대에 해당한다. 이곳은 남강댐 상류의 경호강과 양천강, 남사천이 합류하는 하천 배후에 부채모양으로 모래가 퇴적되어 형성된 충적지대의 외연부분으로, 지형적으로 강변에 근접하는 곳이다.

[발굴조사경위]

대평리 옥방6지구 유적은 1975년부터 1980년까지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실시한 남강댐 수몰지구 발굴조사 계획구역에는 포함되지 않았던 지역이었으나, 주변 조사과정에서 이곳에서도 유적분포 가능성이 예상되어 추가조사계획에 의해 실시하게 되었다. 발굴은 동아대학교 박물관에서 맡았으며, 1999년 3월 10일부터 6월 30일까지 3개월간에 걸쳐서 조사되었다.

[발굴결과]

옥방 6지구 유적에서는 삼국시대와 청동기시대에 해당하는 경작지와 청동기시대의 생활 및 구상유구 일부가 확인되었다.

삼국시대 경작층에서 주목되는 것은 경작지의 고랑과 이랑이 강물의 흐름과 나란하게 긴 직선상을 이루고 간격도 일정하다는 것인데, 이것은 삼국시대 영농기술이 상당한 수준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동시에 경작지의 대형화에 따른 작업능률의 제고라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수수와 조 등의 탄화곡물이 수습된 점으로 보아 여름철에 재배되는 조와 수수를 경작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청동기시대 경작지는 삼국시대 경작층 아래에서 발견되었는데, 고랑과 이랑의 방향이 삼국시대와는 달리 강물의 흐름과 바로 교차하는 짧은 것이었고, 이랑이 고랑보다 폭이 현저하게 넓은 것도 특징이다. 특히 고랑 속에 무질서하게 나타난 타원형 소형수혈은 김매기 등 중간작업 과정에서 생긴 농부의 발자국을 뜻하는 것으로, 이를 통해 여름철과 겨울철 경작을 의미하는 이모작의 가능성을 추정할 수 있다. 즉 청동기시대 경작층에서는 여름철에는 수수, 조, 팥, 녹두가 주로 재배되고, 겨울철에는 보리가 경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형태]

청동기시대 경작층 아래에서는 V자나 U자상을 띠는 구상유구(溝狀遺構)를 비롯한 제방시설로 추정되는 점토층과 부정형성 기둥구멍이 배치된 문화층이 발견되었다. 유적 자체가 중심부가 아닌 가장자리에 해당하여 전반적인 사항을 파악하기가 곤란하나, 대평리 유적에서 발견된 구상유구들과는 동일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또한 강변을 따라 급경사면에 퇴적된 점토층 부분은 만약 인공적인 것이라면, 강안 충적대지의 유실을 방지하기 위한 제방시설로 축조된 것이어서 우리나라 고대 토목공사 관계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출토유물]

청동기시대 구상유구 내부에서 출토된 옹형의 경우 외벽에는 불을 맞은 흔적이 있고 내벽은 검게 그을린 것으로 미루어 보아, 지금의 솥이나 냄비와 같은 용도로 사용된 도구였을 것으로 해석된다.

석기 가운데 사암제 숫돌이 풍부하게 출토된 것은 직접 돌화살촉, 돌검, 돌도끼, 반원형 돌칼 등 간석기를 제작하였음을 의미한다.

삼국시대 경작층에서 수습된 회청색 경질토기들은 주변의 생활유구나 분묘에서 유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출토유물들을 참고한다면 삼국시대 경작지는 6세기 전후한 시기에 사용된 것으로, 청동기시대 경작지는 기원전 5세기전후, 그리고 구상유구와 기둥구멍이 분포한 문화층은 기원전 6세기 이전으로 편년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현황]

대평리 옥방6지구 유적은 조사 이전에는 강둑이 강 가장자리를 따라 설치되어 있었으므로 강둑 바깥에 위치한 경작지에 해당하였으나, 남강댐 보강공사로 강안을 넓히면서 모두 제거되었다. 현재 대평리 옥방6지구 유적을 비롯한 대평리 유적에서 출토된 선사유물들을 전시할 남강선사유적전시관이 건립 중에 있다.

[의의와 평가]

대평리 옥방6지구 유적은 농경지 유적으로 우리나라 고대 농경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청동기시대의 경작지에서 확인된 고랑과 이랑의 형태와 배치상태, 경작지의 규모와 채집된 탄화곡물 등의 특징은 당시 농작물의 종류와 농경규모, 재배수법 등을 파악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될 것이다. 또한 구상유구와 퇴적유구 등도 청동기시대의 생활상을 이해하는 실마리가 될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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