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4100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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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기필(崔琦弼) : 본관이 전주(全州)이다. 무과에 올라 봉사(奉事)가 되었더니 계사년(선조 26년, 1593)에 의병을 일으켜 진주성(晋州城)에 들어왔다. 병사(兵使) 최경회(崔慶會)가 임금이 피난한 곳으로 계문을 올리니 본주의 판관(判官)을 삼았다. 성이 함락되어 순절했는데 계해년(영조 19년, 1743)에 병조참의(兵曹參議)로 추증되고 창렬사(彰烈祠)에 모셨다.
○ 유함(兪晗) : 본관이 영산(靈山)이니 진사 유백온(兪伯溫)의 아들이다. 의병장으로서 촉석성(矗石城)에 들어왔다가 계사년(선조 26년, 1593)에 성이 함락되자 순절했다. 뒤에 주부(主簿)로 추증되어 창렬사(彰烈祠)에 모셨다.
○ 장윤현(張胤賢) : 본관이 단양(丹陽)이니 수문장(守門將)으로서 계사년(선조 26년, 1593)에 성이 함락되자 순절했다. 뒤에 호조좌랑(戶曹佐郞)으로 추증되어 창렬사(彰烈祠)에 모셨다.
○ 박승남(朴承男) : 본관이 밀양(密陽)이다. 판관(判官)으로서 계사년(선조 26년, 1593)에 성이 함락되자 순절했다. 뒤에 병조참의(兵曹參議)로 추증되어 창렬사(彰烈祠)에 모셨다.
○ 하계선(河繼先) : 본관이 진양(晉陽)이니 학생으로서 촉석성(矗石城)에서 순절했다. 호조좌랑(戶曹佐郞)을 추증하고 창렬사(彰烈祠)에 모셨다.
○ 최언양(崔彦亮) : 본관이 삭녕(朔寧)이니 사과(司果) 최복린(崔卜麟)의 후손이다. 계사년(선조 26년, 1593)에 성이 함락될 때 순절하니 호조좌랑(戶曹佐郞)을 추증하고 창렬사(彰烈祠)에 모셨다.
○ 윤사복(尹思復) : 본관이 파평(坡平)이니 첨정(僉正)으로서 의병을 일으켜 촉석성(矗石城)에 들어왔다가 계사년(선조 26년, 1593)에 순절했다. 호조좌랑(戶曹佐郞)을 추증하고 창렬사에 모셨다.
○ 손승선(孫承善) : 본관이 밀양(密陽)이니 의병대장(義兵大將)으로서 촉석성(矗石城)에 들어왔다가 계사년(선조 26년, 1593)에 순절했다. 주부(主簿)를 추증하고 창렬사(彰烈祠)에 모셨다.
○ 정유경(鄭惟敬) : 본관이 진양(晉陽)이니 훈련주부(訓鍊主簿)로서 촉석성(矗石城)에서 순절했다.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추증하고 창렬사(彰烈祠)에 모셨다.
○ 박안도(朴安道) : 자는 유경(由卿)이요 본관이 태안(泰安)이다. 임진년에 의병(義兵)을 불러 일으켜 여러 번 기이한 공을 세우고 계사년(선조 26년, 1593)에 성이 함락되자 순절했다. 뒤에 호조좌랑(戶曹佐郞)을 추증하고 창렬사(彰烈祠)에 모셨다.
○ 하천서(河天瑞) : 호는 망추정(望楸亭)이요, 참봉(參奉)이더니 임진년에 창의(倡義)하여 훈공(勳功)으로 좌승지(左承旨)로 추증되었다. 『용사일기(龍蛇日記)』에 이르기를 “공은 창의하여 성을 지키더니 강덕룡(姜德龍)·신남(申楠) 두 분과 더불어 군사를 단련하고 위엄을 떨쳐 군사의 기율이 자못 정돈되었다. ‘성이 무너지는 것은 완지(完池)가 얕기 때문’이라고 하여 깊게 하는 것 등 그 공을 다 기록할 수 없다.”라고 했다.
○ 허국주(許國柱) : 본관이 김해(金海)이니 무과에 올라 우후(虞侯)로서 임진년에 창의(倡義)하여 적을 쳐서 공훈을 기록했다. 난이 끝난 뒤에 염창강(濂滄江) 위에 정자를 짓고 편액을 관란(觀瀾)이라 이르고서 술과 시로 평생을 마쳤다. 임신년(순조 12년, 1812)에 많은 선비들이 나라에 호소하여 특별히 충성과 절개가 탁월하고 특이한 포전(褒典)을 입어서 병조참판(兵曹參判)을 추증했다.
○ 강홍덕(姜弘德) : 본관이 진양(晉陽)이니 한림(翰林) 강흘(姜仡)의 5세손이다. 계사년(선조 26년, 1593)에 무민공(武敏公) 황진(黃進)을 따라 순절하여 선무원종(宣武原從) 2등의 공훈을 기록했고 자손이 충순위(忠順衛)를 세습했다.
○ 하경호(河慶灝) : 첫 이름은 하경남(河慶男)이요 자는 사회(士會)니 하천서(河天瑞)의 아들이다. 침랑(寢郞)으로서 별천(別薦)의 무과에 올라 선전관(宣傳官)과 훈련부정(訓鍊副正)이 되었으니 체찰사(體察使) 오음(梧陰) 윤두수(尹斗壽)의 천거였다. 윤공이 기중(器重)히 여겨 중군(中軍)에 불러두었더니 여러 번 기이한 공을 세웠다. 체찰사(體察使)가 서애(西崖) 유성룡(柳成龍)에게 글을 주어 이르기를 “하모(河某)는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지만 공은 배나 되며 호남(湖南)의 바다에서 크게 이긴 것보다 뛰어났다.”라고 했다 임금의 수레가 용만(龍灣)으로 행행(行幸)할 때 임금이 갑자기 묻기를 “하경남은 어데 있느냐?”고 하여 급히 불러서 전모(前矛)를 삼았으니 사랑하여 눈에 두는 것이 이와 같았다.
○ 성여충(成汝忠) : 본관이 창녕(昌寧)이니 천성이 충효했다. 선조(宣祖)가 서쪽으로 피난하니 참봉(參奉)으로서 어렵고 위험한 것을 피하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임금을 호종(扈從)하여 원종훈록(原從勳錄)을 입었다.
○ 하공헌(河公獻) : 자는 희가(希可)요, 호는 신당(新塘)이니 대사간(大司諫) 하결(河潔)의 후손이다. 천성이 충효하여 어버이를 섬김에 정신과 육체의 봉양을 다했고 부모의 상에 예(禮)로써 했으며 묘를 지킴에 고제(古制)로서 마쳤다. 형제 네 사람이 한집에 같이 살았는데 사람들의 이간하는 말이 없어 향리에서 ‘효우군자(孝友君子)’로 일컬었다. 용사(龍蛇)의 난을 당해서는 임금이 피난 가는 것을 통탄하여 글을 지어 지역 내에 알리고 집안의 노복 백여 명을 거느리고 포위된 성안으로 들어갔다. 성이 장차 함락되려고 하자 한 구절의 시를 읊어 이르기를 “성조(聖朝)의 은덕과 혜택이 두터워 덮고 비춰줌이 인(仁) 아닌 것이 없었네. 의리로는 곰 발바닥과 물고기를 구분함이 있어야 하리니, 글 읽은 사람으로 이 몸을 바치리라.[聖朝恩澤厚 覆燾莫非仁 義有熊漁辨 書生殉此身]”라고 하고 드디어 “여러 공들과 더불어 함께해야 한다.”고 말한 다음 촉석성(矗石城)에서 순절했다. 『실기(實記)』의 간행이 있었다.
○ 문할(文劼) : 자는 자신(子愼)이요, 호는 성광(醒狂)이니 본관이 남평(南平)이다. 기묘년에 진사에 오르고 임진년에 진주(晉州)에서 의병을 불러일으켰다. 정유년(선조 30년, 1597)에 하동섬진(河東蟾津)에서 출진했다가 무술년에 군중(軍中)에서 죽으니 선무원종훈(宣武原從勳)을 입었다.
○ 이번(李蕃) : 첫 이름은 이순훈(李純勛)이요, 자는 사영(士英)이며, 호는 남계(南溪)요, 벼슬은 금부도사(禁府都事)였다. 나면서부터 평범한 아이들과는 달랐으며 강개하여 큰 절개가 있었다. 임진왜란을 당해서는 동생 이분(李蕡)과 종제(從弟) 이홍훈(李弘勛)과 더불어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를 따라 화왕산성(火旺山城)에 들어갔고 또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을 따라 바다에서 싸워서 공로와 업적을 많이 드러냈다.
○ 박흥주(朴興宙) : 본관이 함양(咸陽)이니 치암(恥菴) 박충좌(朴忠佐)의 후손이다. 일찍이 부사(浮査) 성여신(成汝信)을 따라 놀았고 을유년(선조 38년, 1585)에 진사가 되었다. 임란을 만나 충용장군(忠勇將軍) 김덕령(金德齡)이 무고한 죄를 입어 구치(拘置)되는 것을 보고 글을 오리(梧里) 이상국(李相國)에 보내어 그 원통함을 변명했다. 의병을 일으켜 창원(昌原)의 옛 성내에서 적을 만나 순절하니 아우 박흥택(朴興宅)이 혼(魂)을 불러서 장사지냈다.
○ 이희복(李希福)·이영(李英) : 모두 본관이 사천(泗川)이니 임진년 근왕(勤王)으로 군공(軍功)이 있어 선무원종공(宣武原從功) 3등에 기록되었다. 이영은 벼슬이 훈련원첨정(訓練院僉正)에 이르렀다.
○ 정존극(鄭存極) : 본관이 진양(晉陽)이니 공대공(恭戴公) 정척(鄭陟)의 후손이다. 임진년에 아우 정명극(鄭明極)과 더불어 의병을 불러일으켜 국가의 위란에 달려가니 그의 아버지 정경량(鄭慶良)이 훈계하여 이르기를 “너희들은 내가 염려하지 않도록 하고 난을 이겨 공을 세워 네 아비의 여망에 부응하도록 하라.”고 했다. 차원(車院)의 싸움에서 정명극이 탄환에 맞아 죽었다. 정존극은 벼슬이 주부(主簿)에 이르렀다. 정명극은 벼슬이 좌랑(佐郞)에 이르러 함께 2등훈(二等勳)을 기록했다.
○ 정대보(鄭大輔) : 본관이 진양(晉陽)이니 만 사람을 대적하는 용맹을 가졌다. 임진년에 판관(判官) 김시민(金時敏)을 따라 군무(軍務)를 찬획(贊畫)하다가 계사년(선조 26년, 1593)에 성이 함락되어 순국했다. 호조참판(戶曹參判)을 추증하고 원종훈(原從勳)을 기록했다.
○ 김개(金介) : 자는 집중(執中)이요, 본관이 경주(慶州)이다. 창의(倡義)하여 종군하자 그 손자 김덕련(金德連)에게 일러 말하기를 “왕사(王事)에 죽지 못하면 어찌 사람의 신하 된 도리라 하겠느냐?”라고 했다. 계사년(선조 26년, 1593)에 할아버지와 손자가 동시에 순절하니 조손(祖孫)이 함께 숭질(崇秩)을 증여받고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으로 기록되었다.
○ 정광윤(鄭光胤) : 자는 석초(錫初)요, 본관이 진양(晉陽)이다. 임진란에 그의 손자 정열(鄭悅)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켜 적을 공격했다. 계사년(선조 26년, 1593)에 성이 함락되자 정광윤이 먼저 죽었다. 정열은 할아버지의 원수 갚기를 생각하고 몸을 떨쳐 돌진하여 싸우다가 탄환에 맞아 죽었다. 정광윤은 판관(判官)을 증직하고 부장(副將)을 추증하여 선무원종(宣武原從) 2등의 훈을 기록했다.
○ 정입(鄭岦) : 자는 여신(汝信)이요, 효자 정경량(鄭慶良)의 손자다. 임진란에 의병을 불러일으켜 여러 번 기이한 전공을 세웠다. 벼슬이 부사직(副司直)에 이르렀으며 선무원종(宣武原從) 2등의 공훈을 기록했다.
○ 강탁(姜倬) : 본관이 진양(晉陽)이니 수헌(守軒) 강숙경(姜叔卿)의 후예다. 임진란에 예빈주부(禮賓主簿)로서 임금의 수례를 지켜 용만(龍灣)에 들어갔다. 원종훈록(原從勳錄)에 실렸다.
○ 변연수(卞延壽) : 본관이 팔계(八溪)이다. 임진란에 그 아들 변입(卞岦)과 더불어 의병을 불러일으켜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을 따라 여러 번 군공을 세웠다. 정유년(선조 30년, 1597) 당포(唐浦)의 싸움에서 부자(父子)가 같은 날 순절했다. 계사년(고종 30년, 1893)에 많은 선비의 상언(上言)으로 인해 변연수는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추증했고 변입은 좌승지(左承旨)를 추증하여 함께 정려(旌閭)를 명령했다.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이 여기(閭記)를 지었다.
○ 강희수(姜希秀) : 통정(通亭) 강회백(姜淮伯)의 후손이다. 아들 강기원(姜起源)과 더불어 부자(父子)가 전쟁에 달려가서 많은 전공(戰功)을 세웠다. 선무원종훈(宣武原從勳)을 기록했다.
○ 이우춘(李遇春) : 본관이 파산(巴山)이니 매헌(梅軒) 이인형(李仁亨)의 증손이다. 임진란에 아우 이득춘(李得春)·이성춘(李成春)과 더불어 의병을 불러일으켰다. 이우춘은 진사로서 첨정(僉正)에 올랐고, 이성춘은 진사로서 판관(判官)에 올랐으며, 이성춘의 아들 이장(李檣)은 아버지를 모시고 싸움에 달려가 여러 번 기이한 군공을 세워 모두 선무원종훈(宣武原從勳)에 기록되었다.
○ 정훈(鄭勛) : 본관이 진주(晉州)이니 판결사(判決事) 정유성(鄭惟誠)의 아들이다. 임진란에 참전하여 선무원종훈(宣武原從勳)에 참예하고 주부(主簿)에 제수되었다.
○ 안흥종(安興琮) : 본관이 순흥(順興)이니 일사재(一思齋) 안창렴(安昌廉)의 손자다. 강개하여 커다란 절개가 있었다. 진사에 올라 벼슬이 참봉(參奉)이더니 임진란에 진사 이운(李蕓)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켜 적을 치다가 촉석성(矗石城)에서 순절했다. 아들 봉사(奉事) 안헌(安憲)은 정유난에 아버지의 원수를 갚으러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을 따라 적을 쳐서 여러 번 군공을 세우고서 노량(露梁)에서 순절하니 모두 공훈에 기록되었다. 뒤에 자손들이 단소(壇所)를 만들어 제사지내는데 참판(參判) 노광두(盧光斗)가 기문(記文)를 지었다.
○ 박세항(朴世項) : 자는 원양(元亮)이요, 본관이 밀양(密陽)이다. 충효하고 청렴하고 검소하며 허리 힘이 뛰어났다. 수문장(守門將)으로서 임진란에 칼을 잡고 진주성(晋州城)의 군진에 달려갔다가 성이 함락되자 함께 죽었다. 선무원종훈(宣武原從勳)에 기록되었다.
○ 김봉승(金鳳承) :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김준민(金俊民)의 아들이다. 계사년(선조 26년, 1593)에 아버지가 죽으니 김봉승이 원수 갚을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정유년(선조 30년, 1597)에 무리 수백 명을 거느리고 발치에서 여러 번 싸워서 적을 패주시켰으나 김봉승도 또한 창에 맞아 거의 죽을 뻔했다. 고을 사람들이 그의 충효한 것을 들어 여러 번 주부(州府)에 호소했다.
○ 논개(論介) : 본영(本營)의 기생이더니 계사년(선조 26년, 1593)에 성이 함락되자 적장(敵將)을 바위 위에서 안고 남강(南江)에 몸을 던져 죽었다. 후인들이 그 바위를 이름하여 의암(義巖)이라 이르고 수신(帥臣)으로 인하여 조정에 알려서 정려(旌閭)를 명령하고 의기사(義妓祠)에 제사지냈다.
○ 정호신(鄭虎臣) : 자는 용인(勇仁)이요, 본관이 진주(晉州)이다. 무과에 올라 사용(司勇)이 되었더니 무오년(광해군 10년, 1618)에 서궁(西宮)의 변(變)이 있자 정청(庭請)에 참석하지 않았다. 일이 『정청불참록(庭請不參錄)』에 실려 있다.
○ 정계남(鄭癸男) : 자는 군일(君一)이요, 본관이 진주(晉州)이며 사과(司果)였다. 계해년(인조 1년, 1623)에 여러 공들을 따라 인조반정(仁祖反正)에 참여했다. 갑자년(인조 2년, 1624) ‘이괄(李适)의 난’에도 또 참여해 무훈을 떨쳤으니 임금이 은전의 토지를 내렸다.
○ 주인달(朱仁達) : 무열공(武烈公) 주몽룡(朱夢龍)의 아들이니 무과에 올라 진무원종훈(振武原從勳)에 기록되었다.
○ 정몽작(鄭夢綽) : 자는 확여(確如)요, 본관이 진주(晉州)이며 벼슬은 선전관(宣傳官)이었다. 병자년(인조 14년, 1636)에 어가(御駕)를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호종(扈從)하고 동문을 맡아 지키다가 충신의 사절(死節)을 다했다.
○ 문재자(文在茲) : 자는 여진(汝進)이니 진사 문홍운(文弘運)의 아들이다. 병자호란에 의병을 불러일으키니 감사(監司) 심연(沈演)이 격문으로 공을 부르니 스스로 따랐다. 우병사(右兵使)가 패하자 임시의 벼슬로써 공이 충절을 지켜 도망가고 흩어진 군사를 수습하고 집합시켰다. 뒤에 조정에서 재차 선전관(宣傳官)을 제수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 하대유(河大猷) : 자는 몽징(夢徵)이요, 스스로 불우당(不憂堂)이라 했다. 기상과 도량이 매우 뛰어나고 말 타기와 활쏘기를 잘했다. 영조(英祖)의 무신난(戊申亂)에 선전관(宣傳官)으로서 적을 쳐서 여러 번 이겼다. 조정에서 부호군(副護軍)을 내리고 2등 공훈을 기록하며 은궁(銀弓)과 옥시(玉矢)를 내렸다.
○ 문응익(文應翼) : 자는 익경(翼卿)이요, 본관이 남평(南平)이다. 무신난(戊申亂)에 병사(兵使)가 적을 두려워하여 나아가지 않는 것을 보고 공이 칼을 빼어들고 앞서기를 청하여 군사를 나아가게 하여 적을 토멸(討滅)하였다. 뒤에 암행어사 박문수(朴文秀)가 임금께 아뢰어 포창(襃彰)하기를 금위영(禁衛營)의 별군관(別軍官)을 제수했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양무록권(揚武錄券)에 실려 있다.
○ 허당(許鐺) : 자는 대응(大應)이요, 본관이 김해(金海)이다. 천성이 충의스럽고 뛰어난 무략이 있더니 정사년(영조 13년, 1737)에 무과에 올랐다. 일찍이 조성재(曺聖在)의 누이동생을 맞아서 아내로 삼고 정희량(鄭希亮)과 더불어 벗을 삼았는데 이 두 사람의 소행이 참람(僭濫)된 일이 많은 것을 보고 마침내 그와 왕래를 거두고 문자(文字)를 주어 교제를 끊었다. 무신년(戊申年)에 두 역적이 모두 반(反)하기에 이르매 허당은 즉시 가동(家僮) 수백 명을 거느리고 합천(陜川) 경계에 이르렀는데 반적(反賊)이 이미 머리를 주었다는 말을 듣고 채찍을 던지고 돌아오니 사람들이 모두 그의 아량과 식견에 감복했다.
○ 한필세(韓弼世) : 자는 우경(佑卿)이다. 무과에 올라 주부(主簿)였더니 양무원종훈(揚武原從勳)에 참여하고 병조참의(兵曹參議)를 추증했다.
○ 정일진(鄭日晉) : 본관이 진양(晉陽)이다. 무신년(영조 4년, 1728)에 양무원종공신(揚武原從功臣)에 기록되고 가선동지중추부사(嘉善同知中樞府事)를 추증했다.
○ 김필만(金弼萬) : 본관이 김해(金海)이다. 영조(英祖) 때의 무신난(戊申亂)에 그의 사촌 동생 김필락(金弼樂)과 조카 김여삼(金汝三)과 더불어 향군을 불러 모아 남강을 건너 서문(誓文)을 만들었다. 영장(營將) 이석복(李碩福)과 인근의 여러 수령을 따라 길을 나누어 협격(挾擊)하다가 마침내 군중에서 순절하니 양무원종훈(揚武原從功臣)에 기록되었다. 그 뒤 경인년(고종 27년, 1890)에 김필만·김필락·김여삼 모두에게 함께 증직하고 정려(旌閭)를 명령하며 부역을 면제시켰다.
○ 김중석(金重錫) : 본관이 김해(金海)이다. 일찍부터 활쏘기와 말 타기를 일삼고 도략(鞱略)을 익혀 외웠다. 무신년(영조 4년, 1728)에 칼을 집고 우영장(右營將) 이석복(李碩福)의 군진에 달려갔다가 마침내 탄환을 맞고 죽으니 양무원종(揚武原從)의 2등훈에 기록되고 참판(參判)을 증직했다.
○ 김상건(金尙建) : 본관이 경주(慶州)이니 김개(金介)의 5세손이다. 영조(英祖) 무신의 난에 몸을 던져 의진(義陣)에 달려갔다가 진중에서 죽으니 병술년에 증직이 있었다.
○ 김중철(金重哲) : 자는 사호(士浩)요, 본관이 김해(金海)이니 절효(節孝) 김극일(金克一)의 후손이다. 효행을 순전히 갖췄고 용맹과 지략이 뛰어났다. 무신난(戊申亂)에 본주의 영장(營將) 이석복(李碩福)과 곤양군수(昆陽郡守) 우하형(禹夏亨)을 따라 적을 쳐서 기이한 군공을 많이 세웠다. 그는 입을 닫고 공을 말하지 않았으며 늙어서 시골로 돌아왔다. 뒷날 사림(士林)의 정장(呈狀)으로 인해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증직했다가 무인년(고종 15년, 1878)에 좌승지(左承旨)를 추증하고 정려(旌閭)를 명령했다. 직각(直閣) 송규환(宋奎煥)이 여기(閭記)를 지었다.
○ 강희주(姜熙周) : 자는 주백(周伯)이니 수헌(守軒) 강숙경(姜叔卿)의 후손이다. 용맹과 힘이 남보다 뛰어났다. 무신난에 의병을 일으켜서 곤양군수(昆陽郡守) 우하형(禹夏亨)을 따라 적을 쳤다. 원종훈(原從勳)에 기록되고 절충장군(折衝將軍)을 제수했다.
○ 전준창(全准昌) : 자는 군거(君擧)요, 본관이 경산(慶山)이다. 무신년에 군사를 거느리고 거창(居昌)으로 달려가서 싸우다가 죽으니 양무원종훈(揚武原從勳)으로 기록되었다. 아들 강성징(姜聖澄)과 조카 강덕징(姜德徵)도 모두 군공으로써 벼슬을 받았다.
○ 충신(忠臣) 허치(許穉) : 정려(旌閭)를 그의 후손이 충주(忠州)로부터 옮겨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