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4100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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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윤현(李胤玄) : 자는 시로(時老)요, 호는 영모당(永慕堂)이니 매월당(梅月堂) 이하생(李賀生)의 증손이다. 18세 때에 부친을 모시고 산간 마을에서 천연두를 피하더니 갑자기 어느 날에 도적이 들어와 부친을 해치려고 했다. 윤현이 몸으로 날개처럼 덮어서 겨우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온몸에 부상을 입고 이어 병을 얻어 의원을 찾아 약을 구하여 8년을 견디다 마침내 천수를 마쳤다. 병술년(숙종 32년, 1706)에 정려(旌閭)되었다. 성재(性齋) 허전(許傳)이 기문(記文)을 지었다.
○ 김용택(金龍澤) : 본관이 월성(月城)이니 수은(樹隱) 김충한(金冲漢)의 후예다. 집이 가난하고 어버이가 늙었으므로 몸소 농사지어서 봉양했다. 13세 때에 아버지가 병이 들어 산 꿩을 먹기를 원했다. 갑자기 구하는 것이 어려우므로 공이 눈물을 흘리면서 방황했는데 야외에서 새매가 꿩을 쫓아서 갑자기 바짓가랑이 아래로 들어오므로 바쳐드렸다. 또 날고기를 원했으나 당시는 얼음이 아직 풀리지 않았기 때문에 대발을 엮어서 돌다리 밑에서 기다리다가 얼마 후에 수십 마리의 고기를 얻어서 드리니 보는 이가 모두 효성의 감동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일컬었다. 돌아가심에 이르러서는 손가락을 찍어서 피를 넣어 수일 동안 목숨을 연장시켰다. 13세부터 18세까지 연달아 부모 및 승중상(承重喪)을 당했는데 전후로 의절(儀節)이 예(禮)에 맞지 않는 것이 없었다. 또 새벽과 저녁으로 묘소를 찾아뵙는데 비바람이 불어도 거르지 않으니 동네 사람들이 감탄하여 병풍(屛風) 1좌를 상(賞)으로 주었다. 5세손 김기찬(金基燦)이 왕정(王庭)을 중산리(中山里)에 세웠으나 병인년에 화재로 잃은 뒤 병오년에 다시 비석을 하촌(下村)에 세웠다. 덕산(德山)에 살았으니 지금의 산청(山淸)이다.
○ 김춘룡(金春龍) : 자는 춘보(春輔)요, 호는 애남(愛南)이니 본관이 김해(金海)이다. 아버지가 일찍이 눈병을 앓아 3년 만에 장님이 되었는데 의원이 말하기를 낫기가 어렵다고 했다. 춘룡이 밤낮으로 울부짖으며 정성을 다해 약을 구해 드리니 눈이 점점 밝아졌다. 모친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시묘(侍墓)하며 물을 긷는 길이 멀어서 매양 한색한 것을 근심했다. 어느 날 밤에 하늘에서 비가 오고 벼락이 묘 곁을 쳐서 구멍을 만들고 샘물이 저절로 솟아나니 사람들이 하늘이 효성에 감동한 것이라고 했다. 순조(純祖) 때에 무과에 올라 수군절제사(水軍節制使)가 되고 남해현령(南海縣令)에 이르렀으며 갑오년(헌종 34년, 1834)에는 동중추(同中樞)를 추증했다.
○ 최봉(崔峯) : 처음 이름은 진명(振溟)이요, 호는 송곡(松谷)이니 본관이 경주(慶州)이다. 보성(寶城)으로부터 진주(晉州)로 옮아와서 살았다.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어버이를 섬김에 몸과 마음의 봉양을 다했다. 어버이가 돌아간 뒤 3년 동안 여묘(廬墓)를 하고 나서는 문을 닫고 나오지 아니하고 독서에만 깊이 몰두했다. 그리고 효제충신(孝悌忠信)의 네 글자를 문에 써 붙이고 출입하면서 보며 반성하는 자료로 삼았다.
○ 서상의(徐相義) : 자는 극중(克仲)이요, 호는 대교봉(大轎峯)이다. 서상욱(徐相郁)의 자는 화중(和仲)이요, 호는 소교봉(小矯峯)인데 큰 형과 둘째 형이니 함께 지극한 정성을 가졌다. 어머니의 병환을 만나서 매우 급한 마음으로 먼 곳에서 약을 지어 돌아오는데 갑자기 물이 불어 있었다. 사람이 건너갈 수가 없으므로 둘째 형이 하늘을 우러러 울부짖으니 물결이 고요해져서 잘 건너가게 되었다. 집으로 돌아와서 약을 드려 소생하니 사람들이 ‘모씨의 절강고사[牟截江故事]’에 비겼다. 향리에서 글을 올려 호소하니 예(禮)대로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자급했다.
○ 하범로(河範魯) : 자는 학중(學仲)이니 이곡(尼谷) 하응로(河應魯)의 아우다.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웠으니 큰형과 함께 정성을 다해 부모를 섬겼다. 부모의 상에 이르러서 흰 제비가 상막(喪幕)에 집을 지으니 사람들이 규암(圭菴) 송인수(宋麟壽)의 효행으로써 함께 일컬었다.
○ 하상진(河相晉) : 자는 재원(再源)이요, 호는 월은(月隱)이니 양정공(襄靖公) 하경복(河敬復)의 후손이다. 아버지가 병이 든 지 여러 해가 되자 단(壇)을 모아놓고 하늘에 빌었더니 어느 날 밤 꿈에 어떤 노인이 와서 말하기를 “너 사는 무주(茂朱)의 어떤 이를 찾아가서 약을 구하라.”고 하므로 문득 깨어나 그의 말과 같이 무주로 갔더니 과연 어떤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도 역시 자기의 성명을 알고 있었다. 괴이하게 여겨 물으니 대답하기를 “일찍이 꿈속에서 노인이 말하여 자네가 효자인 것을 알았노라.”라고 하고는 이어 약을 주므로 가지고 돌아와서 달여 드리니 병이 곧 나았다. 청암(靑巖)에 살았으니 지금의 하동(河東)이다.
○ 최징(崔澄) : 자는 사용(士庸)이요, 호는 수암(壽巖)이니 본관이 전주(全州)이다. 나이 네 살 때에 계모 조씨(趙氏)에게 길러졌더니 조씨(趙氏)가 성질이 엄해 여러 자식들이 잘못이 있으면 조금도 가차가 없었다. 그러므로 공경하는 마음으로 효심을 일으키고 어버이의 마음을 기쁘게 하기에 힘썼다. 만년에 살림을 나누어 높은 고개를 떨어져 살게 되었는데 조씨(趙氏)가 물고기를 즐겼으므로 날마다 몸소 낚아서 십 리 밖에 가서 드렸다. 조씨(趙氏)가 말하기를 “낚는 데는 수고가 안되겠지마는 대광주리가 무겁지 않느냐?”라고 했으니 그의 쇠약한 것을 민망히 여긴 것이다. 청강(靑岡)에 살았으니 지금의 산청(山淸)이다.
○ 최호(崔浩) : 자는 사흠(士欽)이요, 호는 월오(月塢)니 수암(壽巖) 최징(崔澄)의 아우다. 평생에 소요부(邵堯夫)의 ‘안빈지기(安貧知幾 : 가난한 속에 안주하여 세상의 기미를 안다)’의 구절을 몸을 가지는 부적으로 삼았다. 모부인이 갑자기 병에 걸렸는데 공이 비를 무릅쓰고 지름길로 돌아오자 그 연고를 물으니 이르기를 “꿈자리가 이상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로부터 밖에서 밤을 새우지 않고 몸소 치마와 요강을 씻었다. 이를 대신하기를 청하면, “어버이를 섬기는 것은 진실로 자식 된 도리”라 하고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고 곁에서 부축하고 지탱해가며 천수를 마치게 했다. 청강(靑岡)에 살았으니 지금의 고성(固城)이다.
○ 성동윤(成東潤) : 자는 군한(君翰)이요, 본관이 창녕(昌寧)이니 모성재(慕省齋) 성용(成鏞)의 후손이다. 어버이를 섬김에 지극한 효도였고 거상(居喪)을 다했으며 종신토록 어머니를 사모하니 세상에서 성효자(成孝子)라고 일컬었다. 수직(壽職)으로 첨추(僉樞)였다. 용심(龍潯)에 살았다.
○ 정양석(鄭亮錫) : 자는 한명(韓明)이요, 호는 소헌(素軒)이며 본관이 해주(海州)이니 동오(東塢) 정우교(鄭佑敎)의 아들이다.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웠으니 어머니의 상에 슬퍼함이 도를 넘었다. 날마다 반드시 묘소를 찾아보며 피눈물을 흘리니 옷깃이 썩었다. 이웃에서 그 효성에 감동하여 글을 본주의 목사(牧使)에게 올렸으나 조정에 올리지 않으니 사람들이 모두 애석하게 여겼다. 가곡(佳谷)에 살았다.
○ 조석옥(曺碩玉) : 다른 이름이 조석우(曺碩祐)요, 자는 국견(國見)이며 호는 계남(桂南)이니 남명(南冥) 선생의 9세손이다. 어려서부터 극진한 정성이 있어 부모를 섬김에 정성과 공경을 다했다. 비록 집안이 가난할지라도 맛있는 음식으로 봉양하는 것을 어기지 않았다. 모부인이 기이한 병에 걸려 여러 달을 몸져누웠더니 밤낮으로 슬피 울면서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았다. 위중해지자 손가락을 찍어서 피를 넣어 마침내 소생하여 나이 팔십에 이르렀다. 덕산(德山)에 살았으니 지금의 산청(山淸)이다.
○ 정상함(鄭相咸) : 자는 인경(仁卿)이요, 호는 원재(源齋)니 본관이 해주(海州)이다. 어렸을 때부터 사치스럽고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고 항상 부모의 곁에서 주선했다. 더우면 베개머리에서 부채질하고 추우면 더운 이불을 덮어 드렸으며 밖에 나가서 고기나 과일을 얻으면 반드시 품에 넣어가지고 돌아와서 어버이께 드렸다. 밤에는 글을 읽고 낮에는 땔감을 베어서 맛있는 음식으로 봉양하는 것을 끊이지 않았다. 어머니의 병이 심하자 손가락에 피를 내어 입에 흘려 넣어서 회생시켰다. 향리에서 많은 감화가 있었으므로 주의 목사(牧使)가 여러 번 천거했으나 국가에서 일이 있었기 때문에 정표(旌表)를 입지 못하니 사람들이 모두 애석하게 여겼다.
○ 최덕승(崔德升) : 자는 윤약(允若)이요, 호는 묵암(黙巖)이니 본관이 전주(全州)이다. 어려서부터 홀로 된 어머니 이씨(李氏)에게 입양되었는데 뜻을 어긴 일이 없었다. 이씨가 중년이 되었을 때 넘어져서 팔을 움직이지 못했는데 공이 반드시 아침저녁으로 곁에서 숟가락을 잡아 먹여 드렸다. 어머니의 나이 팔십에 이르기까지 대소변을 꼭 남을 기다려서 하게 되었는데 용변기 씻는 것을 직접하고 남에게 맡기지 않았다. 상(喪)을 당해서는 장례 치르는 것을 한이 되는 일이 없게 했다. 또 생부(生父)를 집에 맞이하여 그 몸에 맡도록 봉양했다. 청강(靑岡)에 살았으니 지금의 고성(固城)이다.
○ 정표(鄭杓) : 자는 효극(孝克)이요, 호는 양천(陽川)이니 주서(注書) 정윤(鄭潤)의 아들이다. 모부인이 나이 65세에 우연히 졸도하는 정상에 걸렸는데 약을 구하고 하늘에 빌어 이르지 않는 바가 없었다. 음식과 약물을 올리는 범절은 반드시 친히 살폈다. 이렇게 9년 동안을 하루와 같이 했는데 어느 날 아침에 모부인이 갑자기 일어나 앉아서 이르기를 “내가 지금 나았다. 너의 효성과 힘에 의지하여 그렇게 되었다.”라고 했다. 온 집안이 놀래고 기뻐하더니 수일이 지나지 않아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공은 슬퍼하는 것으로 상을 마쳤다. 회산(晦山) 이택환(李宅煥)이 이웃에 담을 사이에 두고 살아서 공의 일을 매우 자세히 알았다. 그렇기 때문에 매양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정공의 정성은 하늘에 뿌리를 박은 것이라고 이를 만하다.”라고 했다. 양천(陽川)에 살았으니 지금의 하동(河東)이다.
○ 성탁(成倬) : 자는 처윤(處潤)이니 부사(浮査) 성여신(成汝信)의 후예다. 타고난 바탕이 질박하고 곧았다. 이웃 마을에 늘 지켜야 할 법도를 어기고 윤리와 강상을 어그러뜨리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안색을 바로 하고 꾸짖어 그 잘못을 뉘우치게 하니 사람들이 몸과 마음으로 봉양하고 뜻을 받들어 어기는 일이 없었다. 아버지가 병들자 시탕(侍湯)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돌아가심에 이르러서는 손가락을 찍어서 피를 쏟아 넣어서 5일 동안 회생케 했다. 거상(居喪)에는 한결같이 『가례(家禮)』를 지키고 슬퍼함이 절도를 넘었으며 장지(葬地)를 구할 때는 친히 지관(地官)을 등에 짊어지고 험준한 것을 싫어하지 않고 십여 리를 행하여 자리를 얻어 편안히 모셨다. 용심(龍潯)에 살았다.
○ 한무원(韓武源) : 자는 문칙(文則)이요, 호는 정수(靜叟)다. 성품과 도량이 어질며 순수했고 효성과 우애가 지극했다. 집이 가난하여 산에서 나무하고 고기를 낚아 맛있는 음식으로 봉양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아버지가 다리에 병을 얻어 몸져누우니 밤낮으로 초조하게 생각하며 정성을 다해 조치를 했다. 의원이 이르기를 “황사(黃蛇)가 있으면 병을 났게 할 수 있다.”고 하므로 한무원이 백방으로 이를 구해 회(膾)를 만들어 먼저 맛본 뒤에 드렸다. 8년을 하루와 같이 했더니 병이 드디어 완치되니 향리에서 효자라고 일컬었다. 갑오년의 동학란(東學亂)에 비도(匪徒)들이 횡행할 때도 마을에서 서로 경계하여 이르기를 “이는 효자의 집이니 조심하여 범하지 말라.”고 했다. 정수(丁樹)에 살았다.
○ 이병순(李炳珣) : 자는 군견(君見)이요, 호는 동정(東亭)이니 본관이 성산(星山)이다.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부친께서 연로하여 혼미해져 즉석에서 대소변을 함으로써 자리가 마를 틈이 없었다. 공이 밤낮으로 곁에서 모시면서 씻고 닦는 것을 부지런히 하여 집에 악취의 기운이 없게 했다. 밥을 드릴 때는 공이 손수 숟가락과 젓가락을 가지고 어린아이에게 먹이는 것과 같이 했으며 턱 찌꺼기의 남은 것은 반드시 친히 삼켰다. 상(喪)을 당해서는 피눈물을 흘리며 채소만 먹으며 3년을 마쳤다. 병인년 양이(洋夷)들의 소란에는 공이 강개하여 의병에 나갔으나 서울에 이르기도 전에 적이 평정되었으므로 곧 돌아왔다. 이때에 저술한 격문은 충의(忠義)가 늠연(凜然)했다. 수곡(水谷)에 살았다.
○ 최규순(崔圭順) : 자는 낙칠(洛七)이요, 호는 양천(良川)이니 본관이 전주(全州)이다.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럽더니 나이 14세에 근본을 둘째 아버지의 집에 옮겼다. 어버이의 뜻을 순응하여 조금도 어기거나 그릇되게 하는 일이 없었다. 일찍이 문중(門中) 일 때문에 본주의 감옥에 매이게 되었다. 아버지가 병이 들어 위독하다는 말을 듣고 옥직(玉直)에게 애걸하여 이르기를 “내가 낮에는 옥에 있고 밤에는 집에 가서 약을 받들어 모신다면 너에게는 관(官)의 책임이 없게 될 것이고 나는 정성을 펴게 될 것이다.”라고 했다. 옥직도 그의 성의에 감동하여 드디어 허락했다. 이로부터 집까지의 거리가 십 리였는데 밤을 타서 와서 의원에게 약을 조제하는 것을 물어 드리고 닭이 울면 다시 감옥으로 들어갔다. 이와 같이 하기를 18일 동안을 계속하다가 일이 평정되어 풀려나게 되었다. 아버지도 소생하여 천수(天壽)를 마치게 되었다. 일반성 양장(良庄)에 살았다.
○ 김종우(金鍾佑) : 본관이 김해(金海)이다. 일찍 아버지를 잃고 홀로 된 어머니를 봉양했는데 어머니가 병이 겹쳐 14년 동안을 앓았다. 시탕(侍湯)을 게을리하지 않았는데 꿈에 신인(神人)의 지시가 있어 약을 구해 효험을 보았다. 상(喪)을 당해서는 슬퍼하는 것이 지나쳐 거의 죽음에 이를 정도였다. 죽곡(竹谷)에 살았다.
○ 성진규(成鎭奎) : 자는 성천(聖川)이요, 호는 금암(琴巖)이며 금파(琴坡) 성사(成師)의 증손이니 본관이 창녕(昌寧)이다.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어버이를 섬김에 그 정성을 다했다. 거상(居喪)에는 피눈물을 흘리면서 상제(喪制)를 마쳤다. 또 여러 아우와 벗들과 함께 애정이 알차고 돈독하니 원근의 사람들이 탄복하고 칭찬하지 않음이 없었다. 금동(琴洞)에 살았다.
○ 최규환(崔圭桓) : 자는 숙향(肅鄕)이요, 호는 병암(屛巖)이니 본관이 전주(全州)이다. 힘써 배우고 괴로움을 이겼으며 성품이 또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난 지 두 살에 어머니를 잃고 계모 이씨(李氏)를 섬겼는데 지극한 정성이 아닌 것이 없었다. 자신의 몸에 병이 든 지가 여러 해가 되었으나 늘 근심할까 염려하여 아프고 괴로운 표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 때문에 계모가 그의 병을 알지 못했다. 임종할 때에 시를 남겨 봉양을 마치지 못한 것을 한으로 삼았다. 평생에 행동거지가 단아하고 방정하여 법도를 어기지 않았다. 힘을 쓴 공부는 오로지 사자(四子 : 공자, 맹자, 정자, 주자)에만 있었다. 청강(靑岡)에 살았으니 지금의 고성(固城)이다.
○ 정계교(鄭桂敎) : 자는 은철(殷喆)이요, 본관이 해주(海州)이니 진사 정광룡(鄭光龍)의 아들이다. 어버이를 섬김에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았다. 진사공이 일찍이 들로 가다가 고용된 이가 피를 뽑는 것을 보고 돌아와서 공에게 말씀하기를 “고용된 이가 벼를 뽑고 있었다.”라고 했다. 이에 공이 아뢰기를 “피입니다.”라고 말했다. 이를 위해 뜰 가운데에 피를 심고 이삭이 피어나기를 기다렸다가 고했다. 힘쓴 것은 어버이의 뜻을 기쁘게 해드리는 데에 있었으며 밤에는 하루에 있었던 일들을 모조리 아뢰었다. 그리고 어버이가 잠들기를 기다린 뒤에야 물러나니 퇴암(退庵)이라고 자호를 지었다. 용암(龍巖)에 살았다.
○ 최강진(崔岡鎭) : 본관이 경주(慶州)이니 순조(純祖) 때의 진사였다.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럽더니 어버이의 병이 위독하자 그 아우 최강한(崔岡翰)과 더불어 손가락을 찍어 피를 쏟아내어 6일 동안 회생하게 되었다. 그 뒤 상을 당해서는 슬퍼하는 것이 예제(禮制)를 넘었고 죽만 먹기를 3년 동안 계속했으니 도에서 여러 번 글을 올린 일이 있었다.
○ 강일제(姜一齊) : 자는 준여(俊汝)요, 본관이 진양(晉陽)이니 성재(誠齋) 하응태(河應台)의 후예다. 나이 겨우 7~8세에 아버지가 병들자 손가락을 찍어 입에 대어 넣으니 병이 낫게 되었다. 향리에서 탄복하여 ‘하늘에 근본한 효자[根天孝子]’라고 일렀다. 상(喪)을 만나서는 피눈물을 흘리면서 상을 마쳤다. 만년에 가서는 가족을 이끌고 집현산(集賢山) 아래 추동(樞洞)으로 들어가서 그의 문 위에 편액을 명재(瞑齋)라고 했으니 그가 영구히 자취를 감추고 나오지 않을 뜻을 보인 것이다. 추동(樞洞)에 살았다.
○ 김종길(金鍾吉) : 본관이 김해(金海)이다. 아버지가 병들었더니 의원이 이르기를 “백장사(白章蛇)의 기름이 있으면 마땅히 효험을 볼 것”이라고 했다. 때마침 깊은 겨울이었으므로 하늘에 빌면서 울부짖으니 홀연히 큰 뱀이 얼음 언덕에서 나왔다. 기름을 내어 드리니 효험을 얻었다. 이에 손자 김봉렬(金鳳烈)이 뱀을 얻은 곳에 비를 세우고 기적비(紀績碑)라고 했다. 그 명(銘)에 이르기를 “공에게 탁월한 효가 있어 유장(儒章)을 연이어 만들었고 묘당(廟堂)에서 포창(襃彰)했도다. 정(旌)을 명령하고 작(爵)을 추증하니 여(閭)는 죽곡(竹谷)에 있어 효(孝)를 그 집에 빛냈도다. 이 산에서 성묘하니 밤마다 범이 곁에 지켰도다. 할아버지께서 병을 앓으시자 차도를 징험하여 똥을 맛보았고 부위를 빨았도다. 문득 눈 속에서 뱀이 나타났으니 생각하건대 양사(良蛇)의 곳이로다. 구멍이 가까우니 이를 신보(申洑)가 이르도다. 불초(不肖)가 생각한 법칙대로 돌을 깎았으며 여기에서 우러르니 남긴 자취가 완연하여 없어지지 않으리로다. 여기에 명을 쓰는 것은 길이 다함이 없을 것을 보인 것이로다.”라고 했다. 전지(前誌)에 나와 있다.
○ 안원극(安元極) : 자는 현약(賢若)이요, 호는 삼우당(三友堂)이며 본관이 순흥(順興)이니 효자 안광의(安光義)의 아들이다.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럽더니 아버지가 종기를 앓은 지 8년이 되었는데 아우 안형극(安亨極)·안이극(安利極)과 더불어 밤낮으로 곁에 모시고 서로서로 빨아 드렸다. 밤이면 하늘에 빌어 더욱 오래도록 게을리하지 않으니 이에 온전히 낳을 수가 있었다. 그 뒤에 임종에 가까운 때에 안원극이 십 리 밖에 가서 약을 지어 돌아오는 중간에 아버지가 이미 절명했다는 말을 듣고 엎어지면서 문에 들어와서 손가락을 찍어 피를 쏟아 넣어서 회생되었다. 고을에서 여러 번이나 장계를 올렸더니 을사년(광무 9년, 1905)에 세금과 부역을 면제받았다. 덕산(德山)에 살았으니 지금의 산청(山淸)이다.
○ 양주현(梁柱賢) : 자는 성희(聖希)요, 호는 다은(茶隱)이며 본관이 남원(南原)이니 대사간(大司諫) 양사귀(梁思貴)의 후예다. 나이 17세에 아버지를 잃었는데 집이 가난하여 농사와 양잠에 힘을 다했다. 밤낮으로 게을리하지 않으니 꿰매는 것을 변화시켜 넉넉함을 이루었다. 홀로 된 어머니를 봉양함에 정성을 다했으니 매양 장날이 되면 몸소 가서 고기를 사서 이바지했다 평생에 일찍 아버지를 여의어 봉양하지 못한 것이 한이 되어 제삿날이면 애통함이 유난히 심해 살고자 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리고 윗대 조상의 묘소 모양이 갖추어지지 못한 것이면 이를 분별했고 제전(祭田)이 넉넉지 못하면 이를 족하게 했다. 지손가(支孫家)에 후손 없는 이가 있으면 이를 잇게 했고 재실(齋室)이 기울어지거나 흙더미가 된 것이 있으면 이를 덮어주어 모든 것을 잇는 것에 힘을 쓰지 않은 것이 없었다. 만년에는 회산(晦山) 이택환(李宅煥)과 수당(修堂) 최경병(崔瓊秉) 등 여러 공들과 함께 화계십일계(花溪十逸契)를 만들고 불러서 추종하고 소영(嘯詠)하면서 평생을 마쳤다. 다정(茶井)에 살았으니 지금의 하동(河東)이다.
○ 이지송(李志松) : 자는 정중(整仲)이요, 호는 모암(茅庵)이니 이휘인(李彙仁)의 아들이다.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웠으니 어머니가 병들자 손가락을 끊었고 상(喪)을 당해서는 3년 동안 술과 고기를 먹지 않았으며 기일(忌日)에는 피눈물로 밤을 지새웠다. 팔순에 이르러도 쇠하지 아니하고 마을의 규정을 닦아서 사람들의 풍속을 가다듬었다. 서실을 세워 자식과 조카들을 가르치며 전장과 토지를 덜어내어 종손가를 돕고 빈객을 대접하여 교유를 넓혔다. 가족들이 죽을 먹는 것이 이어지지 않아도 마음이 편안하고 침착했다. 개정(介亭)에 살았다.
○ 강태수(姜台秀) : 자는 극명(極明)이요, 호는 우재(愚齋)니 통정(通亭) 강회백(姜淮伯)의 후손이다. 아버지가 병들자 손가락을 끊고 똥을 맛보았으며 어머니가 중풍을 앓아서 손과 발을 쓸 수 없자 아침저녁으로 반드시 곁에서 숟가락을 잡아드렸다. 상(喪)을 당해서는 슬퍼하는 것이 예제(禮制)를 넘어섰다. 3년 동안 매일 성묘하여 비록 거센 바람이 불거나 큰 눈이 내릴지라도 거르지 않으니 사람들이 정성에 감동하여 성묘하는 길을 닦기에 이르렀다. 원당(元堂)에 살았다.
○ 이현선(李鉉宣) : 자는 찬화(燦華)요, 호는 농와(農窩)며 본관이 재령(載寧)이니 효자 이형(李蘅)의 후손이다. 일찍 아버지를 잃고 홀로 된 어머니를 모시더니 지극한 정성과 효도로 몸과 마음을 받드는 봉양을 다했다. 아침저녁의 문안에는 그 도리를 극진히 했으며 나이 예순이 넘어서 상(喪)을 당했는데 애통으로 떨어져 거의 끊어질 뻔했다. 더구나 매일 성묘를 했는데 추위나 더위를 핑계로 거르지 않았다. 3년 동안을 채소로만 식사를 하여 마침내 매우 수척해지는 병을 얻으니 향리에서 옛날 이연(二連)에 견주어 비겼다고 한다. 마진(麻津)에 살았다.
○ 한태동(韓泰東) : 자는 경장(景長)이니 본관이 청주(淸州)이다. 지조와 행실이 순결했고 효성과 우애는 하늘로부터 받았다. 집이 가난했으나 봉양함에는 반드시 맛있는 음식을 다했고 기쁜 소리와 화한 얼굴빛으로 어버이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기에 힘썼다. 새로운 맛이 있으면 비록 채소와 과일 자잘한 것일지라도 먼저 맛보고 난 뒤에 드렸다. 상고를 당해서는 슬퍼하여 거의 목숨을 잃을 뻔했다. 제물은 반드시 깨끗하게 했고 3년을 마치는데 예제(禮制)와 같이 하니 사람들이 모두 좋은 거상(居喪)이라고 일렀다고 한다. 정수(丁樹)에 살았다.
○ 이창규(李昌圭) : 자는 순원(舜遠)이니, 문렬공(文烈公) 이조년(李兆年)의 후손이다. 부모를 섬김에 몸과 마음을 갖춤이 지극했다. 집이 가난했는데도 날을 넘겨 장에 가서 진귀하고 신선한 것을 구해 봉양했다. 아버지가 등창이 나서 고름이 성하자 여러 달 동안 빨아서 낫게 하니 사람들이 모두 칭송했다. 만년에는 팔송정(八松亭)을 세워서 살았다. 조계(潮溪)에 살았다.
○ 정귀영(鄭貴永) : 본관이 연일(延日)이니 포은(圃隱) 선생의 후손이다.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나이 14세에 어머니가 다리 안쪽이 퉁퉁 부으며 앓자 정성을 다해 시탕(侍湯)하니 내종이 바로 나았으며 뒤에 등창을 앓았는데 8년 동안 빨아서 낳았다. 집이 가난해 품팔이를 했는데 맛있는 음식을 극진히 구해 드리니 동네 사람들이 상(賞)으로 포창했다. 한계(寒溪)에 살았으니 지금의 하동(河東)이다.
○ 정연석(鄭淵錫) : 자는 자연(子淵)이요, 본관이 해주(海州)이다. 어려서부터 부모를 섬김에 순순히 따라서 어기는 일이 없었다. 아버지가 병들자 손가락을 끊어서 하루 동안 회생했고 상을 당해서는 슬퍼함이 예제(禮制)를 넘으니 향리에서 이를 칭찬했다. 가곡(佳谷)에 살았다.
○ 양한조(梁漢祚) : 자는 윤숙(允淑)이요, 호는 남파(南坡)니 본관이 남원(南原)이다.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웠으니 어머니의 병색이 근심되어 똥을 맛보고 하늘에 빌었다. 상을 당해서는 슬퍼하다 명이 거의 끊어질 뻔했다. 상장(喪葬)의 모든 일을 한결같이 예제(禮制)를 따랐다. 날마다 성묘하여 살피고 배알했으니 비록 바람 불고 덥고 비가 오더라도 거르지 않았다. 늙어서도 또한 그러하니 향인들이 ‘양효자(梁孝子)’라고 칭찬했다고 이른다. 봉발(鳳鉢)에 살았으니 지금의 고성(固城)이다.
○ 채경진(蔡景珍) : 자는 방여(邦汝)요, 본관이 인천(仁川)이니 정의공(貞義公) 채귀하(蔡貴河)의 후손이다.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어려서부터 부모를 섬김에 몸과 마음의 봉양을 다했다. 나이 13세에 그 아버지가 다리에 침을 잘못 맞아 종기가 되어 여러 해 동안을 고생했다. 여러 가지 방도로 시탕(侍湯)하여 끝까지 쓰지 않은 것이 없었고 밤낮으로 고름을 빨아내어 마침내 완전히 합해지게 되었다. 또 어머니가 병들자 단(壇)을 쌓고 산에서 백 일 동안을 빌었더니 마침내 완쾌하게 되었다. 전후의 상(喪)에는 슬퍼하는 것이 예제(禮制)를 넘었다.
○ 양주두(梁柱斗) : 자는 자앙(子昻)이요, 호는 운정(雲汀)이며 본관이 남원(南原)이니 대사간(大司諫) 양사귀(梁思貴)의 후손이다. 5세에 아버지를 잃었는데 울부짖음이 심히 슬퍼서 듣는 사람이 얼굴을 움직였다. 항상 일찍 아버지를 잃은 지극한 아픔이 마음에 있어 매양 제삿날이면 슬퍼함이 유난히 심하여 살아 계시는 것과 같이 정성을 다했다. 또 집을 다스리는 데에 법도가 있어 예도(禮度)를 삼가했고 함께 교류하는 이들이 모두 일시의 이름난 이들이었다. 가덕(加德)에 살았으니 지금의 하동(河東)이다.
○ 강석무(姜錫武) : 자는 내경(乃敬)이요, 호는 일소헌(一笑軒)이며 본관이 진양(晉陽)이니 성재(誠齋) 하응태(河應台)의 후손이다. 벼슬이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이더니 어버이를 섬김에 그 정성과 효도를 지극히 하여 아침저녁의 문안을 거르는 일이 없었다. 어버이가 돌아가시자 슬퍼하는 것이 예제(禮制)를 넘어 3년을 마쳤다. 나라의 변란이 있은 뒤로는 문을 닫고 스스로 폐하여 통분함을 이기지 못했다. 사람이 위로하는 일이 있으면 공이 이르기를 “우리들이 비록 어리석고 미천하다 하더라도 차마 조국이 외방의 오랑캐에게 빠진 것을 보겠는가? 그러고서야 어떻게 살아가겠는가?”라고 했다. 정산(晶山) 이현덕(李鉉德)이 『전기(傳記)』를 지었다. 추동(樞洞)에 살았다.
○ 임주래(林柱來) : 자는 덕세(德世)요, 호는 매헌(梅軒)이니 본관이 나주(羅州)이다. 아버지의 병이 위독하자 손가락을 찍어 피를 쏟아 넣어서 마침내 회생하게 되었다. 아들 임취일(林就日)의 성품도 또한 지극히 효성스러워 한결같이 부도(父道)를 따라 지켰다. 손자 임경무(林敬武)도 아버지가 병들어 수년 동안 고생했는데 그의 아내 황씨(黃氏)와 함께 산에 백 일 동안을 빌었다. 꿈에 신인(神人)이 있어 영험한 약을 지시해주어 아버지의 병이 완전히 나았다. 향인들이 장계를 올려 포상을 청했으나 갚아지지 않았다. 후손이 삼효비(三孝碑)를 어옥리(於玉里)에 세웠다.
○ 임병태(林炳泰) : 자는 원숙(元淑)이요, 호는 기산(祈山)이니 본관이 나주(羅州)이다. 집이 가난하고 일찍 아버지를 여의게 되어 홀로 된 어머니를 봉양했는데 그 정성과 효도를 지극히 했다. 아침저녁으로 문안하고 온순하며 기쁘게 뜻을 받들어 조금도 어기거나 거스르는 일이 없었다. 상(喪)을 당하여 슬퍼함이 예제(禮制)를 넘었다. 3년 동안을 채소만 먹으니 향리에서 글을 올렸으나 정포(旌褒)되지 못했다. 사람들이 이를 애석하게 여기더니 후손들이 마을 앞에 비를 세웠다. 의성(義城) 김황(金榥)이 비문을 지었다.
○ 강선항(姜璿杭) : 자는 주려(周呂)니 설림(雪林) 강성조(姜聖祚)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어버이께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있으니 사람들의 이간하는 말이 없었다. 아버지가 병이 걸리자 아우 강주행(姜珠杏)과 더불어 여러 달 동안 시탕(侍湯)하여 밤에도 눈을 붙이지 않았다. 상(喪)을 당해서는 슬퍼하는 것이 예제(禮制)를 넘어섰다. 천성이 아름답고 깨끗하더니 작은 매화나무를 뜰 앞에 심어두고 “얼음 같은 자세와 옥 같은 몸으로 눈 속에서 웃고 있으니 그 마음 옛사람과 같기에 한없이 사랑하네.[氷姿玉骨雪中笑 最愛其心似故人]”이라는 시를 읊었다. 호를 매호(梅湖)라 했다. 설매(雪梅)에 살았다.
○ 구영서(具英書) : 자는 평언(平彦)이니 좌찬성(左贊成) 구성노(具成老)의 후손이다. 어려서부터 어버이 섬길 줄을 알았으니 밖에 나가서 특이한 맛있는 음식을 대하면 먼저 맛보지 않고 돌아와서 어버이께 드렸다. 집이 가난했으나 맛있는 음식이 끊이지 않았다. 그의 아내 해주오씨(海州吳氏)도 지아비의 뜻을 잘 체득하여 시어머니를 섬기기를 매우 공경히 했다. 시어머니가 병이 들어 자리에 누운 지 3년이 되었는데, 어느 날 산 꿩고기 먹기를 원했다. 부부가 하늘에 빌고 울부짖으니 홀연히 나는 꿩이 부엌 안으로 들어왔다. 잡아서 바치니 병이 마침내 효험을 보았다. 나이 이미 팔십을 넘겼는데도 날마다 한번씩 성묘하여 추위와 더위에도 거르지 않았다. 세상을 떠난 뒤에 쌍효비(雙孝碑)를 가정리(佳亭里)에 세웠으니 제학(提學) 이병관(李柄觀)이 비명(碑銘)을 지었다. 가정리(佳亭里)에 살았다.
○ 양익환(梁益煥) : 자는 도견(道見)이요, 본관이 남원(南原)이니 대사간(大司諫) 양사귀(梁思貴)의 후손이다. 계사년(고종 30년, 1893)에 무과에 합격했다. 천성이 지극한 효성이라 어버이를 섬김에 그 도리를 극진히 했다. 상(喪)을 당하여 슬퍼하는 것이 예제(禮制)를 넘었고 3년 안에는 여막 곁을 떠나지 않았다. 머리에 빗질을 하지 않았고 삼복의 더위에도 띠를 풀지 않았으며 날마다 한 번씩 성묘하여 비록 추운 때나 더운 때라 하더라도 거르지 않았다. 이웃이 감화되어 성묘하는 길을 닦는 일이 있었다. 양구(良邱)에 살았으니 지금의 하동(河東)이다.
○ 정연준(鄭然準) : 자는 원경(源卿)이요, 호는 일재(一齋)니 포은(圃隱) 선생의 후손이다. 타고난 바탕이 침착하고 장중했으며 학문과 식견이 넓었다. 어버이를 모심에 지극한 정성이 있어 몸과 마음의 봉양을 다했다. 부친이 마비(痲痹)를 앓아 7년이나 침상에 누워 있었는데 공은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았다. 변기와 요강 등의 도구를 몸소 스스로 씻고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않았다. 상(喪)을 당하여 슬퍼하는 것이 지나쳐 거의 죽음에 이를 지경이었다. 상제(喪祭)를 지킴에 예법(禮法)으로 했다. 집이 매우 가난하여 범벅과 죽이 넉넉지 못해 가족들이 항상 굶주린 빛이 있었으나 경우에 따라 편안히 여기고 고요해서 마음을 움직이는 바가 없었다. 동곡(東谷)에 살았다.
○ 성환구(成煥龜) : 자는 서일(瑞一)이요, 호는 후금(後琴)이며 본관이 창녕(昌寧)이니 금고(琴皐) 성석근(成石根)의 아들이다. 타고난 바탕이 강직하고 재주와 기량이 남보다 뛰어나서 글을 읽을 때에 눈으로 한 번 보면 외우게 되었다. 어버이 모시기에 극진히 효도했다. 부친의 성품이 매우 엄해 조금만 잘못이 있으면 문득 방안에 가두어 놓고 어지럽게 가죽 채찍으로 내리쳐 피를 흘리기에 이르렀으나 더욱더 공손히 하고 한 마디 말의 소홀함도 없었다. 어머니가 눈병이 있자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고 몸소 변소의 역(役)을 맡았다. 임종할 때에는 손가락을 끊어 입에 대었고 상제(喪制)대로 3년을 마쳤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남긴 흔적을 대할 때마다 울면서 눈물을 흘리니 족당(族黨)에서 그의 효성을 칭찬하고 혹은 감동하여 교화된 자도 있었다. 금동(琴洞)에 살았다.
○ 임병옥(林炳玉) : 자는 사규(士圭)요, 본관이 나주(羅州)이니 감무(監務) 임탁(林卓)의 후손이다. 아버지가 병이 들어 3년 동안 의원을 맞아 약으로 다스려서 이르지 않은 바가 없었다. 변기와 요강 등의 도구를 몸소 스스로 씻어 조금도 냄새나고 더러움이 없게 했다. 그리고 백 일 동안 산에 빌었더니 꿈에 한 노인이 와서 말하기를 “당산(堂山) 왼편 어디에 어느 약초가 있으니 네가 취하여 아버지의 병을 구하라.”고 했다. 잠을 깨어 가서 찾으니 과연 그 말과 같으므로 가지고 와서 달여 드리니 드디어 병이 좋아져서 천수(天壽)를 마쳤다. 어옥리(於玉里)에 살았다.
○ 박수례(朴秀禮) : 본관이 밀양(密陽)이니 박원택(朴源宅)의 아들이다.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아버지의 병이 위독해 의원을 불러 약으로 다스렸으나 마침내 영험이 없었다. 의원이 이르기를 “만일 개의 간 백 개를 먹으면 효험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집이 매우 가난하여 얻기가 어려웠으므로 밤낮으로 울부짖었다. 어느 날 밤에 호랑이가 개를 던져주므로 이를 드리니 아버지의 병이 점점 회생되어 천수(天壽)를 마쳤다. 장안리(長安里)에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