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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600498
한자 濟州邑誌
분야 지리/인문 지리,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기록 유산
유형 문헌/전적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송문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소장처 서울대학교 규장각 - 서울특별시 관악구 신림동 산56-1
성격 읍지
표제 제주읍지

[정의]

18세기 후반 관청에서 편찬한 것으로 추정되는 제주·대정·정의 3읍의 읍지.

[개설]

『제주읍지』는 편자, 편년 미상의 제주·대정·정의 읍지로, 1780년부터 1782년경까지 작성된 「제주읍지」·「대정현지」·「정의현지」를 저본으로 편찬한 후사본(後寫本)으로 보이는 책이다. 1789년 간행된 『호구총수』와 1793간행된 『제주대정정의읍지(濟州大靜旌義邑誌)』의 호구수와 비교해 볼 때 1780년부터 1789년 사이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된다.

[서지적 상황]

『제주읍지』는 1책 38장의 필사본으로 크기는 26.5㎝×18.7㎝이며 서울대학교 규장각[규 10796]에 소장되어 있다.

[구성/내용]

『제주읍지』는 관청이 아닌 민간에서 편찬한 『탐라지(耽羅志)』와 달리 시(詩)와 제영(題詠) 등 인문적인 요소는 거의 배제되어 있다. 아울러 구성이 조선 후기 사회경제 변화상을 반영한 영조 년간의 『여지도서(輿地圖書)』처럼 항목이 신설되거나 세분화 되어 있다.

즉, 방리(坊里)조에 민호(民戶)의 수와 남녀 인구수를 자세히 기록하였고, 도로(道路) 항목을 신설하여 대로(大路)·중로(中路)·소로(小路)로 구분하였다. 또 전결(田結)을 수전(水田)과 한전(旱田)으로 나누고 제언(堤堰) 항목을 신설하여 농업관련 시설을 기록하고 있다.

지금의 서귀포시에 해당하는 지역의 내용은 「대정현지(大靜縣誌)」와 「정의현지(㫌義縣誌)」에 기록되어 있다.

구성은 방리(坊里)·도로(道路)·건치연혁(建置沿革)·군명(郡名)·형승(形勝)·성지(城池)·관직(官職)·산천(山川)·성씨(姓氏)·풍속(風俗)·단묘(壇廟)·공해(公廨)·제언(堤堰)·창고(倉庫)·물산(物産)·교량(橋梁)·역원(驛院)·목장(牧場)·관애(關阨)·봉수(烽燧)·누정(樓亭)·사찰(寺刹)·고적(古跡)·진보(鎭堡)·인물(人物)·한전(旱田)·수전(水田)·진공(進貢)·조적(糶糴)·전세(田稅)·대동(大同)·균세(均稅)·봉름(俸廩)·군병(軍兵)·책판(冊板) 순으로 되어 있다.

또 「대정현지」와 「정의현지」에는 「제주읍지」에 있는 방물(方物)·발참(撥站)·수군(水軍)·전선(戰船)조가 없고 대신 제언(堤堰)·창고(倉庫)·물산(物産)·원(院)에 대한 기록이 있어 당시 서귀포 지역의 특징을 보여 준다

당시 대정현은 2면(面) 22리(里)에 1,704호의 민호(民戶)가 있었고 여기에 남자 3,653명, 여자 4,810명이 살고 있었다. 도로는 관문(官門)에서 동·서·남쪽의 대로(大路)와 북쪽의 중로(中路), 그리고 동남·서남·서북쪽으로 가는 소로(小路)가 있었다.

천지연(天池淵) 부근에 을사년에 새로 만든 원(院)이 있었는데 말[馬]을 점락(點烙)하는 곳이었다. 또 주요 요충지[關阨]로서 황우치(黃牛峙)를 기록하였는데 산방산 남쪽 부근 도로의 좁고 험한 곳에 있다고 하였다. 제언(堤堰)으로 봉우지(逢雨池)가 있었는데 둘레가 약 150m[52장(丈)]이고 깊이는 1.5m[5자[尺]] 정도였다.

정의현은 3면(面) 38리(里)에 민호(民戶) 2,325호의 가구가 있었고 여기에 남자 6, 306명, 여자 8,100명이 살고 있었다. 도로는 동·서쪽의 대로와 북쪽의 중로, 그리고 남쪽의 소로가 있었다. 정방연(正方淵)에 제언(堤堰)이 있었는데 둘레가 약 160m[58장(丈)]이었다.

[의의와 평가]

『제주읍지』는 18세기 후반 제주 지역의 상황을 잘 기록해 놓았으며 특히 서귀포 지역의 원(院)의 성격과 도로망, 그리고 수리시설의 규모를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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