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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600455
한자 朝鮮時代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집필자 강창룡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416년 - 대정현·정의현 설치
특기 사항 시기/일시 1700년 - 객사동헌 중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740년 - 종각(鐘閣) 건설
특기 사항 시기/일시 1765년 - 대정읍성 축조
대정현 - 서귀포시 중심부 서쪽인 옛 중문면안덕면·대정읍 일대에 있었던 옛 행정 구획
정의현 - 태종 16년(1416)부터 1910년까지 서귀포시 중심부 동쪽 옛 서귀읍과 남원읍·표선면·성산읍 일대에 있었던 옛 행정 구획

[정의]

1392년부터 1910년까지 조선 왕조가 지속된 시기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지역의 역사.

[조선시대의 서귀포 관아]

1. 대정현(大靜縣)

대정현은 1416년(태종 16)부터 1910년까지 서귀포시 중심부 서쪽인 옛 중문면안덕면·대정읍 일대에 있었던 옛 행정 구획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대정현의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정의현(旌義縣)과의 경계까지 57리이고, 남쪽으로 바다까지 10리이며, 서쪽으로는 제주목(濟州牧)과의 경계까지 37리이고, 북쪽으로는 제주목과의 경계까지 32리였다.

1416년에 대정현을 설치하고 현감(縣監)을 두었다. 이 해 5월에는 제주목에 동도 도현의 신촌현·함덕현·김녕현과 서도 도현의 귀일현·고내현·애월현·곽지현·귀덕현·명월현을 소속시켰다. 동도의 현감은 정의현을 본읍(本邑)으로 삼고, 토산현·호아현·홍로현 3현을 소속시키고, 서도의 현감은 대정현을 본읍으로 삼아 예래현·차귀현 2현을 소속시켰다.

대정읍성(大靜邑城)은 1765년(영조 45)부터 이듬해까지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4,890척(尺)[1,480m]이고, 높이는 17척 4촌(寸)[5.2m]이었다. 타첩(垜堞)은 155개이며 동·서·남쪽에 3개 문이 있고, 문 위에 모두 초루(譙樓)를 설치하였다. 또 위에는 5개의 격대(擊臺)가 있으며 성장(城將) 2인과 치총(雉摠) 4인, 성정군(城丁軍) 373명이 있었다.

대정현의 객사 동헌(客舍東軒)은 북성(北城) 안에 있으며, 1700년(숙종 26년) 대정 현감 황순(黃恂)이 중건하였다. 동헌(東軒)은 객사(客館) 서남쪽에 있고, 관청은 동헌 동쪽에 있다. 이 관청은 주방으로 보인다. 향소청(鄕所廳)은 객사 남쪽에 있으며 좌수(座首) 1인과 별감(別監) 2인이 있다. 질청[作廳]은 관아 남쪽에 있으며 기관(記官)·서원(書員)·지인(知印)이 같이 회합하고 있다. 종각(鐘閣)은 곧 동헌 밖에 있는 대문으로 1740년(영조 16)에 대정 현감 신명대(申命大)가 세웠다.

가솔청(假率廳)은 객사 앞에 있으며, 수효는 출신(出身)이 13인이고 가솔(假率)과 별무사(別武士)를 합쳐 83인이며, 기패(旗牌)와 치총(雉摠)을 합쳐 6인이다. 진무청(鎭撫廳)은 객사 남쪽에 있으며 수효는 40명이다. 무학청(武學廳)은 1747년에 신설하였는데 수효는 54명이다. 또 누정(樓亭)으로는 청풍루(淸風樓)가 객사 동쪽에 있었는데, 중간에 폐지되었다가 1705년(숙종 31)에 대정현감 김순신(金舜臣)이 다시 세웠다.

대정현은 1864년(고종 1)에 대정군(大靜郡)으로 승격되었다가 1880년에 다시 대정현으로 환원되었다. 또 1895년에 제주목(濟州牧)이 제주부(濟州府)가 되자 대정현대정군(大靜郡)이 되었고, 1914년에 대정군을 폐지하므로 제주군에 통합되었다.

2. 정의현(旌義縣)

태종 16년(1416)부터 1910년까지 서귀포시 중심부 동쪽 옛 서귀읍과 남원읍·표선면·성산읍 일대에 있었던 옛 행정 구획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정의현의 사방 경계로는 동쪽으로 제주목(濟州牧) 경계까지 26리이고, 북쪽으로 제주목 경계까지 20리이며, 서쪽으로는 대정현(大靜縣) 경계까지 37리, 남쪽으로 바다까지 7리였다,

1416년에 행정 구획을 개편하여 정의현을 두었는데, 정의읍성은 현재 성산읍 고성리에 있었다. 하지만 고성리에 있었던 정의읍성은 땅이 우도(牛島)에 가까워서 새벽과 밤에 고각(鼓角) 소리가 들리고 큰 바람이 여러 번 불어서 곡식이 흉년들었을 뿐만 아니라 왜적이 번갈아 침입하여 노략질하였다. 이에 1422년(세종 4)에 정의읍성을 진사리로 옮겨 쌓았다.

정의읍성은 1423년(세종 5)에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2,986척(尺)[1,480m]이고, 높이는 24척[7.2m]이다. 1498년(연산군 4)부터 1506년(중종 1) 당시 동헌(東軒)은 객사 건물의 서쪽에 있었다. 곧 객사 건물 가운데에는 대청(大廳)이 있고, 좌우에는 부속집[府舍]이 있었다.

그러다가 1765년(영조 45)부터 이듬해의 정의현 관아 시설로는 동헌(東軒)·관청(官廳)·향소청(鄕所廳)·출신청(出身廳)·무학청(武學廳)·질청[作廳] 등이 있었다. 동헌 건물은 객사(客舍) 서북쪽에 있고, 동헌 남쪽에는 관청(官廳)이 있었다. 이 관청은 주방으로 보이는데 수령과 그 가족들의 식생활 및 공사 빈객의 접대와 각종 잔치에 필요한 물품의 조달을 하였다.

객관의 서쪽에는 향소청(鄕所廳)이 있었다. 이 향소청 안에는 출신청(出身廳)과 무학청(武學廳)이 있었다. 또 동헌 동쪽에는 질청[作廳]이 있었으며, 이곳에서 기관(記官)·서원(書員)·지인(持印) 등이 같이 근무하였다. 동헌 뒤에는 산정(山亭)이 있었는데, 여기에 활터[射場]가 있었다.

정의현은 1864년(고종 1)에 정의군(旌義郡)으로 승격되었다가 1880년에 다시 정의현으로 환원되었다. 또 1895년에 제주목(濟州牧)이 제주부(濟州府)가 되자 정의현도 정의군(旌義郡)이 되었다가 1914년에 정의군을 폐지하므로 제주군(濟州郡)에 통합되었다.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3.12.20 [조선 시대의 서귀포 관아] 한자 수정 <변경 전> 가솔청(家率廳)은 객사 앞에 있으며, 수효는 출신(出身)이 13인이고 가솔(家率) <변경 후> 가솔청(假率廳)은 객사 앞에 있으며, 수효는 출신(出身)이 13인이고 가솔(假率)
이용자 의견
초**** 가솔청과 가솔의 가는 '假' 자를 씁니다.
  • 답변
  • 디지털서귀포문화대전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해당 부분 확인 후 수정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2013.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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