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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600504
한자 南宦博物
분야 지리/인문 지리,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기록 유산
유형 문헌/전적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송문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저술 시기/일시 1704년연표보기 - 제주목사 출신 이형상(李衡祥), 『남환박물(南宦博物)』 저술
소장처 완산(전주)이씨병와공파종회 - 경상북도 영천시 성내동 97-1번지 호연정 유고각
성격 인문지리지
저자 이형상
표제 남환박물

[정의]

1704년(숙종 30) 조선 후기의 문신 이형상(李衡祥)이 저술한 제주도 인문지리지.

[개설]

이형상[1653~1733]이 제주도의 자연·풍속·인물·토산·고적·관방 등을 37개 항목으로 나누어 기록한 것으로, 제주 목사에서 물러난 52세 때[1704년] 경상북도 영천 호연정(浩然亭)에서 완성하였다.

[편찬/간행 경위]

『남환박물』 첫 장에 “효언이 탐라의 고적을 알고 싶어하여 13,850여 언(言)로 지어 보낸다.’라고 되어 있어 윤두서(尹斗緖)의 요청에 의해 찬술(撰述)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서지적 상황]

1권 1책의 필사본으로, 크기는 34.2cm×21.0cm이다[국가기록유산 누리집 서지 사항]. 그런데 청권사 간행 『병와연보』의 「병와유고」 목록을 보면 2종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는 ‘갑신 초추 제우영양지호연정(甲申 初秋 題于永陽之浩然亭)’이 기록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북설습령(北屑拾零)」이 덧붙여진 것이다.

[구성/내용]

『남환박물』은 항목 및 내용 구성에서 당시 『읍지』의 체제와 비슷하다. 그러나 실제 관찰을 통해 항목을 기술하고, 『동국여지승람』, 임제『남명소승』, 김상헌『남사록』, 최부의 『표해록』 등을 참고하여 사실 여부를 기록한 점에서 『읍지』와 다르다. 내용은 「지노정(誌路程)」에서 「황복원대가(荒服願戴歌)」까지 37개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형상이 기록한 서귀포시 지역의 모습은 노정(路程)·바다[海]·섬[島]·지리[地]·경승[勝]·풍속[俗]·문[文]·목장[馬牛]·물고기[魚] 항목 등에 나타난다. 정의현은 22개의 리에 1,436호가, 대정현에는 12개의 리에 797호로 살고 있었다. 시비(侍婢)를 목자(牧子)의 보인(牧保)으로 삼을 정도로 여자의 역(役)은 매우 무거웠다.

몇몇 항목에서 대정현정의현의 특색이 드러나는데, 무논[水田]은 대정현에, 소금밭[鹽田]은 정의현에 있었다. 또 숭어[秀魚]와 백합(白蛤)은 정의현에서만 잡을 수 있었고, 대정현에서는 게[蟹]와 굴조개[牡蠣]가 나고 있었다. 과원(果園) 가운데 경승이 뛰어난 곳은 정의현의 성산원(城山園)과 대정현의 염둔과원(羔屯果園)이었다.

[의의와 평가]

『남환박물』은 18세기 초반 서귀포시 지역의 특산물과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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