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렉토리분류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600921
한자 姜成健
이칭/별칭 강붕해(姜鵬海),송산금생(松山金生)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동홍동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이규복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15년연표보기 - 강성건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34년 - 강성건 제주농업학교 졸업
활동 시기/일시 1942년 10월 24일 - 강성건 군사기밀 누설로 수감됨
활동 시기/일시 1947년연표보기 - 강성건 남제주군 독립청년회 결성
활동 시기/일시 1950년 4월 1일연표보기 - 강성건 제주도 청년방위대장에 방위 중령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52년연표보기 - 강성건 제주도의회 의원 당선, 부의장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56년연표보기 - 강성건 제주도의회 재선의원으로 당선
활동 시기/일시 1958년연표보기 - 강성건 제주도의회 의장 당선
활동 시기/일시 1961년연표보기 - 강성건 재건국민운동 남제주촉진회장으로 활동
추모 시기/일시 1993년 - 강성건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몰년 시기/일시 2009년 10월 9일연표보기 - 강성건 사망
출생지 강성건 출생지 - 서귀포시 동홍동
묘소 강성건 묘소 - 서귀포시 상효동
성격 독립운동가|교육자|현대 정치가
성별
대표 경력 제주도 청년방위대 방위 중령, 제주도의회 의원, 부의장, 의장, 재건국민운동 남제주군촉진회장

[정의]

일제강점기 서귀포시 동홍동 출신의 독립운동가·교육자·현대 정치가.

[가계]

본관은 진주(晋州)이며, 아버지는 강문옥(姜文玉)이다.

[활동 사항]

일본명 송산금생(松山金生), 본명은 강붕해(姜鵬海)이다. 강성건은 후에 개명한 것이다. 1934년 제주농업학교를 졸업하였고 서귀고등학교 교사로 재임하기도 하였다.

강성건(姜成健)은 조부의 영향을 받아 어릴 때 세례를 받았다. 1941년 10월, 강성건은 1938년·1939년·1941년에 서귀포 성당의 신자들이 외국인 신부 라이언에게 군사기밀을 말했다는 이유로 외국인 신부들과 천주교 신자 수명과 함께 군사기밀 누설이라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국방보안법위반, 군기보호법위반’으로, 징역 1년과 금고 10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 사건은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영·미에 선전포고 후 천주교 신도들을 탄압하고, 동시에 외국인 신부(神父)들에 대한 경계심을 강화하키기 위한 고도의 전략차원에서 날조한 사건이었다.

해방 후 그는 좌익계에 맞서 우익활동에 앞장섰다. 1947년 4월 30일 서귀포 성당에 대의원 138명이 모여 남제주군 독립청년회를 결성하였는데, 명예의장에 이승만·김구를 추대한 후 위원장은 강성건, 부위원장은 김문숙(金文淑)·김유겸(金有謙)을 선출하였다. 이후 대동청년회 제주도지부가 독립청년회를 중심으로 결성되고 민주독립당의 발기인이 되었으나, 강성건이승만·김구 노선을 사수하기 위하여 1948년 1월 25일 성명서를 발표하고 탈퇴하였다. 이후 1950년 4월 1일에 제주도 청년방위대가 조직되었는데, 이때 그는 1개월간의 군사 교육을 거쳐 예비역 육군 소위로 임관되어 제주도의 방위대장으로 방위 중령에 임명되었다.

1952년 5월 10일에는 제주도의회 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어 부의장을 하였고, 1956년 8월 13일 실시된 제2대 도의회 의원선거에서 남제주군 제4선거구[서귀읍]에서 당선되어 재선의원이 되었다. 1958년 제10대 도의회에서 의장에 선출되었고, 1959년에는 강재량 의장의 후임으로 또다시 의장직에 당선되기도 하였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시에는 재건국민운동 남제주군촉진의장으로, 1965년 1월 16일에 조직된 서귀읍 개발위원회의 위원으로 시(市) 승격에 앞장서 활동하였다. 1995년 8월에는 광복회 제주도지부장으로 선출되어 생존 독립 유공자와 그 유족에 대한 복지문제에 관심을 쏟으며 만년을 보냈다. 2009년 10월 9일 제주에서 사망하였다.

[묘소]

서귀포시 상효동 가족묘지에 안장되었다.

[상훈과 추모]

독립운동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9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상하였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