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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위종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601021
한자 姜渭鍾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안덕면 창천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이규복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09년연표보기 - 강위종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42년 - 강위종 메이지대학 문학부 지리역사과 입학
활동 시기/일시 1946년 5월 - 강위종 순국열사유골봉안회 조직
활동 시기/일시 1950년 - 강위종 태평양전쟁 한국인 전몰자 유골봉안회 조직
활동 시기/일시 1955년 - 강위종 태평양전쟁 한국인 전몰자 명단 발견
추모 시기/일시 1975년 6월 19일 - 강위종, 국민훈장 동백장 수상
활동 시기/일시 1982년 10월 - 강위종 일제하 한국인 전몰자 위령제 거행
몰년 시기/일시 1988년연표보기 - 강위종 사망
출생지 강위종 출생지 - 서귀포시 안덕면 창천리 지도보기
학교|수학지 명치대학 - 일본 도쿄도 지요다구 스루가다이
성격 사회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조선신보사 사장|태평양전쟁 한국인전몰자 유골봉안회 회장

[정의]

서귀포시 안덕면 창천리 출신의 사업가이며 사회 운동가.

[활동 사항]

1909년 서귀포시 안덕면 창천리에서 강규빈(姜奎彬)의 아들로 태어난 강위종(姜渭鍾)은 1942년 일본으로 건너가 낭화(浪華)상업학교를 졸업하고 메이지(明治)대학 문학부 지리역사과에서 수업하던 중 1945년 광복 이후 ‘재일조선문화단체연합회’ 산하 언론기관인 조선신보사 사장으로서 일본에서 동포의 권익옹호와 조국 재건사업에 앞장서서 활동하였다.

또한 1946년 5월부터 일본에 방치되었던 순국열사들의 유해를 조국에 봉환(奉還)하는 사업을 추진하였는데, 이를 위하여 순국열사유골봉안회를 홍현기(洪賢基)·박근세(朴根世) 등의 동지들과 함께 조직하여, 이봉창(李奉昌)·윤봉길(尹奉吉)·백정기(白禎基) 등 열사들의 유해를 찾아 서울 효창공원(孝昌公園)에 봉송 안장하였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태평양 전선에서 전사한 동포들의 유해를 송환하는 사업에 착수하여 1950년에는 동지들과 함께 ‘태평양전쟁 한국인전몰자 유골봉안회’를 조직하여 회장이 되었다. 이후 1955년 일본 후생성(厚生省)에서 한국인 전몰자 명단을 찾아 내었는데, 1971년 3월 5일 『경향신문』 보도를 통한 당시 상황을 살펴보면, “재일태평양전쟁 한국인 전몰자 봉안회 회장인 강위종씨가 일본 후생성 관리들과 오랜 교섭 끝에 2천3백 31위의 전몰자 명단을 알아냈으나 일본 정부의 비협조적인 태도와 조총련계의 방해공작 등으로 지금까지 유골이 송환되지 않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그는 재일교포 실업가로서 사재(私財) 5천만원을 기부하고, 국내 저명인사들과 함께 봉환사업에 힘쓰고 있었다.

이러한 봉환사업의 어려움 속에서도 911주(柱) 유골의 유족을 찾아내어 고국으로 봉환하고 유족을 찾지 못한 700주의 유골은 동경 유천사(裕天寺)에 봉안한 후 한국정부에 인계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활동으로 1975년 6월 19일 외무부와 보건사회부의 추천으로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여받았다.

강위종은 한국인민문화단체연합회의 회장으로서 재일교포의 권익옹호와 함께 문화 사업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일본 교과서 왜곡사건으로 일제의 한국 침략행위에 대한 반성이 없는 것에 대하여 이를 각성시키고자 1982년 10월 25일에 도쿄 축지(築地)의 본원사(本院寺)에서 ‘일제하 한국인 전몰자 위령제’를 거행하기도 하였다. 또한 1983년 12월 10일에는 서울에서 열린 ‘한일 불교 대표자회의’에 참가하여 한국인 전몰자 유해 봉환사업에 대한 이해를 촉구하기도 하였다. 1988년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75년 6월 19일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상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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