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4100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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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순(牟恂) : 세종(世宗) 때에 과거에 급제해 벼슬이 좌사간(左司諫)에 이르렀다. 어머니의 종기를 빨아서 낫게 했고 또 어머니가 병들었을 때에 똥을 맛보았다. 일이 조정에 알려져서 정려(旌閭)되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나와 있다.
○ 군만(君萬) : 광대이다. 그의 아버지가 밤에 호랑이에게 물려가자 군만이 하늘을 부르고 아침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활과 활촉을 가지고 산으로 들어가니 호랑이가 먹기를 다하고 양지 바른 곳에 등을 지고 있다가 군만을 보고 ‘으르렁’거리면서 앞에 먹은 아버지의 사지를 토했다. 군만이 화살 하나로 쏘아 죽이고 칼을 뽑아 그 배를 갈라서 남은 뼈를 다 거두어 태워서 장사지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나와 있다.
○ 득비(得妣) : 아버지 김계남(金繼南)이 간질병에 걸려 4년이 되어도 낫지 않았는데 득비가 산 사람의 뼈와 살을 먹으면 낳을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스스로 그의 왼쪽 넷째 손가락을 끊어 먹였다. 이로써 드디어 그 병이 낳으니 성화(成化) 8년(성종 3년, 1472)에 정려(旌閭)되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나와 있다.
○ 김백산(金白山) : 16살에 아버지가 범에게 물려가니 백산이 낫을 휘둘러 범을 쳐서 아버지가 죽음을 면하게 되었다. 성종 9년에 정려(旌閭)되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나와 있다.
○ 박인(朴氤) : 자는 자복(子馥)이요 본관이 태안(泰安)이다. 정성스러운 효도가 하늘에서 나왔고 항상 선비의 행실로써 몸을 가지더니 연산군(燕山君) 시절에 단상법(短喪法)을 엄하게 실시했으나 공은 홀로 여묘(廬墓)에서 복제대로 마쳤다. 중종(中宗) 때에 이 일이 알려지니 “떳떳한 윤리를 돈독하게 지키고 임금의 도끼를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포장(褒狀)이 있었고 이어 정려(旌閭)를 명령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나와 있다. 말동(末洞)에 살았다.
○ 강응태(姜應台) : 자는 대림(大臨)이다. 가정(嘉靖) 임진년(중종 27년, 1532)에 별과에 올라 한림(翰林)을 거쳐서 맑은 관직을 두루 지냈다. 나이 겨우 십여 세에 아버지가 모진 병에 걸렸는데 손가락을 끊어서 약에 타서 드리니 병이 나았다. 또 중종과 인종(仁宗)의 상을 입으니 충과 효를 함께 다했으므로 일이 조정에 알려져서 정려(旌閭)되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나와 있다. 금산(琴山)에 살았다.
○ 정묵(鄭黙) : 이전 왕조인 고려 때에 사정(司正)을 지냈더니 묘를 대동(大同)에서 지키며 3년 동안 한 번도 집에 가지 않았다. 일이 조정에 알려져서 정려(旌閭)되었다.
○ 신상용(申尙容) : 순창(淳昌)의 선비이니 호남으로부터 옮겨와서 덕산(德山)에 살았다. 사람됨이 용모와 기상이 화락하고 단아했으며 지극한 효심은 하늘로부터 타고났다. 부친상을 당해서는 죽을 3년 동안 마시고 밤낮으로 피눈물로 울어서 시력을 잃는 데에 이르렀다. 일이 조정에 알려져서 정려(旌閭)되었다.
○ 이경훈(李敬訓) : 참봉(參奉) 이일민(李逸民)의 아들이다. 아버지가 중풍을 앓아서 한쪽 발을 못 쓰더니 언제나 지극히 봉양하여 효도를 다했다. 임진왜란 중에 아버지를 업고 산에 숨었는데 산을 뒤지던 왜적이 갑자기 닥쳐와서 아버지를 해치려 하자 몸으로 덮었으나 왜적이 함께 죽였다. 일이 조정에 알려져 정려(旌閭)되었다. 대여촌(代如村)에 살았다.
○ 윤사관(尹思寬) : 부장(部將) 윤춘란(尹春蘭)의 아들이다. 그 집에 불이 났는데 늙은 어미가 방에 있으면서 나오지 못하자 윤충관이 뜨거운 불 속으로 바로 들어가서 어머니를 업고 나오다가 불이 옮겨 붙어 모자가 함께 죽었다. 일이 조정에 알려져 정려(旌閭)되었다. 대여촌(代如村)에 살았다.
○ 김태현(金台鉉) : 훈도(訓導). 집이 가난했으나 어버이를 봉양함에 있어 반드시 맛있는 음식을 갖추었다. 나이 늙어 상을 당했더니 슬퍼함이 예를 넘어 채소와 과실을 먹지 않고 3년 동안 죽을 마셨다. 청원리(淸源里)에 살았다.
○ 이하는 모두 정려되지 못했다.
○ 성두년(成斗年) : 증우윤(贈右尹). 자는 추지(樞之)요 본관이 창녕(昌寧)이며 교리(校理) 성안중(成安重)의 손자요 성일휴(成日休)의 아들이다.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어버이를 섬기는 예는 반드시 법도를 옛 사람에게서 취했다. 저녁에 잠자리를 돌봐 드리고 아침에 문안하는 것을 빠뜨리는 일이 없었다. 맛있는 음식을 넉넉하게 했고 소리를 부드럽게 하며 얼굴빛을 온화하게 하여 그 마음과 뜻을 기쁘게 하기에 힘썼다. 그가 상을 당하기에 이르러서는 울고 슬퍼함이 거의 실신할 지경에까지 이르렀고 친히 제물을 마련하되 청결을 다했다. 새로운 물건이 있으면 비록 적은 채소와 과일일지라도 먼저 올리고 난 뒤에 먹었다. 전후의 상에는 모두 묘의 곁으로 나아가서 여막을 지켰고 서모(庶母) 섬기기를 친어머니를 섬기듯 했으며 서제(庶弟)를 사랑하기를 같은 배에서 난 것과 같이 했다. 서제 4인이 공천(公賤)으로써 모두 천역에 종사하더니 공이 그 몸을 속(贖)받아 함께 양인이 되게 하니 향리에서 이를 착하게 여겼다. 대여촌(代如村)에 살았다.
○ 강열(姜洌) : 사직(司直). 효자 강응태(姜應台)의 아들이다. 효성과 우애가 하늘로부터 타고나서 집안의 명성을 떨어뜨리지 않았다. 제사를 받들 때는 정성으로써 했고 어버이를 섬길 때는 예로써 했다. 분가한 곳이 3리쯤에 있었는데도 저녁에 잠자리를 돌봐 드리고 아침에 문안하는 것을 어기지 않았다. 비록 큰바람이나 비가 있어도, 매서운 추위나 심한 더위일지라도 아침에 일찍 와서 저녁 늦게 돌아갔다. 이러기를 하루도 거르지 않으니 향인(鄕人) 사람들로서 탄복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진성리(晉城里)에 살았다.
○ 박안방(朴安邦) : 증좌승지(贈左承旨). 효자 박인(朴氤)의 손자다. 형제간의 우애가 매우 두터웠으니 재산을 나눌 때는 스스로 매우 박한 것을 취했고 그 뒤에도 형제 중에 군색하고 모자라는 자에게 나누어 주니 사람들이 “어려운 일을 한다.”고 말했다. 말동리(末洞里)에 살았다.
○ 박안실(朴安室) : 유학(幼學). 효자 박인(朴氤)의 손자다. 항상 『소학(小學)』 1부를 가지고 몸의 법도로 삼아 조금도 하자가 없었다. 부모의 상을 당해서는 죽을 마시고 슬퍼하고 애통해 했으며 밤낮으로 항상 빈소 곁에 있으면서 상복을 벗지 않았다. 아침저녁으로 전을 드릴 적에는 친히 스스로 그릇을 씻고 반찬을 가지고 올렸으며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울면서 곡하니 거의 시력을 잃게 되었다. 사당(祠堂)의 의도(儀度)에 혹 예답지 못한 것이 있으면 토지를 팔아서 마련했다. 또 여러 가지 일의 처사에 있어서도 반드시 예법을 따랐으며 한 가지 일도 구차스러움이 없었다. 말동리(末洞里)에 살았다.
○ 정인평(鄭仁平) : 생원(生員). 현감(縣監) 정세창(鄭世昌)의 아들이다. 나이 늙어서 어머니 상을 당했는데 슬퍼하며 죽을 마셨다. 그 아우 정만호(鄭萬戶) 정순평(鄭順平)도 죽을 마시다가 상중에 죽었다. 진성리(晉城里)에 살았다.
○ 정혁(鄭赫) : 유학(幼學). 진사 정대호(鄭大護)의 아들이다. 어머니가 병들어 점점 심해지니 손가락을 잘라 약에 타서 올렸다. 상사리(上寺里)에 살았다.
○ 채충남(蔡忠男) : 어머니를 지성으로 봉양했는데 어머니가 병들자 목욕하고 하늘에 빌었다. 돌아가자 슬퍼함이 예를 넘었으며 여묘에서 죽을 마셨다. 설매리(雪梅里)에 살았다.
○ 모언수(牟彦壽) : 효자. 사간(司諫) 모순(牟恂)의 후손이다. 부모가 일시에 함께 돌아가니 6년 동안 계속해서 상을 입었다. 상사리(上寺里)에 살았다.
○ 오인(吳仁) : 그 아버지가 등창이 나서 거의 죽게 되었는데 오인이 농즙(濃汁)을 빨아서 낫게 했다. 수곡리(水谷里)에 살았다.
○ 박호문(朴好問) : 어머니가 병들자 손가락을 잘라서 드렸더니 그 병이 과연 나았다. 비나곡리(非那谷里)에 살았다.
○ 정응진(鄭應軫) : 유학(幼學). 어머니상을 당해서는 3년 동안 죽을 먹고 제사를 모실 때는 예로서 했다. 또 명종(明宗)의 상을 3년 동안 입었다. 대평(大坪)에 살았다.
○ 김명(金銘) : 유학(幼學). 김명은 천성이 절조를 굳게 지켜 세속과 구차스럽게 화합하지 않았다. 어버이가 병들자 손가락을 잘라서 드리니 그 병이 나았다. 백곡(柏谷)에 살았다.
○ 이구정(李九鼎) : 사인(士人). 아버지의 상을 당해 3년 동안 죽을 마셨고 슬퍼한 나머지 몸이 쇠약해져 본성을 잃게 되었다. 백곡(柏谷)에 살았다.
○ 진인(陳寅) : 자는 양초(養初)요 백곡(柏谷) 진극경(陳克敬)의 아들이다. 배움에 힘써 게을리하지 않았고, 배부르고 따뜻한 데에 뜻을 두지 않았다. 그 어머니가 병이 들어 심하게 되자 손가락을 끊어서 바쳤고 상을 당해서는 한결같이 『가례(家禮)』를 지켰다. 3년 동안 집에 한 사람의 종도 두지 않고 날마다 돌을 짊어져 묘의 둘레를 쌓았다. 기축옥사(己丑獄死)의 화가 일어나서 수우당(守愚堂)이 붙잡히니 진인은 걸어서 서울에 이르러 늘 옥문(獄門) 앞에 서 있기를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수우당이 놓여나자 사례할 틈도 없이 남쪽으로 왔으니 장차 기쁨을 그 어버이께 알려드리기 위해서였다. 온 집안에 효우했고 어진 사람 섬기기를 정성스럽고 돈독하게 했다. 불행히도 일찍 죽으니 애석한 일이었다. 백곡리(柏谷里)에 살았다.
○ 하항(河恒) : 자는 자징(子徵)이요 생원 하위보(河魏寶)의 아들이다. 힘써 배우고 독실하게 행했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에게 우애했으며 붕우에게 신의가 있었으니 사람들의 이간하는 말이 없었다. 어머니 상을 당해서는 여막에서 3년을 지내면서 몹시 슬퍼한 나머지 병을 얻었다.
집터를 송강(松江) 위 관어정(觀魚亭)의 북쪽 백 보쯤에 가려서 서재를 짓고 화초를 재배하면서 장수(藏修)·양병(養病)하는 장소로 삼고 송강정사(松岡精舍)라 했다. 날마다 학문에 종사하되 한결같이 옛 사람의 도로써 스스로 기약했는데 불행하게도 일찍 세상을 떠나니 사람들이 모두 애석하게 여겼다. 단지동(丹池洞)에 살았다.
○ 성박(成鑮) : 자는 이선(而善)이요 진사 성여신(成汝信)의 아들이니 만력(萬曆) 경술년(광해군 1년, 1610)에 진사 시험에 합격했다. 기품이 청수하고 효우스런 천성을 가졌다. 집안이 가난한데도 어버이를 봉양함에 반드시 맛있는 음식을 갖다 드리고 항상 어버이를 기쁘게 하기를 일삼았다. 또 친구를 대접할 때는 반드시 성실과 신의로써 했고 의로운 것이 아니면 한 낱도 남의 짓을 취하지 않았다. 그가 죽기에 이르니 원근에 듣는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착한 이가 가셨다.’며 애석해 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일찍이 창원(昌原) 이정(李靜)에게서 학업을 배우더니 창원이 돌아가자 3년 안에는 노는 잔치를 일삼지 않았다. 능허(凌虛) 박민(朴敏)이 찬한 묘갈명에 이르기를, “집안이 대대로 넉넉하고 향기로워 길사(吉士)의 고풍(高風)이 깃들었네. 마음을 인서(仁恕)로 정했고 몸을 염이(恬夷)하게 처신했다네. 그 효제(孝悌)만을 생각하니 불록(茀錄)의 기틀이라네”라고 했다. 대여촌(代如村)에 살았다.
○ 강재명(姜在明) : 유학(幼學). 선비 강민효(姜敏孝)의 아들이다. 그 아버지의 병이 위중하자 손가락을 끊어 드리니 그 병이 곧 나았다. 불행히도 일찍 세상을 떠났다. 수곡(水谷)에 살았다.
○ 이택민(李澤民) : 자는 자중(子中)이요 본관이 전의(全義)이니 이공청(李公淸)의 아들이다. 사람됨이 강개(慷慨)하고 지조와 행실이 있더니 일찍이 말하기를 “무릇 사람들이 제기(祭器)는 반드시 놋쇠로 하지 않고 오줌 그릇은 반드시 놋쇠로 하니 마음에 미안하다.”며 마침내 도기(陶器)를 오줌 그릇으로 했다. 어머니를 섬김에 있어서는 정성과 효성을 각별히 극진히 했다. 비록 피난할 때에 흩어지거나 갑작스러운 것일지라도 반드시 예를 다하니 사람들이 어려운 일이라고 말했다. 불행히도 일찍 세상을 떠나니 사람들이 모두 애석하게 여겼다. 대여촌(代如村)에 살았다.
○ 정장단(鄭長丹) : 보인(保人). 장단은 그 어머니와 함께 일찍이 밤중에 방아를 찧더니 어머니가 범에게 물려가자 절구공이를 가지고 급히 쫓아가서 마침내 온전할 수 있었다. 성태동(省台洞)에 살았다.
○ 노개(盧介) : 사노(寺奴). 개는 부모를 봉양함에 효도로써 했다. 왜란을 당했을 때에 그 어머니를 업고 유리걸식하여 봉양했고 그 상장(喪葬)에 이르러서도 또한 그 힘을 다했다. 담제(禫祭 : 초상으로부터 27개월 만에 지내는 제사)를 지낸 뒤에야 비로소 고기를 먹었다. 상사리(上寺里)에 살았다.
○ 법장(法藏) : 승(僧). 속명은 일천(一千)이요 선비 하극충(河克忠)의 아들이다.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는데 백천사(百泉寺)에 살면서 바닷가의 어부와 사귀어 고기를 얻어서는 즉시 그 어머니에게로 돌아가서 드리고 맛있는 음식을 조금도 폐하지 않았다. 늦게는 정촌서재(鼎村書齋)에 거처하면서 어머니를 위해 향도계(香徒契)에 들어 힘을 다해 장사를 치렀다.
○ 김걸(金乞) : 내노(內奴). 왜구를 만났을 때 그 어머니가 중병이더니 등에 업고 피해 달려서 온전할 수 있었다. 그 어머니가 두 팔을 움직이지 못하자 아침저녁으로 반드시 숟가락으로 떠서 드렸다. 또 진귀한 음식이나 새로운 과실이 있으면 문득 품에 감추어 가지고 와서 남겨주었다. 아우 두 사람과 함께 살았는데 우애가 돈독하고 지극하니 그의 효성과 우애에 사람들이 모두 감복했다. 성태동(省台洞)에 살았다.
○ 우생(禹生) : 사노(私奴). 우생이 나이 5세에 그 아버지가 죽으니 울면서 슬퍼하는 것이 식자가 있는 사람과 같았다. 술과 고기를 먹지 않아 사람들이 혹 권하면 곧 말하기를, “우리 형이 먹지 않는데 나만 어찌 혼자 먹겠습니까?”라고 했다. 이웃 사람이 밥을 주면 정결하지 않다며 먹지 않았으며 3년을 마치도록 하루같이 하여 나이 9세가 되었다. 그의 어머니는 곧 효자 박인(朴氤)의 얼증손(孼曾孫)이니 그 기맥이 저절로 불어온 것이 있은 것이다. 말동(末洞)에 살았다.
○ 고음동(古音同) : 내노(內奴). 김걸(金乞)의 아우다. 그의 어머니가 병드니 곁에서 잠시도 떠나지 아니하고 말하기를 “내 형이 이미 죽고 어머니의 병이 위중한데 출타한 사이에 만일 불행한 일이 있게 된다면 종신토록 한이 될 것입니다.”라고 했다. 사후에는 상사와 제례에 집안 재산을 다 털어 정성을 극진히 했다. 명석리(鳴石里)에 살았다.
○ 연상(延祥) : 사노(私奴) 그의 아우 여상(汝詳)의 초(抄)를 입고 북방에 정병(精兵)으로 가게 되었다. 이것은 그의 아버지가 작은 아들을 가장 사랑하는 줄을 알고 자기가 대신할 것을 청해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서였다. 아버지가 죽음에 이르러서는 상장(喪葬)에 마음을 다했고 그 아우를 어루만지기를 아버지의 생시와 같이 했다. 독천리(禿川里)에 살았다.
○ 증음생(曾音生) : 사노(寺奴). 늙은 어머니를 봉양함에 살아서는 효성을 다했고 죽어서는 장사에 정성을 다하니 이웃과 마을이 칭찬했다. 사죽리(沙竹里)에 살았다.
○ 승남(勝男) : 사노(私奴). 그 아버지가 궁노장(弓弩匠)이었더니 아버지를 따라 복노(伏弩)를 한 곳에 갔다가 범이 그 아버지를 덮치자 동행한 수십 명은 모두 피해 달아났으나 승남은 홀로 몸을 던져 그 범을 쳐서 죽였다. 이로써 아버지가 마침내 죽음을 면하게 되었다. 시천리(矢川里)에 살았다.
○ 김수(金守) : 사노(私奴). 그 아우를 어루만짐이 매우 지극했으니 부모가 집과 논밭을 그 아우에게 다 주어도 말하기를 “저는 처의 재산이 있으니 살아가기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 하고 조금도 취하지 않았다. 시천리(矢川里)에 살았다.
○ 하옥형(河玉泂) : 향리(鄕吏). 성품이 본래 정성스럽고 효성스럽더니 부모를 섬김에 마음을 다했다. 부모가 돌아간 뒤에는 노린내가 나는 고기를 가까이 하지 않다가 몸을 마쳤다. 주내(州內)에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