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0022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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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의미역 | Capital Site |
이칭/별칭 | 「우기」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충청남도 논산시 채운면 우기리 |
시대 | 고대/삼국 시대/백제 |
집필자 | 박종익 |
[정의]
충청남도 논산시 채운면 우기리에서 임금터와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채운면 우기리에 임금터가 있는데, 본래 각종 꽃들이 만발한 오화지지(五花之地) 또는 만인이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아늑한 고장이라 하여 만인가활지지(萬人可活之地)라고 불린 피난지였다. 이 터에 의자왕이 도읍하려 하였으나 신하들의 만류로 실현하지 못했다는 지명유래담이다.
[채록/수집상황]
1988년 논산문화원에서 간행한 『놀뫼의 전설』에 실려 있다.
[내용]
채운면 우기리는 옛날부터 신선들의 요람지로서 이상적인 나라의 도읍지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 일대가 나라를 열 만한 ‘임금터’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임금터를 달리 ‘우기’라고도 하였다. 임금터는 세 곳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의 배꽃 북동쪽에 있는 큰 우기를 큰 임금터라 하고, 큰 우기 동쪽에 있는 중우기 마을을 가운데 임금터라 한다. 그리고 중우기 남동쪽에 있는 작은 우기 마을을 작은 임금터라 부르고 있다.
백제 때 이곳은 덕근군이었다. 백제 왕실에서 관할하는 은진 담노군이 직접 관할하던 채운향의 지역이었다. 대둔산이 병풍처럼 뒤를 두르고 있고 지금의 화산리, 야화리, 용화리, 화정리와 연무읍의 신화리에는 각종 꽃들이 만발하였다. 따라서 이 지역을 가리켜 오화지지(五花之地)라 하였다. 또한 더 넓혀서 연무읍의 신화리와 두화리, 산화리 그리고 채운면의 야화리까지를 합쳐 만인이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아늑한 고장이라 하여 만인가활지지(萬人可活之地)라 부르기도 하였다. 이 외에 풍운을 피하는 피난지로도 으뜸이라고 한다.
백제 때 의자왕이 궁녀들과 함께 배를 타고 유흥을 즐기며 금강을 따라 이곳까지 오게 되었다. 그는 용꽃, 배꽃, 매꽃, 들꽃, 산꽃들이 활짝 피어있는 이곳을 찾아와 세월 가는 줄 모르고 유흥에 빠져버렸다. “내 땅에 이런 곳이 있었던가? 참으로 아름다운 곳이로다.”하고는 신하들에게, “이곳을 궁중의 놀이터로 할 것이니 더욱 꽃밭을 잘 가꾸도록 하라.”고 하였다.
그 후 의자왕은 꽃이 필 때마다 궁녀들과 이곳을 찾아와 세월 가는 줄 모르고 유흥에 빠져버렸다. ‘차라리 여기가 왕도였으면 좋으련만…….’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신하들에게, “이곳에다가 왕도를 옮기면 어떻겠는지 검토 해 보라.”는 영을 내렸다. 그러자 신하들은 지형을 살핀 뒤에, “이곳은 강물이 염기가 많아서 왕도를 옮기기에 적당하지 않습니다.”라고 아뢰었다. 하지만 의자왕은 미련을 버리지 못하였다. 그 뒤 백제가 망하자 사람들은, “기회를 놓쳤으므로 다시 임금터가 되려면 많은 세월이 흘러야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한다.
[모티프 분석]
「임금터」의 주요 모티프는 이도(移都)와 실정(失政)이다. 도읍지를 옮기려는 연유가 주변의 빼어난 경관에 근거하고 있다. 하지만 왕도의 이전 동기가 왕 개인의 유희를 목적으로 이도가 꾀해진다는 점에서 볼 때 지극히 불순함을 엿볼 수 있다. 「임금터」 전설은 다른 각도에서 보았을 때 백제 패망담으로서의 성격을 보여준다. 유희에 빠진 왕의 행태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이야기가 형성되고 전승된 것이라는 해석이다. 즉 의자왕을 놓고 보았을 때 그의 도락과 실정을 담은 것이다. 이와 유사한 전설로는 성동면 우곤리의 「궁골」을 들 수 있는데, 골짜기에 왕이 머물 수 있는 궁을 조성한 의자왕의 타락을 은연 중에 묘사하여 백제가 패망의 사연을 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