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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600447
한자 古代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집필자 임승희

[정의]

기원을 전후한 시기에 형성된 탐라국 시대 서귀포시의 역사.

[개설]

고대 사회에 형성된 탐라국은 제주도에 존재했던 옛 국가의 명칭으로 그 의미는 ‘섬 나라’를 뜻한다. 탐라국 건국 신화의 내용을 알려주고 있는 『고려사』 지리지나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는 ‘탐라(耽羅)’가 탐진(耽津)의 ‘탐(耽)’자와 신라(新羅)의 ‘라(羅)’자를 따서 붙여진 이름이라 설명하고 있다.

탐라국은 바다로 둘러싸인 섬이었고 지리적으로 사방이 트여있는 점은 곧 다른 지역과의 교류가 활발하게 전개될 수 있는 개방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탐라국은 우리 나라를 비롯해서, 중국 및 일본의 동북아 해상의 중심에 있는데 한반도·중국·일본 열도로 이루어진 해상 네트워크의 접점인 셈이다. 탐라국에 대한 강한 지배권을 행사할 수 있다면 광범위한 해상 활동망을 구축하는 길이었기 때문에 어느 국가든 탐라국을 탐내지 않을 수 없었다.

탐라국은 이러한 상황에서 소국(小國)이었지만 국가 간 교류를 통해 주변 국가를 적절히 활용함으로써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독립적인 국가적 위상을 유지해 나갈 수 있었다. 다른 국가와의 교류는 곧 바닷길인 ‘해양 실크 로드’를 통해 이루어졌고, 특히 쿠로시오 해류와 계절풍, 1950m의 한라산은 해양 교류 및 항해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제주도가 인도네시아나 오키나와 등의 남방 문화가 들어오는 길목으로 주목받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탐라국 관련 기록]

탐라국에 관한 기록은 『구당서(舊唐書)』 「유인궤전(劉仁軌傳)」에 처음 등장한다. 그러나 이미『후한서(後漢書』에는 섭라(涉羅), 『북사(北史)』나 『수서(隋書)』의 「백제전」에는 탐모라국(耽牟羅國), 『신당서(新唐書)』 등 국내외 사서에는 담라(儋羅), 혹은 탐부라(耽浮羅)·탁라(乇羅)·탁라(托羅)·탁라(託羅)·둔라(屯羅) 등이 나타나 있다. 특히 어의(語義)에 대해서는 이미 한치윤(韓致奫)의 『해동역사』에서 동국방음(東國方音)에 도(島)를 섬[剡]이라 하고 국(國)을 나라[羅羅]라 하며 탐·섭·담 세 음은 모두 섬과 비슷하다고 풀이한 바 있다.

[탐라국의 관직 체계]

고대 탐라국의 관직체계를 살펴보면, 성주·왕자·도내(徒內) 등 탐라 지배층의 호칭이 있었다. 기록상으로는 신라 전성기에 고을라의 15대손 고후(高厚)·고청(高淸)·고계(高季) 세 형제가 바다를 건너 신라에 와서 조회하자 신라의 왕이 이들을 가상히 여겨 성주·왕자·도내의 작위를 주었다는 데에서 유래한다.

성주는 국왕을 지칭한 것으로 고려에서도 신라의 예에 따라 탐라국의 왕을 성주라고 불렀다. 『고려사(高麗史)』 태조세가 21년(938) 12월조에 의하면, 탐라국의 태자 말로(末老)가 와서 알현하자 왕은 그에게 성주·왕자의 작위를 주었다고 하였다. 또한 고려에서는 성주를 회유하기 위해 운휘대장군(雲麾大將軍) 등의 무산계를 주어 우대하기도 하였다. 더욱이 성주는 거의 독립적인 자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아들을 태자 또는 세자라 하였다.

성주와 왕자는 1105년(숙종 10) 이후 제주가 군·현으로 편제된 뒤에도 여전히 존재하여 대대로 그 지위를 세습하며 조선 초기까지 내려 왔다. 그러나 1402년(태종 2)에는 중앙의 행정력이 제주에 미치게 되면서 성주를 좌도지관, 왕자를 우도지관으로 개칭하였고 이 때부터 이전과 같은 대우는 없어졌다.

물론 성주와 왕자의 직능(職能)에 대해서는 “성주는 종래의 기록과 같이 신라 때 있어서 객성상(客星象)의 출현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며 탐라란 나라 이름도 탐진(耽津)에 당도한 데서 연유한 것이 아니다. 성주는 탐라국 토어로 국왕 또는 임금의 뜻이며 왕자는 군장의 뜻을 가진 탐라의 토어이다. 따라서 성주는 국왕이요, 왕자는 부왕적인 존재로서 탐라국은 이 양자가 다스리는 이원적인 왕제를 가진 나라였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탐라국의 대외 관계]

고대 탐라국의 대외관계는 다음의 사서에서 정식으로 등장하고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따르면 476년(문주왕 2) 백제문주왕에게 방물을 바쳤다는 데서이다. 그 후 탐라국은 고려 전기인 1162년(의종 16) 현령관이 고려 중앙에서 파견되어 올 때까지 국내 사서에는 10회 정도, 중국 사서와 일본 사서에서는 각각 7회와 19회 정도 그 존재를 드러내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탐라국에는 왕, 왕자, 그리고 백제의 중앙 관위인 은솔(恩率)이라든지 좌평(佐平) 직책을 가진 존재들이 있었다. 이 사실은 탐라국 내부에 그 구성원들이 위계적으로 배치되어 있었으며, 따라서 상당히 계층 분화된 사회 체제와 그것을 통제하는 상부 구조가 존재하였음을 보여 준다. 더구나 그것을 종주적 위치에 있는 백제라는 해외 국가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탐라국은 하나의 ‘국(國)’으로서 동북아시아라는 당시 국제 사회에서 상당히 높은 국제적인 위상을 갖고 있었다. 그 예를 보면, 『자치통감(資治通鑑)』 고종 인덕 2년조(665년)에 신라·백제·탐라·왜국 사자들이 중국 태산에 모여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7세기라는 시점에서 사자들의 서열을 살펴보면, 탐라국의 지위가 일본보다 앞서고 있었으며 다른 세 나라들과는 거의 대등하게 보인다.

또한 실례로서 신라 27대 선덕왕이 황룡사 구층탑을 세워서 이웃 나라의 침략을 막으려고 했을 때 탐라는 신라의 잠재적인 적대국들 중 제4위에 속하였다. 따라서 당시 신라 당국도 탐라국의 국제적 위상을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고 하겠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3.02.18 내용 수정 수정원고로 내용 교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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