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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601014
한자 李在守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인성리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박찬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77년연표보기 - 이재수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01년 5월 - 이재수 제주 민란 장두로 활동
몰년 시기/일시 1901년 10월 10일연표보기 - 이재수 교수형에 처해짐
성격 의병
성별
대표 경력 1901년 제주 민란 서부 지역 장두

[정의]

1901년 제주 민란 당시 민군의 대장.

[개설]

1901년 제주 민란은 ‘신축 민란‘ 또는 ‘이재수의 난‘이라고도 하며 최근 영화화 되기도 하였다. 민란이 발생했던 1901년 당시 제주도민들은 일본 어민의 어장 침탈과 서울에서 내려온 관리들의 횡포, 왕실 세금을 거두로 내려온 봉세관의 무리한 세금 부과로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해있었다. 여기에 전통 신앙을 중시하는 제주도민과 외부 종교인 천주교와의 갈등에다, 외부 세력을 배경으로 작폐(作弊)를 일삼은 일부 천주교인으로 인해 천주교에 대한 거부감도 극심하였다.

이 당시 채구석(蔡龜錫)은 유림(儒林) 오대현(吳大鉉)과 관아의 노비였던 이재수(李在守) 등과 함께 상무사(商務社)를 설립하여 그 자신은 회장으로, 오대현과 같은 출신의 유림 송희수(宋希洙)를 부회장으로 선임하여 상무사를 주도하였는데, 상무사는 토착 세력으로 외부 세력인 천주교인과의 충돌이 잦았다.

이때 유림 오대현의 첩을 천주교도인 대정군의 부이방(副吏房) 김옥돌(金玉乭)이 간음한 사건이 발생되어 제주도민과 천주교도가 충돌하였고, 거기에 제주도민 오신락(吳信洛)이 천주교 정의교당에서 피살되는 사건까지 발생하여 민심이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1901년 5월 16일 이재수의 지휘로 수천명의 도민이 제주성을 포위, 함락하여 300여 명이 넘는 천주교도를 죽였다. 많은 천주교도들이 죽었다 하여 천주교에서는 이 사건을 신축교난이라고 부른다.

[가계]

제주도 대정군 인성리에서 아버지 이시준과 어머니 송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재수의 집안은 사회적·경제적으로 매우 열악한 처지에 있었다.

[활동 사항]

이재수는 민란이 발생하기 전에는 대정군 관아에서 군수의 잔심부름을 하던 통인 또는 관아의 노비로서 군수인 채구석을 수행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비록 관아의 노비라고는 하지만 이재수인성리의 이강(里綱)이었다든지, 상무사의 집사였다든지 하는 점으로 미루어 아주 낮은 사회적 지위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재수는 민란에 가담하기 이전에 대정군수 채구석과 함께 정의교당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한 오신락의 시체 검안 과정을 직접 눈으로 목격하였다. 이재수는 천주교 세력의 위세에 눌려 살인범을 잡아내지 못하는 현실에 분노를 느꼈으나 자신의 미천한 신분 때문에 전면에 나서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민회가 소집되어 오대현강우백이 중심이 되어 정소 운동을 전개하자 오대현의 부하로 민란에 가담하였다. 천주 교회 측의 한림민회소 공격으로 서진의 장두였던 오대현이 잡혀가자 이재수가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이재수가 서진의 장두로 나서자 민란도 무력에 의한 강경 노선으로 급선회하였다. 이재수는 곧바로 작전의 성공에 만전을 기하기 위하여 민군을 재편성하여 제주도 일원의 주민들을 다시 규합한 후 제주성을 향하였다. 결국 제주성을 포위하여 제주성에 숨어있던 천주교인 300여 명을 관덕정에 끌어내어 살해하였다. 민란의 전개 과정에서도 동진보다 서진이 천주교인 살상을 주도하였고, 프랑스 군대가 진주했을 때에도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전투 태세를 갖출 만큼 이재수가 이끈 서진은 강경한 태도로 일관하였다.

민란이 진정된 후 6월 9일 찰리사 황기연이 도착하자 이재수는 민란의 장두인 강우백·오대현 등과 함께 옥에 갇혔다. 7월 13일 민란 주동자와 함께 서울로 호송되어 7월 27일부터 평리원에서 재판이 치러졌다. 10월 9일 최종 판결이 내려져 다음 날인 10월 10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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