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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601599
한자 牧子服
분야 생활·민속/생활
유형 의복/의복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집필자 현진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직업복
재질 개가죽
관련 의례 사냥
입는 시기 상시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지역에서 우마를 돌보며 생활했던 목자(牧者)와 사냥꾼이 입었던 옷.

[개설]

목자란 조선 시대에 국마(國馬)와 사마(私馬)를 기르던 하층민으로, 목자의 신분으로 국가의 말을 돌보던 사람과 중산간 마을을 중심으로 목축을 주업으로 하면서 농사도 하던 목축업자, 그리고 목축업자의 말을 일정 기간 맡아서 돌보던 테우리를 통틀어서 말한다. 목자복(牧者服)은 이들이 특히 겨울철에 입었던 방한용 털 가죽옷을 말하며, 종류는 가죽두루마기·가죽감태·가죽발레·가죽버선 등이 있다. 가죽두루마기는 주로 개가죽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흔히 ‘개가죽두루마기’라고 불렸다.

겨울철에는 이것 이상의 방한복이 없었다. 개가죽두루마기는 열두세 장의 개가죽이 들어가 여유가 없으면 만들 수 없기 때문에 이걸 장만하는 것을 대단한 자랑으로 여겼다. 특히 제주시와 성읍에서는 귀하게 여겨 좀 산다는 집에서 많이 입었고, 관가의 모임에도 이 가죽두루마기를 입고 가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개가죽두루마기는 목자복의 기능에 그치지 않고 사냥복·방한복·예복으로 그리고 부의 상징으로도 입었던 것이다.

[연원]

일부에서 가죽옷을 입는 것이 몽골의 영향이라고 하는데, 가죽발레와 같은 각의는 그 기원을 몽골고원에 두는 설도 있다. 그러나 몽골이 제주 땅에 주둔하기 훨씬 전부터 가죽옷을 입고 목축생활을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의 가죽옷은 어떤 형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제주도에 몽골이 주둔하기 훨씬 전부터 가죽옷을 입었다.

몽골과 서귀포시의 털가죽옷을 비교해 보면 몽골은 털 있는 쪽을 안쪽으로 향하게 하고, 서귀포시의 것은 털이 바깥으로 향하게 하는 것 등이 다르다. 어떤 문화가 유입되어 받아들이기까지는 받아들일 수 있는 환경과 여건이 맞아야 지속 될 수 있다고 여겨진다. 목자들이 입었던 털가죽옷도 서귀포 시민이 스스로 환경 적응 과정에서 만들어졌다고 여겨지며 여기에 외부의 영향으로 보다 실용성과 편리함을 택하며 발전했다고 보아진다.

[형태]

가죽두루마기는 주로 개가죽으로 만들었으며 보통 12~13마리 분량이 든다. 형태는 두루마기와 비슷하다. 가죽감태는 가죽감티·감태라고도 하며 목자들의 방한용 모자로 1930년대까지도 중산간 마을에서는 많이 썼던 모자이다. 뒷덜미쪽이 더 내려오게 만들어 목뒤로 눈이 들어가는 것을 방지하도록 되어 있다. 한반도에서는 볼 수 없는 형태의 모자로 몽골의 영향이라고 한다.

가죽발레는 조선시대 『탐라순력도』의 목자의 그림에서도 저고리 바지 차림에 가죽발레를 신은 모습을 볼 수 있다. 허벅다리까지 끼게 만든 일종의 발 토시와 같다. 제주 4·3사건 이전에만 해도 중산간 마을에서 남자들의 방한복으로 입은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입는 방법은 각각 한쪽다리에 끼운 후 윗부분에 연결된 끈을 허리띠에 연결하여 묶었다.

가죽버선은 가죽보선이라고도 하며 다른 털가죽옷과는 달리 털을 제거한 다음 만들었다. 주로 겨울철에 신었는데 바닥에 산듸집을 깔아서 신었으며 사냥할 때나 눈 쌓인 곳에 갈 때는 태왈[설피]을 덧신었다.

[생활 민속적 관련 사항]

털가죽옷은 남자들이 만들며 남자들만 입었다. 일부에서는 남자들이 사냥을 가서 큰 짐승을 만나면 겁을 주기 위해 털가죽옷을 입었다고 한다. 털가죽옷은 경제적인 여유가 있어야 만들어 입을 수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가죽발레를 입고 허리에 묶은 끈을 밖으로 보이게 하여 부(富)를 자랑하기도 했다고 한다. 제주 4·3사건으로 인해 사냥을 할 수가 없고 중산간 마을이 소개되면서 생활 터전을 잃게 되어 털가죽옷도 사라지게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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