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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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에 위치한, 조선시대 녹산장과 갑마장, 그리고 일제 강점기 마을 공동목장 경계선으로 설치된 돌담시설. 잣성은 국영목마장의 상하 경계선에 해당되며 『제주계록』[1846-1884]에는 장원(墻垣)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위치에 따라 하잣성·중잣성·상잣성 그리고 간장(間牆)으로 구분된다. 가시리에는 번널오름 하잣성, 갑마장 잣성, 갑마장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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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지역에 있는 지형지물의 위로 건널 수 있도록 만든 인공 구조물. 국내 도로는 크게 고속 국도·일반 국도·지방도·시도·군도로 나누어진다. 고속 국도는 한국 도로 공사가, 일반 국도는 국토 해양부가 관리하고 있으며, 지방도, 시도, 군도의 경우에는 지방 자치 단체가 담당하고 있다. 교량과 같은 부속 시설물의 유지 관리도 도로의 관할 주체가 수행하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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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남원읍에 속하는 법정리. 남원1리의 옛이름은 쉘록개[쉘록깨], 쉘롯개[쉘롣깨], 제산잇개[제사닏깨·저사닛개]이다. 쉘록개의 한자 표기로 금로포·금록포 등이 있다. 남원2리의 원래 이름은 옷귀[옫뀌]·옥기[옥끼] 또는 서옷귀이다. 차자표기로 의귀촌이라 하였고, 18세기 초반부터 동쪽 지역과 서쪽 지역을 구분할 때부터 서옷귀을이라 하여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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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에 속하는 행정구역. 남원읍(南元邑)은 동쪽으로는 표선면과 접하고, 서쪽으로는 효돈동·영천동과 접하고 있다. 남원읍은 17개 행정리[남원1리·남원2리·태흥1리·태흥2리·태흥3리·위미1리·위미2리·위미3리·하례1리·하례2리·신례1리·신례2리·한남리·수망리·의귀리·신흥1리·신흥2리]와 9개 법정리[남원리·태흥리·한남리·수망리·의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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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일대에 있는, 자연적·인공적 동굴을 이용한 살림터. 동굴 유적은 전세계적으로 구석기 시대의 대표적인 주거 유형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구석기 시대 이후에는 특수한 목적의 장소로 이용되었다. 이러한 배경에는 동굴이 주변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고, 방어 장소나 자연 환경의 해악에 따른 피신 장소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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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남원읍 한남리에 있는 제주4·3사건 관련 유적. 빌레가름은 한남리 본동과 약 2㎞ 북쪽에 위치한 작은 마을로 1845년경 제주 고씨 네 형제가 터를 잡고 집성촌을 이루었었다. ‘빌레가름’이란 지표면 바로 밑에 암반이 널려 있는 데서 유래한다. 농업과 목축에 종사하며 살아가던 빌레가름 주민들은 4·3사건 발발 이후인 1948년 11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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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교래리 비자림로에서 서귀포시 남원읍 한남리 사려니 오름까지 이어지는 숲길. 사려니는 제주도말로 ‘신성한, 신령스러운’이라는 뜻이다. 사려니숲길은 행정 구역상 서귀포시 남원읍 한남리와 제주시 조천읍 교래리에 걸쳐있으며, 숲길의 출발지는 교래리 비자림로(榧子林路)이고 도착지는 한남리 사려니 오름이다. 사려니숲길은 총길이 15㎞, 해발 고도 450~650m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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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남부에 위치한 행정시. 서귀포시는 북쪽으로 한라산 정상 분수계를 경계로 제주시와 접하고 있는 행정시이다. 한라산[1,950m]은 종상화산(鐘狀火山)의 산형을 형성하여 급한 경사를 이루고, 산록면은 완경사를 이루나, 북사면보다는 약간 경사도가 큰 편이다. 해안 저지대는 평지를 이루고 있지만 다소 좁은 편이다. 하천은 비교적 잘 발달하여 효돈천·정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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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포 칠십리(西歸浦七十里)’라는 말은 조선 시대에 지금의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리에 있었던 정의현성의 관문에서 서귀포의 서귀진[또는 서귀포 방호소]까지 거리를 나타내는 개념으로 만들어진 뒤에, 오늘날은 서귀포를 상징하는 말로 개념이 확대되었다. 조선 시대 초기에, 제주도를 세 고을[제주목·정의현·대정현]로 나누고 난 뒤에, 정의현청의 관문에서 서귀포의 서귀진의 관문까지 거리가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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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조선 초의 제주도 정의현 출신 열녀. 정씨는 정의현[현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사람으로 한림원의 8품 벼슬인 직원(直院) 석방리보개의 처이다. 고려 말에 그의 남편이 합적(哈赤)의 난 때 죽었는데 그녀의 나이 20세 였다. 정씨의 자색이 고와 안무사·군관 등이 그녀를 협박하여 강제로 취하려 했으나 정씨는 스스로 죽음을 맹세하고 칼을 품어 자결하려 하여서 취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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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서귀동에 위치한 4·3유적지. 제주4·3사건 당시 서귀리는 서귀면뿐만 아니라 제주도 한라산 남쪽지역의 중심지였다. 면사무소와 남제주군청이 있었고 서귀포경찰서도 서귀리에 있었다. 때문에 토벌이 강화되면서 토벌대의 주요 근거지가 되어 대대본부가 위치해 있었고, 취조를 담당하는 정보과[대대2과]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서귀포경찰서도 서귀리에 있어서 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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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 지역에서 간석기를 도구로 만들어 쓰던 시기. 2011년 현재 제주특별자치도에서 지표 조사와 발굴 조사를 통해 확인된 신석기 유적의 수는 70개소에 이른다. 제주특별자치도 본섬을 포함한 부속 도서에 이르기까지 제주도 전역에서 확인되는 추세이다. 더욱이 최근에는 중산간 지역과 해안 저지대를 중심으로 조사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이처럼 그동안의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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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 지역에서 간석기를 도구로 만들어 쓰던 시기. 2011년 현재 제주특별자치도에서 지표 조사와 발굴 조사를 통해 확인된 신석기 유적의 수는 70개소에 이른다. 제주특별자치도 본섬을 포함한 부속 도서에 이르기까지 제주도 전역에서 확인되는 추세이다. 더욱이 최근에는 중산간 지역과 해안 저지대를 중심으로 조사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이처럼 그동안의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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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 지역에서 목숨으로 정조를 지켰거나 남편을 위하여 지극한 정성을 다한 부녀자. 일반적으로 열녀는 남편에 대해 정절을 지킨 여성을 말한다. 남편이 죽은 뒤 수절을 한다거나, 따라 죽는다거나, 외간 남자의 정조 유린 위협에 죽음을 무릅쓰고 대항해 정절을 지킨 여성들이다. 조선은 유교적 위계질서에 의해 유지되는 사회로 모든 사회 질서가 남성 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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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남원읍 의귀리 의귀초등학교에 위치한 4·3유적. 제주4·3사건 당시 각급 학교는 군부대 혹은 응원경찰의 주둔지로 많이 활용됐다. 1941년 간이학교로 출발해 1943년 정식 학교로 승격한 의귀국민학교에도 1948년 12월 26일부터 1949년 1월 20일까지 제2연대 1대대 2중대가 주둔했었다. 실제 2중대원으로 이 곳에 근무했었던 이윤의 『진중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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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남원읍에 속하는 법정리. 의귀리에서는 탐라 전기의 토기가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1,000여 년 전부터 사람이 들어와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며, 약 450년 전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의귀리의 전 농토가 감귤원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이며 대다수의 주민이 감귤 재배에 종사하고 있다. 의귀리의 옛 이름은 옷귀[옫뀌], 옥귀[옥뀌], 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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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남원읍 신례리에 있는 4·3사건 관련 유적. 제주 4·3사건은 1949년 3월 제주지구전투사령부[사령관 유재흥]의 귀순작전 등으로 무장대 세력이 급속히 약화되었고, 6월 무장대 총책임자 이덕구가 피살되면서 무장대는 궤멸상태에 이른다. 하지만 잔여 무장대는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이후 주민납치 등으로 세력을 불려나갔고 마을습격 등을 감행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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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남원읍에 속하는 법정리. 한남리는 현씨·오씨·고씨가 많이 살고 있어 삼성촌(三姓村)이라고도 알려졌다. 광활한 야초지(野草地)를 보유하고 있어 축산업에 적합하며, 주민 대부분이 감귤 산업에 종사하고 있다. 한남리(漢南里)는 한라산 남쪽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옛 이름은 ‘브등지’, ‘부등지’이며. 민간에서는 부등개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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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남원읍 한남리에 위치한, 조선 시대 국영목마장인 9소장의 상하 경계선에 축조된 돌담시설. 잣성은 국영목마장의 상하 경계선에 해당되며 『제주계록』[1846-1884]에는 장원(墻垣)이라고 기록되고 있다. 위치에 따라 하잣성·중잣성·상잣성 그리고 간장(間牆)으로 구분된다. 한남리에는 하잣성과 상잣성 그리고 중잣성이 남아 있다. 조선시대 조정에서는 군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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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남원읍 수망리에 있는 4·3사건 관련 유적. 제주4·3사건 당시 의귀리·수망리·한남리에 대한 토벌대의 초토화 작전은 다른 지역보다 열흘 쯤 앞선 1948년 11월 7일부터 시작됐다. 토벌대는 이곳 중산간지역에 집집마다 불을 지르면서 학살도 서슴지 않았다. 순식간에 삶터를 잃은 주민들은 집 주변과 돌담 밑에 기거하거나 산으로 숨어들었다. 당시 의귀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