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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600257
한자 細花里
이칭/별칭 곶,도노롬,가마리,강애왓,강왓디,세화촌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표선면 세화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범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변천 시기/일시 1946년 8월 1일 - 제주도 남제주군 표선면 세화리 개설
변천 시기/일시 2006년 7월 1일 - 제주도 남제주군 표선면 세화리에서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표선면 세화리로 개편
성격 법정리
면적 9.836㎢
가구수 586세대
인구(남, 여) 1,508명[남자 784명, 여자 724명]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표선면에 속하는 법정리.

[개설]

표선면 중앙부에서 남쪽에 위치한 세화리는 중산간에서 해안지대로 길게 넓게 펼쳐진 채 평지로 이뤄진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주요 경제기반은 감귤 재배이다.

[명칭 유래]

세화리의 옛 이름은 ‘곶’[는곶]이다. ‘’은 ‘가늘다’의 뜻이다. ‘가늘게 형성된 숲’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이 일대에 형성된 마을을 ‘곶을’[는곶을]이라 하고 한자로는 ‘세화촌(細花村)’으로 표기하였다. 현재 세화리의 행정리 가운데 세화1리에 해당한다. 세화2리의 옛 명칭은 가마리(加麻里)다. 가마리는 마을 포구 중심에 자리를 잡은 마을을 뜻하는 ‘갯머리’에서 변형된 것이라고 한다. 세화3리의 옛 명칭은 ‘강애왓’·‘강왓디’이다. 예로부터 세화리 지역을 관통해 흐르는 가마천(加麻川)[가시천이라고도 함] 중류 일대에 형성된 밭을 지칭했다고 한다.

[형성 및 변천]

500여 년 전 허씨 성을 가진 사람이 ‘가스름’[현재의 가시리]과 ‘가세오름’을 지나 가세오름 동쪽 냇가에 있던 작은 소인 (沼‘가매물’[또는 가메소] 일대에 정착하였고, 이후고씨·강씨·현씨·김씨·정씨 등이 속속 들어와 정착하였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세화리는 기록상으로 볼 때 17세기 말 편찬된 『탐라도』에 세화촌으로 처음 등장한 이후, 1780년(정조 4)에 편찬된 『제주읍지』에 제주도 지역 삼읍(三邑) 소속의 면(面)과 이(里) 단위 명칭이 전체적으로 드러났다. 세화리는 정의현 중면 세화리가 된 것이다. 1872년(고종 9)의 『제주삼읍전도(濟州三邑全圖)』를 보면, 세화리는 정의군 동중면에 소속되어 있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 정의군과 대정군이 제주군으로 통합되면서 제주군 동중면 세화리로 되었으며, 1915년 도제(島制) 실시로 전라남도 제주도 동중면 세화리로, 1935년 동중면이 표선면(表善面)으로 조정되어 표선면 세화리가 되었다.

해방 후 1946년 8월 1일 도제(道制) 실시로 제주도 남제주군 표선면 세화리가 되었다. 2006년 7월 1일 제주특별자치도가 본격 시행되면서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표선면 세화리가 되었다.

[자연 환경]

세화리표선면 중앙부의 남쪽 일대인 매오름 서남쪽과 토산봉 동쪽에 형성되었다. 북쪽은 가시리, 동쪽은 표선리하천리, 서쪽은 토산리와 경계를 이루고 남쪽은 바다와 맞닿아 있다. 마을 중앙에는 가마천이 있다. 대부분 지역이 평지로 이뤄져 있고 해안가에는 파식대가 발달하였다.

[현황]

세화리 면적은 9.836㎢로, 표선면의 여섯 개 법정리 가운데 다섯번째이다.지목은 밭 3.349㎢, 임야 2.781㎢, 과수원 2.122㎢, 대지 0.352㎢, 목장 0.205㎢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인구는 2012년 5월 31일 현재 570세대에 1,410명[남자 7720명, 여자 690명]이 거주하고 있다.

법정리인 세화리의 행정리는 세화1리·세화2리·세화3리이다. 세화리는 모두 여섯 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세화1리는 서상동(西上洞)·동상동(東上洞)·동하동(東下洞), 세화2리는 본동(本洞)·신설동(新設洞), 세화3리는 강화동(江華洞)이다. 감귤 재배가 주 소득원인 세화리는 2006~2008년 장수마을로 선정되었고, 고품질 친환경 농산물 재배, 허브향 물씬한 꽃길 조성 및 해안도로 조성, 서울이업종교류협회와의 1사 1촌 자매결연 등을 통해 주민소득 증대와 복지 증진에 노력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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