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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년 제주 민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600466
한자 1901年濟州民亂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박찬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01년 5월 6일연표보기 - 1901년 제주 민란 발발
전개 시기/일시 1901년 5월 14일 - 1901년 제주 민란시 천주교민들이 한림민회소 습격
종결 시기/일시 1901년 5월 28일 - 1901년 제주 민란 농민들이 천주교민 살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01년 10월 9일 - 1901년 제주 민란 주모자 이재수·오대현·강우백 처형됨
발생|시작 장소 1901년 제주 민란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군
종결 장소 1901년 제주민란 - 제주성 관덕정 마당
성격 민중운동
관련 인물/단체 오대현·강우백·이재수

[정의]

1901년 대한제국 정부의 봉건적 수탈과 천주교 및 서구 열강의 문화적 침탈에 저항한 제주 지역의 민중운동.

[역사적 배경]

전제군주체제의 강화를 꾀하던 대한제국은 왕실 재정을 채우기 위해 1900년(고종 37) 내장원(內藏院)에서 봉세관(棒稅官) 강봉헌(姜鳳憲)을 제주도에 내려 보냈다. 그는 공유지에 대한 세금을 무리하게 거둬들였고, 심지어 어장·그물·소나무·목초지에 대해서도 세금을 매겼다. 더구나 그동안 징세를 담당하던 지방관·향임 세력들을 배제하고 독점적으로 징세함으로써 토착 세력과 주민들로부터 강한 반발을 샀다.

한편 1899년 두 명의 선교사가 파견됨으로써 전교가 시작된 제주의 천주교회는 프랑스의 힘을 배경으로 교세를 키워 갔다. 이 과정에서 마을의 신당(神堂)을 파괴하고 신목(神木)을 베어 버리는 등 무리한 포교가 이루어져 주민들과의 충돌이 잦았다. 여기에 1901년 2월 서귀포 하효리의 오신락 노인이 교당에 끌려가 죽는 사건이 터지면서 주민들의 교회에 대한 반감이 고조됐다. 일부 교민들이 봉세관 강봉헌의 중간 징세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주민들을 더욱 격분케 했다.

[경과]

1901년 5월 6일 대정군에서 반천주교 조직인 상무사(商務社)와 교민들 간의 충돌을 계기로 중앙의 조세 수탈에 저항한 민회가 열리면서 민란은 시작됐다. 대정군 출신 오대현·강우백 등 장두를 앞세운 민란참여자들은 세폐와 교폐를 시정하기 위해 제주읍성으로 향했고, 교민들은 제주읍내 교회로 피신하였다. 5월 14일 교민들의 한림 민회소 습격으로 오대현 등 장두가 체포되었고, 나아가 대정성에서 교민들의 발포로 주민 1명이 사망하면서 교회에 대한 민심이 극도로 악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잡힌 오대현을 대신하여 이재수가 민군의 대장으로 등장하였다.

봉세관의 조세 수탈을 시정하기 위해 일어난 민란은, 강봉헌이 도망쳐 버린 데다 교민들의 한림 민회소 습격 사건을 계기로 민란은 민군과 교회 측의 대결로 치달았다. 결국 상호 접전 끝에 5월 28일 제주성을 장악한 민군은 교민들을 관덕정 마당에 모아놓고 살해하는 참극으로 귀결되었다.

[결과]

당시 민란의 과정에서 피살된 자들은 대부분 교민들이었다. 당시 제주에 파견된 평리원 안종덕(安鍾悳) 검사가 공식적으로 집계한 숫자는 교민 309명, 평민 8명이었다. 이 사건 직후 프랑스 군함 2척과 일본 군함 1척이 출동해 제주도를 둘러싸고 열강끼리 충돌할지도 모르는 위기 상황이 고조되기도 했다. 결국 찰리사(察理使) 황기연(黃耆淵)이 파견되어 이재수(李在守) 등 민란의 지도자들을 체포해 서울로 압송해감으로써 사건은 진정되었다.

제주에서의 사태가 진압된 후에도 서울을 무대로 한 사후 수습 과정이 마무리될 때까지 민란은 계속 이어졌다. 그 과정에서도 교회와 내부(內部), 프랑스 공사관과 대한제국 외부(外部)에서 계속해서 사건 완결을 위한 대립과 교섭이 진행되는 알력이 있었다. 뒤처리의 현안 문제는 주모자에 대한 재판과 처벌 문제, 피살 희생자에 대한 휼금배상(恤金賠償)의 문제와 피살 희생자의 묘지인 영장지(營葬地) 문제 등 세 가지였다. 주모자에 대한 재판이 끝나고 이재수·오대현·강우백 등 세 장두가 처형된 때는 1901년 10월 9일이었다. 이어서 휼금배상의 집행이 1903년 11월 16일 실시되었 다음날 17일 영장지 문제가 타결됨으로써 사건은 최종 마무리되었다.

[의의와 평가]

이 민란은 제주 지역이 근대사회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중앙과 지방의 갈등, 전통과 외래문화 사이의 충돌로 발발하였다. 20세기 벽두에 제주민들은 세계와의 만남을 제국주의적 문화적·경제적 침탈에 대한 충돌로 시작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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