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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600490
한자 濟州四三事件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박찬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단 시기/일시 1947년 3월 1일 - 제주 4·3 사건 발생의 시발점이 된 3·1절 기념 제주도 대회 오인 사격 사건 발생
발생|시작 시기/일시 1948년 4월 3일연표보기 - 제주 4·3 사건 발생
종결 시기/일시 1954년 9월 21일연표보기 - 제주 4·3 사건 이후 처음으로 한라산 금족 지역 전면 개방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03년 10월 15일연표보기 - 대한민국 정부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 확정 발표
발생|시작 장소 제주 4·3사건 - 한라산 중허리 오름
성격 무장봉기
관련 인물/단체 김달삼(金達三)|이덕구(李德九)

[정의]

1948년 4월 3일 이후 7년 동안 서귀포시를 포함한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

[역사적 배경]

광복 직후의 당시 제주 사회는 6만여 명의 귀환 인구 실직 난, 생필품 부족, 콜레라의 창궐, 극심한 흉년 등으로 겹친 악재와 미곡정책의 실패, 일제 경찰의 군정 경찰로의 변신, 군정 관리의 모리행위 등이 큰 사회문제로 부각되어 몸살을 앓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47년 3월 1일, 3·1절 기념 제주도 대회에 참가했던 이들의 시가행진을 구경하던 군중들에게 경찰의 오인으로 총격이 발포돼 민간인 여섯 명이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3·1절 발포사건은 가뜩이나 어지러운 민심을 더욱 악화시켰다. 이에 남로당 제주도당은 조직적인 반경 활동을 전개했고, 제주 사회에는 제주도 전체 직장의 95% 이상이 참여한 대규모 민·관 총파업이 이어졌다. 미군정은 이 총파업이 경찰 발포에 대한 도민의 반감과 이를 증폭시킨 남로당의 선동에 있다고 분석했지만, 사후 처리는 경찰의 발포보다는 남로당의 선동에 비중을 두고 강공정책을 추진했다.

도지사를 비롯한 군정 수뇌부들을 모두 외지인으로 교체했고 응원경찰과 서북청년회원 등을 대거 제주로 파견해 파업 주모자에 대한 검거작전을 벌였다. 검속 한 달 만에 500여 명이 체포됐고, 1년 동안 2천5백 명이 구금됐다. 그러는 동안 서북청년회는 온갖 테러와 횡포를 일삼아 민심을 자극했고, 구금자에 대한 경찰의 고문이 잇따랐다. 1948년 3월 급기야는 일선 지서에서 세 건의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해 제주 사회는 금방 폭발할 것 같은 위기 상황으로 변해 갔다.

[경과]

1948년 4월 3일 새벽 두 시. 총성과 함께 한라산 중허리의 오름마다 봉화가 타오르면서 남로당 제주도당이 주도한 무장봉기의 신호탄이 올랐다. 350명의 무장대는 이날 새벽 12개의 경찰지서와 서청 등 우익 단체 요인들의 집을 습격했다. 무장대는 경찰과 서청의 탄압 중지, 단독 선거 및 단독정부 반대, 통일정부 수립 촉구 등을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4·3 사건이 발발하자 미군정은 이를 치안 상황으로 간주하고 경찰력과 서청의 증파를 통해 사태를 막고자 했다. 그러나 사태가 수습되지 않자 군대에 진압 출동 명령을 내렸다. 예정된 5·10 선거를 무사히 치르기 위해서 미군정은 시급히 무장대를 진압해야 했던 것이다.

당시 도내의 유일한 군대였던 9연대의 김익렬(金益烈) 중령은 경찰·서청과 도민의 갈등으로 발생한 사건에 군이 개입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며 귀순 작전을 추진해 4월 말, 무장대 측 책임자 김달삼(金達三)과 평화 협상을 벌였고, 72시간 내에 전투 중지, 점차적인 무장 해제, 귀순자의 신변 보장 등 세 가지 원칙에 합의했다. 그러나 대동청년단원이 일으킨 오라리 방화사건으로 평화 협상이 깨진 후, 미군정은 제20연대장 브라운 대령과 24군단 작전참모 슈 중령을 제주에 파견하고, 9연대장을 교체해 5·10 선거를 추진했다.

5월 10일, 전국 200개 선거구에서 일제히 선거가 실시됐다. 그러나 제주도의 세 개 선거구 가운데 두 개 선거구가 투표수 과반수 미달로 무효 처리됐다. 제주도가 이남에서 유일하게 5·10단선을 거부한 지역으로 역사에 남게 된 것이다. 5·10 선거 후 강도 높은 진압 작전이 전개됐다.

마침내 남한에 단독정부가 수립되었고, 제주도 사태는 단순한 지역 문제를 뛰어넘어 정권의 정통성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되기에 이른다. 이승만 정부는 10월 11일, 제주도에 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본토의 군 병력을 제주에 증파시켰다. 1948년 10월 17일, 제9연대장 송요찬(宋堯讚) 소령은 해안선으로부터 5㎞ 이상 들어간 중산간 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배로 간주해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포고령은 소개령으로 이어졌고, 중산간 마을 주민들은 해변마을로 강제 이주됐다. 그리고 대대적인 강경 토벌작전이 제주 전역을 휩쓸게 된다.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된 이후, 중산간 지대는 말 그대로 초토화의 참상을 겪었다. 11월 중순께부터 이듬해 2월까지 약 4개월 동안 진압군은 중산간 마을에 불을 지르고 주민들을 집단으로 살상했다. 중산간지대에서뿐만 아니라 해안마을에 소개한 주민들까지도 무장대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다. 그 결과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입산하는 피난민이 더욱 늘었고, 추운 겨울을 한라산 속에서 숨어 다니다 잡히면 사살되거나 형무소 등지로 보내졌다.

4개월 동안 진행된 토벌대의 초토화 작전으로 중산간 마을 95% 이상이 방화되었고, 마을 자체가 없어져 버린, 이른바 ‘잃어버린 마을’이 수십 개에 이르게 된다. 이 강경 진압작전은 결국 생활의 터전을 잃은 중산간 마을 주민 2만여 명을 산으로 내모는 결과를 빚었다.

1949년 3월 제주도지구 전투사령부가 설치되면서 진압과 선무를 병용하는 작전이 전개됐다. 신임 유재흥(劉載興) 사령관은 한라산에 피신해 있던 사람들이 귀순하면 모두 용서하겠다는 사면 정책을 발표한다. 이때 많은 주민들이 하산했고, 1949년 5월 10일 재선거가 성공리에 치러졌다. 1949년 6월, 무장대의 총책인 이덕구(李德九)가 사살됨으로써 무장대는 사실상 궤멸되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비극은 또다시 일어난다. 한국전쟁 내내 보도연맹 가입자, 요시찰자, 입산자 가족 등이 예비 검속이라는 이름으로 붙잡혀 집단으로 학살됐다. 또 전국 각지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4·3사건 관련자들도 즉결 처분되었다.

[결과]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 지역이 전면 개방되면서 1947년 3·1절 발포사건과 1948년 4·3 무장봉기로 촉발되었던 제주 4·3 사건은 7년 7개월 만에 비로소 막을 내리게 된다. 4·3사건으로 인해 제주공동체는 파괴되고 엄청난 물적 피해를 입었으며, 무엇보다 깊은 상처로 남아 있는 참혹한 인명 피해를 가져왔다.

2003년 10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확정한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에 의하면, 4·3사건의 인명 피해는 2만 5천 내지 3만 명으로 추정되고, 강경 진압작전으로 중산간마을 95% 이상이 불타 없어졌으며, 가옥 39,285동이 소각되었다. 4·3사건진상조사위원회에 신고 접수된 희생자 및 유가족에 대한 심사를 마무리한 결과, 2011년 1월 26일 현재 희생자로 14,033명과 희생자에 대한 유족 31,255명이 결정됐다. 결정된 전체 희생자 가운데 서귀포시[4·3사건 당시 남제주군] 관내 희생자 수는 4,553명다.

[서귀포시의 4·3사건]

지금의 서귀포시는 4·3사건 당시 남제주군으로서, 군청 소재지인 서귀면과 성산면, 표선면, 남원면, 중문면, 안덕면, 대정면 등 7개 면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제주도 전체에서 한라산 남쪽 절반을 차지하는 지역이다. 4·3사건 당시에는 대정면 모슬포에 국방경비대 제9연대가 주둔하였으며, 한라산 무장대 초대 사령관인 김달삼의 고향이 대정면 영락리다.

4·3사건의 기점이 된 1947년 3·1사건 당시 성산포 제약공장 광장, 남원국민학교, 중문국민학교, 안덕국민학교, 대정국민학교에서 집회 및 시위가 열린 바 있다. 군청 소재지인 서귀포에서는 경찰의 사전 검속으로 집회가 개최되지 못하였다.

1948년 4월 3일 새벽 무장봉기 때에는 서귀포경찰서 관내 남원·대정·성산지서 등 3개 지서가 무장대의 습격을 받았다. 모슬포지서는 모슬포가 국방경비대 제9연대 주둔지였으므로 습격을 받지 않았다. 모슬포 주둔 제9연대장 김익렬은 1948년 4월 말 무장대 사령관 김달삼과 소위 ‘평화협상’을 시도했는데, 그 무대가 된 곳이 대정면 관내 지역이었다.

4·3사건 당시 제주도에서 치러진 5·10선거는 제주도 3개 선거구 가운데 북제주군 갑구와 을구 선거구에서 과반수 미달로 무효 처리되었다. 오직 남제주군 선거구만 86.6%(총선거인 수 37,040명 중 32,062명 투표)의 투표율을 보인 가운데 무소속 오용국이 당선 확정되었다.

4·3사건의 과정에서 무장대와 토벌대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 과정에서 남제주군 관내 모든 지역에서 수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하였다. 대표적인 집단 희생 사건으로는 서귀면 정방폭포 부근 사건, 성산면 터진목 사건, 표선면 표선 백사장 사건, 표선면 성읍리 무장대 습격사건, 표선면 가시리·토산리 사건, 남원면 의귀리 사건, 중문면 신사터 사건, 대정면 탄약고터 사건, 대정면 섯알오름 예비검속 희생 사건 등을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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