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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리 씨름장 항쟁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600712
한자 古城里-場抗爭地
분야 역사/근현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유적(일반)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성산읍 고성리 352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한금실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현 소재지 고성리 씨름장 항쟁지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성산읍 고성리 352번지 지도보기
성격 항일운동|씨름장 터
관련 인물 고승운|한봉희|박군평|김영화|황봉진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성산읍 고성리에 있는 항일항쟁지.

[개설]

1927년 5월 16일 정의면 중앙청년회[회장 고은삼]가 주최한 대운동회가 고성마을 씨름장[속칭 소금막]에서 열리던 중 풍랑을 피해 성산포로 대피했던 일본어선 선원들이 씨름장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이들 대부분은 일본인 어부였으며, 일부 한국인도 있었다. 일본 어부들은 씨름경기에 참가해 경기를 하던 중 제주민에 대해 차별적인 언사와 강압적인 태도를 보이며 경기진행을 방해했다. 씨름대결에서 패한 일본인 어부가 심판을 봤던 정의면 청년의 빰을 때린 것이 발단이 되어 이에 격분한 500여명의 정의면 청년과 200여명의 일본 어부[일부 외래인 포함] 사이에 집단 싸움이 벌어졌다. 이 일로 인해 일본 선원 중 2명이 상해를 당하자 일본 경찰이 출동, 이를 진압한 다음 다수의 정의면 청년들을 체포, 제주경찰서로 압송했다. 체포된 52명은 광주지방법원 재판에서 1년 이상의 징역형을 받았으나, 일본 어부들에 대한 처벌은 전혀 없었다. 1927년 12월 16일 광주지방법원과 1928년 12월 15일 대구복심법원 상고 결과 오조리 고승운·성산리 한봉희·온평리 박군평·종달리 김영화·시흥리 황봉진 등이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 받았다.

[현황]

성산읍 고성교차로에서 성산일출봉 방면으로 일출로를 따라 200여m 이동한 곳에 위치해 있는 씨름장 터는 고성리 352번지 소금막 일대로 현재 고성리성산일출봉을 연결하는 도로가 관통하고 있으며 도로변은 완전히 갈대밭으로 변모했다.

[의의와 평가]

싸움을 유발한 일본인 선원들은 처벌을 전혀 받지 않았으나 고승운·한봉희·박군평·김영화·황봉진 등은 이 사건으로 인해 1928년 12월 1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요상해 및 상해 치사죄로 실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그러나 이 사건은 항일운동으로 제대로 평가되지 못하여 당시 옥고를 치렀던 사람들에 대한 국가차원의 평가가 내려지지 못하고 있다. 앞으로 이들에 대한 근거자료를 보완하여 국가보훈처에서 적절한 조치가 취해져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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