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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선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600895
한자 高守善
이칭/별칭 우인(又忍),우당(又堂)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가파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웅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98년연표보기 - 고수선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16년 - 고수선 권업모범장여자잠업강습소 졸업
수학 시기/일시 1919년 - 고수선 경성여자공립보통학교 졸업
활동 시기/일시 1919년 - 고수선 3·1 운동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22년 - 고수선 종로경찰서 체포
수학 시기/일시 1928년 - 고수선 경성의학전문학교 졸업
활동 시기/일시 1928년 - 고수선 장춘의원 개업
활동 시기/일시 1945년 - 고수선 대한여자국민당 논산지구당 위원장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54년 - 고수선 제3대 국회의원 선거 입후보, 낙선
몰년 시기/일시 1989년 8월 11일연표보기 - 고수선 사망
출생지 고수선 출생지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가파리 지도보기
거주|이주지 고수선 거주지 - 충청남도 논산군 강경읍
학교|수학지 권업모범장여자잠업 강습소 - 경기도 수원시
학교|수학지 경성여자공립보통학교 -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
활동지 장춘의원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성격 항일운동가|의사|여성운동가
성별 여자
대표 경력 대한여자국민당 논산지구당 위원장

[정의]

일제강점기에 활약한 서귀포 출신의 항일운동가·의사·여성운동가.

[개설]

고수선은 일제강점기에 항일운동가·교육자로 활동하였고, 광복 후에는 의료인, 여성권익신장을 위한 여성운동가·정치가·사회사업가·문화예술단체지도자로 활동하였다.

[가계]

고수선[1898~1989]은 구한말인 1898년(광무 1)에 대정읍 가파도에서 출생하였다. 본관은 제주(濟州)이고, 호는 우인(又忍)이다. 아버지는 고석조(高錫祚), 어머니는 오영원(吳榮元)이다. 어머니 오영원은 가파도에서 무남독녀로 태어나 고수선을 무남독녀로 두었는데, 당시 세태(世態)로는 여성은 언문(諺文)만 하면 충분하다고 하던 때에 고수선대정공립보통학교로 입학시켜 대정현(大靜縣) 성안으로 살림을 옮겨 딸을 돌보았고, 고수선이 일본으로 건너가 의학전문학교(醫學專門學校)에 다닐 때에도 같이 일본으로 가 삯바느질로 딸의 뒷바라지를 했을 만큼 지극정성으로 딸을 교육시켰다.

[활동 사항]

신성여학교, 대정공립보통학교를 다녔으며, 경기도 수원에 있는 권업(勸業) 모범장 여자잠업(蠶業)강습소 1년 과정을 졸업하고, 1916년 경성여자공립보통학교 2학년에 편입하였다.

1919년 고종 황제가 승하하자 광장에 나아가 군중들과 함께 곡(哭)하였고, 3·1 독립 만세 운동 때에는 학교 내에서 은밀하게 만세 운동을 계획하고 시위에 적극 가담하였다. 경성여자공립보통학교 졸업 후 같은 학교에 부설된 사범과에 들어갔으며, 사범과 졸업 후에는 충청남도 논산군의 논산공립초등학교의 교사를 역임하였다.

이때 박정식의 부탁으로 독립군 자금 370원을 모금하여 상해(上海) 임시정부로 보냈다. 이로 인해 일본 경찰의 감시가 심해지자 임시정부 요인이었던 장두철(張斗撤)의 주선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요시오카[吉岡]의 의학전문학교(醫學專門學校)에 입학하였으나 사상범이라는 일제 당국의 관심과 관동대지진이라는 당시 상황으로 인한 정서불안에 몸이 쇠약해져 귀국하였다. 1922년 3월 귀국 직후 고수선은 곧바로 조선인 형사에게 체포되었다. 그는 1919년 3월 5일 만세시위를 모의하였다는 혐의 아래 손가락 사이를 연필로 비트는 고문을 받았으나 모두 이겨내고 석방되었다. 이때 당한 고문으로 그녀는 손가락에 장애가 발생하였다.

이후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 1928년 졸업을 하여 한국인 여의사 1호가 되었고, 경기도 개성(開成)의 남성의원(南星醫院) 소아과에 근무하였다. 이때 만난 경성의학전문학교 출신의 김태민(金泰珉)과 결혼하여 귀향하게 된다. 그때 고수선의 나이 30세였다. 귀향 후 부부는 조천에 장춘의원(長春醫院)을 개업하였다.

1944년 일제가 전쟁 수행을 위하여 제주 주민 일부를 육지부로 소개(疏開)하자 고수선은 충남 논산군 강경읍(江景邑)으로 이주하였다. 조국이 광복되자 그녀는 임영신(任永信)이 이끄는 대한여자국민당 논산지구당 위원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1951년 1·4 후퇴 때 제주로 귀향하여 전쟁 고아들을 구휼하고, 홍익보육원·제주모자원을 세우는 등 사회사업을 전개하였다. 여성권익신장을 위해 여성운동을 함은 물론 정치계에 입문 도의원, 민의원에 도전하기도 했고, 한국부인회 등 여성단체·문화예술계의 지도자로 활약하였다. 1989년 8월 11일 제주에서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78년 용신(容信) 봉사상, 1980년 제1회 만덕(萬德) 봉사상, 독립 유공 대통령 표창 수상,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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