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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603021
한자 高麗時代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시대 고려/고려
집필자 임승희

[정의]

고려의 건국에서부터 멸망[918~1392년]에 이르기까지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의 역사와 문화.

[개설]

탐라는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기 9년 전인 925년(고려 태조 8)에 고려에 조공을 하고 있었다. 약 350여 년 동안 탐라는 ‘국(國)’으로서 고려와 대외 관계를 계속해 오다가 1161년(의종 15)에 현령관 최척경이 파견되어 오자 비로소 고려 군현 제도의 일부로 편입되었다. 하지만 내부적으로 성주(星主)와 왕자(王子)에 의한 상당한 지방적 자립성이 보장되고 있었다.

1271년(원종 12) 삼별초가 제주에 입도하여 여몽 연합군에 대한 저항 운동을 지속해 나가자 1272년 여몽 연합군이 삼별초를 평정하였다. 고려와 몽고는 제주에 군사 1,400명[고려군 1,000명, 몽고군 400명]을 주둔시켜 탐라국 초토사를 설치하여 군정적 통치를 실시하였고 이후 탐라는 약 100여 년 간 몽고[원(元)]의 직할령이 되었다.

[고려 전기의 탐라]

제주도는 그 역사적·지리적 특성상 군현 체계에 의한 중앙의 직접 지배가 바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성주·왕자와 같은 전통적 지배 체계를 정부가 장악함으로써 제주를 통할하는, 간접 지배 방식으로 통치하였다. 즉, 고려에서는 탐라국의 지배 세력인 성주와 왕자에게 벼슬과 지위를 내려주었다. 이는 곧 고려가 탐라국의 국가적 칭호를 인정함과 동시에 탐라국의 최고 지배 신분층, 즉 국왕과 부왕을 의미하는 성주와 왕자 제도를 인준해 준 것이다.

성주·왕자 제도의 공식적인 폐지는 1105년(숙종 10) 탐라국이 해체된 이후인 1402년(조선 태종 2)에 이루어졌다. 이는 탐라국이 해체된 후에도 탐라국의 지배 세력을 상징하는 성주·왕자 제도가 그대로 유지되어 왔음을 의미한다.

제주 지역에 고려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구체적으로 미치게 된 것은 고려 중기, 대략 12세기에 들어오면서 부터의 일이었다. 제주가 ‘탐라군(耽羅郡)’으로서 고려 군현 체계에 본격 편입된 것은 1105년의 일이며, 12세기 후반 의종대에는 현으로 개편되면서 낮은 직급이기는 하지만 현령관으로서 지방관이 파견되기도 하였다.

의종대 현령의 파견은 제주 지방에 대한 중앙으로부터의 최초의 상주 지방관 파견으로 보이며, 이후 중앙 권력의 침투가 현저히 진전되는 발판을 만들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즉, 고려에서는 탐라국 왕족들에게 무산계를 수여하거나 구당사(句當使)를 파견하여 간접적으로 통치권을 행사하다가 숙종 때에 이르러 지방 행정 구역으로 편제되면서 비로소 고려의 직접적인 통제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결국 탐라현은 군(郡)으로, 그리고 다시 목(牧)으로 승격되었는데, 이는 당시 제주의 성주·왕자라는 전통적 지배 체제가 점차 고려의 일반 군현 체제로 대체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중앙 정부의 통제 의도 함께 ‘탐라’의 이름이 ‘제주’로 개칭된 것은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제주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려는 중앙 정부의 입장에서, 독립국으로서의 인식을 불러일으키는 ‘탐라’라는 명칭이 달갑지 않았을 것이다. 이에 ‘제주’라는 명칭이 ‘탐라’를 대신하게 된 것은 탐라가 군에서 목으로 승격한 것과 함께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시기는 1223년(고종 10) 이전, 대략 13세기 초 고종대 초기의 일로서 탐라가 독립국으로서의 전통을 담은 이름인 것에 비하여 제주는 중앙이나 타 지역의 관점에서 본 이름이라는 것이 주목된다.

탐라가 고려의 일반적인 지배 체제에 편입되어 중앙의 직접 관리 대상이 되는 전환점이 되었던 12-13세기는 다른 한편으로 고려의 중앙 권력과 제주 민간의 갈등이 축적된 시기이기도 하다. 1186년(명종 16) 7월 제주민이 반역을 일으켰다는 정보가 중앙에 전달되자, 왕이 현령과 현위의 행정 책임을 물어 중벌에 처하였다. 확인 결과 반역 정보는 사실이 아니었음이 드러났으나, 중앙 권력과의 갈등은 이미 문제가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202년(신종 5) 10월에는 제주민 번석과 번수 등이 난을 일으켜, 고려 정부에서 군사를 내려 보냈고, 주모자를 처단하여 사태를 수습하기도 하였다.

1267년(원종 8)에도 유이농민 집단에 의한 문행노의 난이 일어났다가 곧 평정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반정부 봉기와 갈등의 직접적 원인은 세금의 지나친 징수였다. 특히 지방관의 자의에 의한 세금의 과징과 탐학이 결국 제주민과의 갈등을 촉발시키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원 간섭기의 탐라]

무인 정권 붕괴에 이은 고려 정부의 개경 환도는 몽고에의 복속을 의미하였기 때문에 일각에서는 이와 같은 정책으로의 전환을 수용할 수 없었다. 이처럼 고려의 개경 환도 및 몽고에의 복속에 대하여 정면으로 반기를 들고 일어난 것이 강화도의 삼별초였다. 이들은 몽고의 직접적인 관리 아래 들어간 개경 정부를 부정하고, 왕족 승화후(承化侯) 온(溫)을 새 왕으로 옹립하고 항몽 정책을 유지하는 신정부를 수립하였다.

삼별초 군대는 몽고에 복속한 개경 정부에 반대하여 반몽 항전을 지속하다가 1271년(원종 12) 5월, 삼별초의 진도 정부가 무너진 후, 최후 거점으로 제주도를 삼게 되었다. 결국 13세기 반몽 항전 역사의 모든 무게 중심이 제주도에 집중되었고, 제주의 삼별초 세력은 김통정을 중심으로 조직화되었다. 당시 제주 삼별초의 거점으로 마련된 것이 제주시 애월읍에 소재한 항파두성이었고, 여몽 연합군의 제주 상륙 차단을 위해 ‘환해장성’이 해안을 따라 구축되었다.

그러나 1273년 제주에서 항쟁하던 삼별초 군대는 고려 군대 6천 명, 몽고 군대 4천 명으로 편성된 여몽 연합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삼별초의 항전은 반몽·반개경 정부라는 역사적 성격을 분명히 함으로써 제주사에 큰 자취를 남겼다. 결국 몽고는 군대의 일부를 제주에 주둔시키게 되면서 제주를 점령하기에 이르렀고, 제주는 이때부터 그 후 약 100여 년 간 몽고[원]의 간섭을 받았다.

원은 제주도 점령 직후 이를 직할령으로 삼아 일본 및 남송 정벌전에 활용하고자 하였고, 결국 1273년 제주 삼별초의 붕괴 이후 동아시아 정세는 급속히 원을 중심으로 재편되었던 것이다.

원은 제주도가 갖는 전략적 중요성에 주목하여, 탐라총관부를 설치하고 한반도에서와는 달리 이 지역을 직접 관리하여, 제주의 문화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특히 원은 제주 지역의 자연 조건에 적합한 우마 양육의 목장을 적극 조성하였고, 각종 물자의 수탈도 감행하였다.

그리고 유배지로서 제주가 이용되기 시작한 것도 원의 간섭을 받으면서 비롯되었다. 10여 개의 성씨가 원으로부터 유입되거나 목마장 관리를 위해 몽고에서 파견된 목호(牧胡)들이 제주에 거주하는 등 많은 변화가 있었다.

원이 명(明)에게 쫓기고, 14세기 중반 공민왕의 배원 정책에 의해 고려에 대한 원의 정치적 영향력은 현저히 약화되었다. 그러나 제주의 경우 이미 토착화된 몽고 세력의 존재로 인하여 그 저항이 훨씬 강력하였는데, 당시 고려 중앙 권력에 집단적으로 저항하여 소위 ‘목호의 난’을 일으켰다.

1374년(공민왕 23) 고려 정부는 최영 장군에게 약 2만 5천여 명의 대병력을 주어 목호의 난을 진압하였고, 이를 계기로 제주에 남아있던 반독립적인 요소는 급격하게 약화되었다. 지금의 서귀포시 범섬은 목호들과의 최후 전투를 벌였던 장소이기도 하다.

이로부터 10여 년 뒤인 1388년(우왕 14) 요동 정벌 작전을 주도한 최영 장군은 위화도에서 회군한 이성계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고, 1392년 고려 왕조는 멸망하여 새로운 국가 조선이 성립되었다.

이처럼 원의 멸망으로 제주에 대한 지배권은 고려로 이양되었고, 고려를 대체한 조선은 목마장 등 제주를 경제적으로 중요한 지역으로 인식하기 시작하면서 제주에 대한 그들의 지배권을 강화하여 나갔다.

그것은 결국 1416년(태종 16)의 삼읍, 즉 제주목·정의현·대정현의 설치로 이어졌다. 그 후 약 500년간 이러한 구조는 제주도 내의 문화적인 차이를 가져오게 하였으며, 특히 남북보다는 동서 간 문화적 차이가 더욱 깊게 나타나는 특성을 보여준다.

[원 간섭기에 원이 서귀포에 남긴 유산]

1. 법화사(法華寺)

법화사는 제주시 외도동 수정사 및 삼양동 원당사 등과 함께 고려 후기 제주 지방의 대표적인 사찰이었다. 특히 비보사찰인 법화사와 수정사는 한라산 남과 북을 대표하는 사찰로 1408년(태종 8) 이전에는 사찰 노비가 각각 280명, 130명에 이를 만큼 큰 절이었다.

법화사는 총 4차에 걸친 발굴 조사를 통해 고려 시대 건물지 6개소와 조선 시대 건물지 4개소, 초가 관련 시설, 계단 시설 등이 확인되었다. 특히 테두리가 음각된 특수 건물지의 대형 초석과 이중 기단석, 상등품의 청자, 원나라의 콩두미 궁전에서 발굴된 막새와 유사한 용과 봉황문 막새, 청동 등잔 등의 유물이 확인된 바 있다.

이는 13~14세기경 원의 지배가 이루어졌고, 이에 따라 탐라총관부가 설치된 후 원에 의해 중창된 사찰 건물, 혹은 원과 관련된 중요 건물이 옛 법화사에 존속했음을 추측케 한다. 또한 인화 분청 등의 각종 분청사기류, 조선 청자 등의 유물은 조선 초기까지도 법화사가 중요 사찰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법화사의 창건에 대한 사적기나 문헌 기록이 현존하지 않으나, 폐와 무지에서 '지원 육년 기사 시 중창 십육년 기묘 필(至元六年己巳始重創十六年己卯畢)' 이라고 명문된 기와가 출토되었기 때문에 법화사의 중창은 1269년(원종 10)에 시작하여 1279년(충렬왕 5)에 마무리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원이 그 영향력을 제주에 미치기 시작하면서 이미 존재하고 있던 법화사 사찰을 허물고 새롭게 대대적으로 중창함으로써 법화사는 고려 후기 제주도의 대표적인 사찰로 성장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2. 하원동 탐라왕자 묘(墓)

서귀포시 하원동 분묘군은 일찍부터 ‘왕자 묘(王子墓)’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이 묘역은 현재 서귀포시 하원동 산21번지에 위치한다. 하원동 탐라왕자 묘역에는 해발 224m의 자연적인 능선에 일직선으로 3기 분묘가 나란히 배치되어 있는데, 2m 높이의 축대가 만들어져 있어 밖에서 보면 위세를 갖춘 묘역을 연상케 한다. 이들 분묘는 1914년 일본인에 의해 조사되었는데, 이는 “국립 중앙 박물관 유리 원판(琉璃原版)”에 ‘가래천변 장군총 출토 유물’로 소개되었고 현재 유물은 국립 제주 박물관에서 소장되어 있다. 당시 출토 유물은 백자병 및 청동합 등으로 시기는 14세기 말에서 16세기 초에 해당한다. 하원동 탐라왕자 묘역의 3기 분묘 주인공은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걸친 남평 문씨 남제공파의 왕자직 역임자의 묘이며, 방형 석곽묘인 이곳 왕자 묘들은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이르는 시기 제주도 묘제사 변천 과정 연구에도 학술적, 역사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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