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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서 사니까 산신을 위하는가 봐유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9A030502
지역 충청북도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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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리 동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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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재옥-동제

‘터진 데’는 다 지냈단다. 미륵리의 동제(洞祭)는 사방 미륵리로 들어오는 길목마다 다 지냈다고 했다. 밤, 대추, 밤, 백설기, 그리고 돼지머리를 준비해서 제관들이 마을 곳곳에서 지냈다고 했다. 마골점 봉수대에서 우선 지낸 다음 암말에서는 미륵사지 앞 200여m 지점의 서낭당과 당시 마을에서 약 200여m 하늘재 방향으로 올라가서 나무에 ‘검줄(금줄)’을 치고 지냈고, 점말에서는 마을 입구에 있는 서낭당에 고사를 지낸다고 한다.

미륵리의 동제는 많이 변했다고 한다. 예전에는 제관을 선발하기 위하여 각 반의 반장이 공책에 호주의 생년월일을 적어 ‘아는 으른’에게 갖다 보이면 생기복덕(生氣福德)을 따져 제관(祭官)을 지정하였다고 한다. 제관으로 지정이 된 사람은 감히 거절을 못하였고 제관과 공양주로 지정된 집에는 일주일 전부터 ‘검줄(금줄)’을 치고 부정을 막고 정성을 드렸다 한다. 제물을 장만하는 공양주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제관은 상주 등 부정한 사람과의 면대를 예방하기 위하여 아예 출입을 자제하였고 고사를 올리기 전에 목욕재계하는 것은 필수였다. 제물을 준비하는 공양주도 역시 마찬가지로 몸을 정하게 하고 부정한 것을 보지도, 하지도 않았다 한다. 제물은 쌀 3되 3홉을 걷어서 떡을 하고 또 그 일부로 제주(祭酒)도 담갔는데 정성을 많이 들여서인지 맛이 참 좋았다고 한다. 동제일은 10월 초순으로 하고 매년 날을 받아서 했었다. 동제일을 잡으면 미리 고사를 올릴 봉수대를 청소를 하고 금줄 쳐서 정화를 하였다. 고사 형식은 초헌, 아헌, 종헌의 형식을 갖추어 3잔을 올리고 축문을 읽고 일일이 마을 호주의 이름을 다 호명하며 건강과 재운을 빌며 소지를 하였다. 동제가 끝난 다음에는 제물을 조금씩 떼어서 버렸는데, 참으로 어려웠을 때는 아이들이 그 것을 주워 먹으려고 고사장 주변을 어슬렁거리기도 하였다고 했다. 또한 제물은 조금씩 나누어 가가호호마다 배달을 했다 한다.

현재의 동제는 모든 것이 변했다고 했다. 우선 제관, 공양주 선출하는 것도 이젠 따로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상하게도 사주를 보고 생기복덕한 이를 가리면 매번 선발되었던 사람이 거의 반복되다 보니 반발이 심해 폐지하였다. 요즘에는 이장, 반장, 새마을 지도자, 대동계장 등 마을 ‘일꾼’ 몇 명이 모여서 제관과 공양주를 정하는데, 대체로 이장 집에서 음식을 장만한다. 모든 비용은 대동계에서 부담을 하고 제물 외에 음식을 별도로 더 장만하여 동제 후에 잔치를 벌인다. 동제일도 10월 초순 중에서 한 날을 아주 정하자고 해서 1992년도부터 음력 10월 3일로 고정을 하였다. 제관도 ‘사람 봐가면서’ 결정을 한단다. 고사에 직접 참여하는 이도 소수의 ‘일꾼’들만 지내고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은 고사가 끝날 때를 기다리고 있다가 ‘으레껏 먹을 줄 안다’고 한다. 고사 시에 축문도 간단하게 변해서 예전 양식을 버리고 제관이 마을 잘 되게 해달라고 빌고 개인별 소지(燒紙)도 생략하면서 고사장까지 따라간 사람들만 잔을 올리고 끝낸다고 한다.

양재옥 씨는 미륵불이 있음에도 마을 사람들은 초파일 외에는 별로 안다녔다고 했다. ‘미신이 껴서’ 미륵부처보다는 서낭 고사를 중하게 여겼고 또한 ‘산에 사니 산신을 위하는 가봐유’ 한다.

[정보제공]

  • •  양재옥(남, 70세, 미륵리 노인회장)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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