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9C0302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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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충청북도 충주시 주덕읍 제내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성호 |
향토연구가 이세영 씨를 처음 만난 곳은 숲거리였다. 풍덕마을 조사를 위한 기초 자료를 수집하고자 전화로 자료를 부탁드리고 충주를 출발했다. 풍덕마을에 도착하니 도로 사정을 비롯한 몇 가지 기초조사와 마을 입구 정류장 주변의 사진도 몇 장 찍은 후인지라 예정시간보다 훨씬 늦은 시간이 되었다. 처음 뵙게 되는 상황이라 마을에 도착해 댁으로 찾아뵐 요량이었다. 그런데 숲거리에 도착하자 아직도 싸늘한 바람이 간간히 부는 으스스한 날씨임에도 겨울용 두툼한 외투를 입고 손가방을 든 어른은 언제부터인지 모르나 숲거리에 이미 나와 기다리고 계셨다. 외지에서 처음 오는 방문자에 대한 배려이리라 여겨지자 늦게 도착한 송구스러움에 당황하였다. 인자한 얼굴로 처음 보는 방문자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이 자리에서 마을연구가답게 두툼하게 정리된 자료를 한보따리 전해주셨다.
그는 1927년 12월 경기도 여주군 점동면 덕평리에서 출생하였다 한다. 그곳에서 감곡소학교를 졸업하고 이곳 제내리 풍덕마을로 이사와 지금까지 줄곧 살게 되었다한다. 그의 삶은 그야말로 시대에 따라 최선을 다해 일해 온 풍덕마을 최고의 지도자였다. 농촌계몽운동가요, 지역사회개발운동가이자 새마을 운동가였으며, 유아교육에 심혈을 기울인 교육자였을 뿐만 아니라 마을의 역사를 고스란히 기록 정리한 향토연구가였다. 지나온 삶의 이력을 거침없이 들려주는 그의 목소리에는 아직도 20~30대 젊은이다운 패기와 용기가 흠뻑 배어 있었다.
그는 1945년 해방과 함께 일제의 학정으로 피폐할 대로 황폐해져버린 농촌이 된 풍덕마을을 위하여 10여명의 청소년들과 힘을 합쳐 문맹퇴치운동에 앞장섰다고 한다. 또한 도박을 근절시키는데도 앞장서고 소작인들의 편에 서서 그들의 어려움을 대변해 주는 계몽운동에도 심혈을 기울였다고 한다. 이러한 활동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그는 남모르게 뼈저린 고행을 맛보기도 하였지만, ‘마을주민들이 자신을 이해하고 믿어주며 신뢰해 주는 것만으로도 보람이 되었고 만족스럽게 생각했다’고 한다.
계몽운동에 이어 1957년에는 농협운동에 앞장섰다고 했다. 농협이 당시로서는 아주 생소했던 시절이었음에도 그는 농협을 창립하는데 선구적인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구판장 개설, 정미소 운영 등 당시로서는 충주에서 가장 먼저 업무를 개시하여 충주 지방 굴지의 농협으로 육성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한다. 아울러 1960년 정부의 보조사업으로 진행된 지역사회개발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마을 주민들의 협조를 이끌어 내어 성공리에 완수함으로써 당시 건립된 사업체가 지금까지도 계속 운영되면서 마을 수익사업에 크게 도움이 되고 있음을 볼 때 ‘보람을 느끼게 된다’고 한다.
1973년부터 시행된 새마을 운동에 대한 이야기에 이르게 되자 노어른의 모습은 이내 젊음과 패기가 넘치는 청년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온 듯 힘이 넘쳐흘렀다 한다. ‘하면된다’는 신념과 열정으로 뭉쳐진 새마을 지도자와 지역주민들의 노력이 한데 어우러진 당시의 풍경을 눈앞에서 보는 듯 거침없이 증언하였다. 그러면서 그도 ‘저력이라는 것이 막다른 골목에서 솟아나는 무한한 힘임을 지금도 새삼 느낀다는 것’이다. 그는 새마을 운동이 ‘농촌을 위하여 꼭 있어야 할, 안했으면 안 될 중차대한 사업이자 농촌 개벽운동’이라 규정지었다. 이러한 분들의 열정이 있었기에 우리나라 새마을 운동이 그 짧은 기간에 농촌 사회를 근대화된 모습으로 완전하게 탈바꿈시킬 수 있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풍덕마을의 남녀노소가 대동지역(大同之役)으로 반년 동안 호당 평균 120여일 정도 출역하여 새마을 사업을 완수해냄으로써 전국 최우수 마을에 선정되었으며, 이에 따라 전국 최우수 마을상을 수상하였고, 이세영 씨도 새마을훈장 근면장을 수상하였다고 한다.
그의 마을개발과 발전에 대한 열정은 새마을 사업의 지도자 역할만으로 끝난 것은 아니었다. 그는 후세교육에도 남다른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의 자녀교육은 물론이고 어린아이들의 교육에도 남다른 열정을 가지고 있었기에 새마을 유치원 사업에도 정열을 쏟아 부었던 것이다. 그는 17년간 무보수 명예직 유아원장직을 역임하였다. 그는 무보수 명예직 유아원장직을 수행하면서 ‘침체된 나의 농촌운동 정신을 깨어나게 하는 촉진제가 되었다’고 힘주어 말하였다. 그가 이야기하는 ‘선공후사(先公後私)하고 봉사와 희생의 정신’으로 살아온 그의 가치관이자 인생의 좌우명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의 빛나는 노력과 업적은 그것만으로 다 소개된 것은 아니었다. 그가 꼼꼼하면서도 상세하게 기록한 과거의 사실들은 지나가버린 단순한 시간적 과거가 아니라 생생하게 기록된 현장의 목소리가 담긴 오늘의 역사적 사실로 되살아나고 있었다. 그야말로 마을의 산 증인이자 주인공으로서 오늘의 가치를 더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는 처음부터 마을지를 생각하고 기록한 것이 아니었단다. 그저 지나온 일들의 기록들을 모아놓은 것이 마을지가 되었단다. 우리들이 고생한 기록들을 남김으로써 후세들에게 잘못하면 이렇게 고생할 수도 있다는 교훈을 남기기 위하여 기록을 시작했다 한다. 본인의 말대로 “참으로 하찮은 작은 일을 실천했을 뿐” 이라는 평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 조그만 실천은 오늘에 와서 『풍덕마을지』, 『방풍림 백년사』, 『풍덕마을의 촌락사』, 『방죽안 인물지』 등과 같은 훌륭하면서도 위대한 업적이 되어 되돌아 왔다. 하루하루 착실하게 기록된 마을의 일들은 오늘에 이르러 제내리 풍덕마을의 완전한 역사가 되어 현재와 호흡하는 지난날의 가치 있는 역사적 사실로 거듭나고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예전 사람들이 겪었던 고달픈 삶을 후세에게 전할 필요성’ 이상의 가치로 오늘의 풍덕마을 사람들에게 교훈으로 거듭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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