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충주문화대전 > 충주향토문화백과 > 삶의 내력(역사) > 근현대 > 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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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 이후부터 현재까지 충청북도 충주 지역 역사. 1945년 8·15해방은 우리 민족에게 커다란 환희와 함께 혼란과 고통도 가져다주었다. 충주도 해방 후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좌익과 우익의 대립이 노정되면서 많은 대립과 갈등이 야기되었다. 좌익과 우익의 갈등 결과, 남북이 분단되었으며, 북한은 6·25전쟁을 일으켜 500만 동족을 사상하였다. 충주는 우리나라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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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3월 10일 충청북도 충주시 충주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이 일으킨 시위운동. 1960년 대통령 선거를 1개월 앞두고 민주당 대통령 후보 조병옥이 사망함으로써 자유당 대통령 후보인 이승만은 당선이 확실시되었다. 그러나 자유당 정권은 이승만이 나이가 많아 자리를 지키지 못할 경우를 대비하여 대통령직을 승계할 부통령 선거에 이기붕을 당선시키고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불법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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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5월 10일 충청북도 충주시에서 실시된 국회의원 총선거.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의에 따라 열린 미소공동위원회가 1947년 8월 12일 완전히 결렬되어 한국 문제가 표류하게 되자, 미국은 9월 17일 유엔 총회에 한국의 독립 문제를 정식 의제로 상정하였다. 9월 21일 유엔 총회 운영위원회가 유엔 총회 의제에 포함시킬 것을 통과시키고, 23일 본회의에서 의제 채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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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에서 실시한 「농지개혁법」에 따른 농지 분배 정책. 대한민국 제헌헌법 제86조에서 농지개혁의 실시가 규정됨에 따라 1949년 6월 21일 「농지개혁법」이 공포되었으나, 1950년 3월 10일 개정되었다. 1950년 3월 25일 동법 시행령, 4월 28일 동법 시행규칙이 공포되었으나, 4월 15일 농림부는 농지개혁사업을 완료한 것으로 발표하였다. 「농지개혁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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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충주읍이 충주시로 승격됨에 따라 1995년까지 읍의 외곽 지역 12개 면을 관할했던 행정구역. 중원군의 인구는 충주시와 분리된 1년 후인 1957년 12월 현재 113,114명이었으며, 1966년에는 153,487명으로 충청북도 내에서도 으뜸가는 거대한 군이었다. 그러나 1993년 말 현재는 주민등록상 18,951가구에 67,749명(남 34,531, 여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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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 초기에 충청북도 충주 지역에 있었던 지방 행정구역. 조선총독부는 1914년 3월 1일을 기하여 부·군의 구역을 개편하고, 군의 수를 대폭 감축하는 행정구역 개편을 단행하였다. 그 결과 1910년 당시 12개 부, 317개 군은 크게 감축되어 220개 군으로 줄어들어 들었고 109개 군이 폐합되었다. 이 과정에서 충청북도에서도 청풍·청안·문의·회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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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직후 충청북도 충주 지역의 민정 업무를 담당하였던 미군정 부대. 8·15 해방 직후 38선 이남 지역을 점령한 미 전술군 주력 부대는 제24군단 휘하의 제6보병사단, 제7보병사단, 제40보병사단과 군수 지원 부대인 ASCOM 24(Army Service Command 24)였다. 그중 충청북도 지역을 관할한 전술군은 제7보병사단 제17보병연대로, 1945년 10월 5일 제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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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중인 1950년 7월 4일부터 7일까지 충청북도 충주 지역 일대에서 벌어진 국군과 북한군 간의 전투. 동락리 전투는 6·25전쟁 초기 후퇴를 거듭하던 중 국군 제6사단 제7연대가 1950년 7월 4일부터 7일까지 장호원에서 음성에 이르는 무극리 감우재 동락리 일대에서 북한군 제15사단을 상대로 1개 연대 이상 규모를 궤멸시킨 전과를 올린 한국전쟁 중 국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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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 지역에서 1950년 처음 발족된 군인 위문 부대. 6·25 전쟁 중 공연을 통하여 전투에 투입된 장병들을 위문함으로써 국군의 사기 진작에 기여하기 위하여 설립되었다. 1950년 6·25 전쟁 당시 후퇴를 거듭하던 육군 6사단 2연대는 충주의 남한강 가에 진을 치고, 육군본부의 정식 승인 하에 화랑소대와 양양소대의 2개 소대를 합쳐 정식으로 육군 군예대를 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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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25전쟁 중 충청북도 충주 지역에서 한국군과 북한군 사이에 있었던 전투. 북위 38°선을 경계로 남북한에 두 개의 독립된 정부가 들어서면서 남북 간의 대립은 더욱 격화되었으며, 이와 같은 대치 상태는 38°선을 통한 북한 무장게릴라의 침투사건과 남한 후방 지역에서의 공산주의자(빨치산)들에 의한 전복 활동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와 같은 무장 세력에 의한 전복 활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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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8월 충청북도 충주시에 설립되었던 전국학생총연맹 충북도연맹 충주지부. 1946년 7월 31일 반탁·반공 학생운동을 목적으로 반탁전국학생연맹(일명 반탁학련)·경성대학동지회·독립학생전선·서북학생원호회·유학생동맹 등의 단체가 통합하여 전국학생총연맹이 결성되었다. 이어, 동년 8월 초 청주에서 충북도연맹이 결성됨에 따라 충주 지역에도 충주지구연맹이 결성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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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직후 충청북도 충주 지역에 조직된 자생적 행정기구. 1945년 9월 6일 조선인민공화국이 성립되면서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지방 지부는 대부분 지방 인민위원회로 개편되었다. 이에 따라 충주군에는 충주군 인민위원회가 설립되었다. 충청북도의 10개 군 중 충주군, 제천군, 단양군, 청원군, 보은군, 옥천군, 영동군 등 7개 군에는 인민위원회가 설립되었다. 이 중에서 인민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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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11월 3일 북한 공비의 습격과 방화로 충주군청이 불탄 사건. 1950년 6월 28일 북한군은 소련제 탱크를 앞세우고 서울을 점령한 후 계속 남진하여 7월 초 충주를 함락하였다. 북한군은 여세를 몰아 낙동강 전선에서 총공세를 폈다. 1950년 9월 15일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 장군이 인천상륙작전을 성공하여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하고, 그해 10월 1일 유엔군과 한국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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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미군정이 충청북도 충주 지역에서 실시한 미곡 수집 정책. 미군정 당국은 1945년 10월 5일에 일반고시 제1호 「미곡의 자유시장」을 공포해 일제가 1942년 이후 본격적으로 실시해오던 식량통제 정책을 해제했다. 하지만 미곡(米穀)의 자유시장 정책은 미가(米價)의 폭등만 야기하며 사실상 실패하게 되었다. 미군정 당국은 1945년 11월 19일에 일반고시 제6호 「미곡통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