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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규언 3·1운동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600481
한자 姜圭彦三一運動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임승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19년 3월 5일연표보기 - 옥구군 개정면 구암리 만세시위 발생
발생|시작 장소 강규언 3·1운동 - 전라북도 군산 옥구군 개정면 구암리
성격 항일운동
관련 인물/단체 강규언·강문호·김병수·이두열·박연세 /영명학교[기독교계]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중문동 출신의 강규언(姜圭彦)이 1919년 전라북도 군산[옥구]에서 3·1운동에 참여하다 검거된 사건.

[개설]

제주도의 3·1운동은 제주 신좌면 조천리에서 처음 시작되었는데 이는 서울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이를 계기로 제주도 유지였던 최정식과 기독교 목사 김창국·윤식명·김정찬 등이 서로 뜻을 모아 만세운동을 계획한 데 있었다. 이후 1919년 3월 21일 조천리 미밋동산에 500~600명의 사람들이 규합하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는데, 이때 일제 당국에서 급파한 무장대에 의해 무력 진압당하고, 현장에서 김시범 등과 같은 주동자 12명이 검거되는 사건이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제주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계속적으로 3·1운동이 전개되었고, 이 시위의 주동자에는 제주 출신의 학생을 비롯한 인사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 전라북도 지방에서 전개된 3·1운동은 1919년 3월 5일 만세 시위를 시작으로 군산·익산·전주 등지로 확산되어갔다. 이때 만세 운동을 전개하는 데 천도교계와 기독교계의 역할이 컸던 만큼 인근 지역으로 빠르게 전파되었으며 대부분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3·1운동 확산에 큰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 가운데 당시 전라북도 군산 옥구면 영명학교에 유학을 가 재학 중이던 제주 출신 강규언 또한 군산의 만세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가 검거되는 사건이 있었다.

[역사적 배경]

강규언은 본래 제주 서귀포시 중문면 중문리 태생이었는데 1914년 같은 중문리 출신의 강문호와 함께 최대현(崔大賢) 전도인에 의해 기독교에 입교하게 되었다. 이후 전라북도 옥구군 개정면 구암리에 있는 영명학교로 유학을 가게 되었고, 당시 1919년 거국적으로 3·1운동이 일어나면서 강규언이 다니고 있던 기독교계 학교인 영명학교에까지 그 여파가 불어 닥치게 되었다. 이처럼 군산[옥구]에서의 3·1운동은 옥구군 개정면 교회와 부속 영명학교 교사·학생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경과]

군산에서의 3·1운동이 구체적으로 발전하게 된 동기는 당시 영명학교 교사였던 박연세·이두열 등이 서울에서 내려온 세브란스 의전 학생이었던 김병수로부터 독립선언서 200장을 전수받아 만세시위를 계획하면서부터였다. 이들은 3월 6일 군산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조직적인 만세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동지들을 규합했는데, 이 동지들 가운데 바로 제주 출신 스물한 살의 학생이었던 강규언이 뜻을 같이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3월 1일부터 4일까지 김영후·송기옥·강규언·강문규 등은 함께 학교 기숙사 2층 다락방에 모여 영명학교 등사판을 이용해 독립선언서 7,000여 장을 비밀리에 등사하고 태극기를 만들어 각 지방에 연락, 당일 거사를 준비하였다.

그러나 만반의 준비가 끝난 3월 5일, 영명학교의 오전 수업이 끝났을 때쯤 만세운동 계획이 사전 발각되어 군산경찰서에서 수명의 경찰이 나타나 이두열·김수영·박연세 등이 교사를 연행해 갔다. 이때 만세운동의 예비적인 요원으로서 표면에 나타나지 않고 있던 김윤실이 지금까지의 준비가 모두 수포로 돌아갈 수도 있다는 판단 아래 동지들과 긴급 회의를 갖고, 거사일을 하루 앞당겨 즉각적으로 궐기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로써 강규언을 비롯한 나머지 동지들은 3월 5일에 옥구군 개정면 구암리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게 된 것이다. 당시 영명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이던 강규언이 주축이 되어 태극기를 흔들면서 독립 만세를 외치고 군중들에게 선언서를 배포하면서 군산시내로 진입하였다. 중도에서 보통학교 학생들과 많은 기독교인들이 행렬에 참여하여, 시위 대열은 약 5백명으로 증가하였고, 구속된 영명학교 교사들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이처럼 군산시 내에 도착한 시위대는 격렬하게 만세시위를 전개하였으나, 출동한 일본 경찰에 의해 대다수 체포되었고 이때 강규언 또한 체포된 것으로 보인다.

[결과]

3월 5일 만세시위운동 이후 더욱 삼엄해진 경찰의 경계와 감시 속에서 영명학교 학생들의 항일운동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하였고, 당시 제주 출신이었던 강규언은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1919년 3월 31일 광주지방법원 군산지청에서 유죄를 선고받았다. 이후 공소를 제기한 바 있으나, 1919년 4월 30일에 대구복심법원 형사 1부에서 징역 6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의의와 평가]

군산[옥구] 지역에서의 3·1운동은 당시 제주 출신이었던 강규언강문호를 비롯한 기독교계 학교였던 영명학교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전개된 것이었다. 이로써 당시 항일 만세운동 확산에 큰 물고를 터주었을 뿐만 아니라 학교 학생들의 조직적인 참여와 군중들의 자발적인 참여가 함께 이루어지면서 전라북도 지방의 만세운동이 크게 확산되어 다른 지역으로 전파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

그리고 강규언이 경우, 비록 제주가 아닌 타 지역에서 전개된 3·1운동에 참여하였지만, 출옥 후에는 자신의 고향인 제주에 내려와 1920년대 제주 서귀포시 대정읍 모슬포에서 광선의숙(光鮮義塾) 설립에 동참하면서 학교 발전에 이바지하며 헌신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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